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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회개와 갱신을 위한 대사경회' 둘째날 말씀 (김근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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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2-05-07 16:33 / 조회 3,0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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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놋 성벽"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푸른뜻교회 목사)

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12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14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예레미야 15:10-21)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예레미야였지만, 뜻밖에도 그의 삶에는 고뇌와 괴로움이 가득하였다. 힘겨워도 은혜로운 이야기,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는 우리가 때로 예레미야보다 더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긍정의 힘’이 대세인 것 같은 세상에 예레미야의 처절한 부르짖음은 어떤 의미일까? 낙천적인 믿음으로 고통을 견뎌내어 넘기려 하지 말고, 고통을 절감하고 직면할 때에 진정한 의미의 긍정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백 두 번째 본문은 15장 10-21절이다. 이 본문 역시 예언자가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백의 배경에는 15장 1-9절 말씀이 있다. 예레미야는 모세와 사무엘 같은 중보자가 온다 할지라도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돌이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15:1).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죽이는 칼과 찢는 개,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을 보내사 그들을 멸하며 흩어버리실 것이다. 닥쳐오는 여러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괴롭히는 이방 민족들을 물리치시며 결국 유다를 회복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의 동포들, 그리고 유다 왕들을 향해, 이토록 단호하고도 확고한 심판과 재앙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이 어찌 고달프고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자신의 태어남과 다툼거리됨을 탄식하는 예언자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를 강하게 하고 복을 받게 할 것임을 확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받는 그 백성을 돌아보시며 그를 강하게 하시고 예비된 복을 주신다. 11절의 말씀은 우리가 늘 즐겨 듣고자 하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자신을 재앙 덩어리라 여기는 예언자의 처절한 자기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강하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 후의 예레미야의 삶은 어떠한가? 그에게 더 이상 재앙이 없었는가? 그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이제 존중을 받게 되었는가? 오히려 그의 삶은 더더욱 환난이 닥쳐왔으니, 여호야김 시대 이래 예레미야는 대부분을 감옥이나 토굴에 갇힌 채로 지내어야 했다. 이것은 11절의 위로의 의미를 깊이 새기게 한다.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심으로, 그리고 그에게 복 주심으로, 예레미야는 그 어떤 시련이나 더 큰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결코 그의 가는 길을 돌이키지 않고 그의 전하는 말씀을 늦추지 않았다. 위로는 달달하고 달콤한 말이지 않다. 위로의 본질은 그 고난의 길에 언제나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자체이다.
  그의 기도는 자신을 돌보실 것에 대한 간구와 더불어 그를 박해하는 자에게 복수해 주실 것에 대한 간구도 포함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또 다른 고백인 18장 21-22절에는 복수를 구하는 기도가 훨씬 자세하고 강렬하다: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이러한 기도는 “저주의 기도”라는 이름이 딱 어울릴 정도로 상대를 향한 ‘저주’로 가득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성경에는 이러한 저주의 기도가 도처에 있다.    그래서 어느 한 부분을 안 읽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저주의 기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서 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을 맡기는 기도라는 점에서, 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다. 두 번째로, 저주의 대상은 악을 행하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저주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대적하신다는 고백을 표현하고 있다. 저주의 기도가 보여주는 세번째 원칙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강하게 저주의 기도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재앙의 날을 겪고 있는 것은 예언자 자신이지(렘 17:17), 원수가 아니다. 재앙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단지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며, 정의의 회복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이 백성의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으로 인한 분노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분노의 한 가운데에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으신 하나님, 함께 하시는데 어느 결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 놓여 있다. 예레미야와 같은 솔직하고 노골적인 질문이야말로 구약 신앙의 빛나는 장면일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백 본문들에서처럼 하나님을 향해 도전적인 질문을 하고 자신의 삶의 길을 고통스러워하는 내용들은 시편의 많은 시들에서도 볼 수 있다.
  예레미야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게로 돌아오라’이다. 예레미야의 고난이 지극하지만,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지 말고 체념하지 말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신다.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언뜻 여기서 ‘헛된 말’은 앞 절에서 예레미야가 던졌던 불평과 탄식의 말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하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와야지, 백성들에게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당부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헛된 것”을 말한다는 것은, 홀로 고립된 예레미야가 백성들의 즐거워하는 모임에 속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말,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렇게 귀한 것을 말할 때에 예레미야가 “나의 입” 즉, 여호와의 입이 될 것이라는 말씀과도 통하게 된다. 그들이 두렵다 하여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귀한 말”을 하게 될 때에, 그는 여호와의 입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죄악을 행하며 의를 버린 이들에게 임할 두렵고도 무서운 재앙, 이 백성을 향해 그 죄를 버리고 돌이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등이야말로 예레미야가 또 다시 증거해야 할 “귀한 말”일 것이다. 하나님의 입이 되어서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만을 선포하고자 할 때, 여호와께서 다시금 주시는 약속은 “놋성벽”의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예레미야를 처음 부르실 때에 주셨던 약속(렘 1:8,18-19)과도 일치한다.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하느라 온갖 고난을 겪고, 재앙덩이 취급을 받으며 홀로 고립되어 탄식하는 예레미야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말고 헛된 말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입이 되어 담대히 말씀을 선포하라고 격려하시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겪는 고난은 악인의 손에서 고통당하는 의인들의 고난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포로기와 포로 귀환 이후 경건한 이들은 예레미야의 고난에서 고난이 죄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한결 같은 신실함과 헌신의 결과임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의 고난에 가득 찬 상황을 해결해버리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재확인되지만, 이것은 고난이 없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놋성벽”은 그것을 상징한다. 예레미야의 삶에서 “고난”은 바로잡고 벗어나야 할 비정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신실한 자의 삶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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