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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개혁단상] 저울질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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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9-11-13 13:56 / 조회 2,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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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단상] 저울질하시는 하나님
윤환철 감사(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



‘이상주의’ 비틀기


“그래, 김정은이 자유주의 국가를 만든답니까?”
지난 9월 경영학과 신학 분야의 ‘석학’이라고 소개받은 미국 교수에게 받은 질문입니다. 역사상 초유의 북-미 대화, 남-북-미 대화 국면을 전제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교수뿐 아니라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이 제게 유사한 질문을 했습니다. 유사한 국면에 손○○ 장로님도 제게 “그래, 통일을 좀 간단하게 말해봐!” 하셔서 “장로님도 철학을 좀 쉽게 말해보라는 요구를 받으시지요.”라고 답했습니다. 뜻을 이해하시고는 허허 웃으셨죠. 일반인들뿐 아니라 전문 지식인들도 간단하지 않은 문제를 간단하게 말하라고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뭐, 어디는 완벽한가? 당신 몸 담은 곳은 완전하냐고?”

하루는 친한 언론인이 식사하자고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장로님은 왜 제가 싫어하는 방송사만 골라 일하세요?”라고 정중히 묻자 “뭐 어디는 완벽해? 당신이 몸 담은 곳은 완전해?”라고 답하셨습니다. 제가 다시 “주님이 저울에 달아 보라고 하시잖습니까? 세상에 완전한 곳이 어디 있습니까?” 하니까, 그분이 “그건… 그렇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속한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왜 북한에 대해서는 갑자기, 단번에 완벽해질 것을 요구할까요?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는데, 그때  “그래서 천국이 될 거야?”라고 질문을 하는 것과 같죠.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 모든 것들은 똑같다’, ‘다 그게 그거다’라는 주장은 더 나쁜 선택을 정당화할 때 동원됩니다. 저는 이게 뭘까 고민하다가, ‘절망욕구’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예컨대 북한이나 세습 교회)에 대해서 절망하고 싶은데, 이유를 댈 것이 없으면 완벽한 이상주의를 가져오죠. ‘절망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정반대로 ‘이르지 못할 이상’과 대비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이상주의’를 배격하지 않습니까? 주님 오시기 전에는 참 평안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외부 학문 세계에서 ‘이상주의’는 현실에 가깝게 진화했는데, 예컨대 ‘realistic utopia’라는 개념입니다. 최근의 정치철학이 다루는 ‘utopia’(no where)는 갈 수 없는 망상의 나라가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의 개선을 추구하는 기능(function)입니다. 아픈 사람이 낫고자 하는 것, 좋지 않은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이동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기능을 ‘realistic utopia’라고 합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죠. 교회 밖 학문은 이렇게 발전하는데, 교회는 옛 지식에 머물러 고리타분하고, 또 그걸 비틀어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감으니 한심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공평한 저울과 되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와 온전함의 양을 측정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weighed on the scales and found wanting) 함이요”(단5:27)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full measure)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15:1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weigh me in honest scales)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욥31:6)


욥은 자신이 절대 의인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과 악을 하나님께서 달아 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한국교회에서 ‘저울질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 현상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을지 모릅니다만, 분명 신실하다고 알려진 교인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절망욕구가 표출할 때 이런 사고방식이 들어오게 됩니다. 절망욕구는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번역하자면, “교단이 다 똑같지”=“방금 세습한 교단과 굳이 싸우지 않겠다”, “그놈이 그놈이야” = “애써 판단하고 투표하지 않겠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과 악을 달아 보신다고 했는데, 이거나 저거나 뭐가 다르냐, 다 똑같다는 사고방식이 악행의 모판이 된 것 같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는 절망욕구를 펼치거나 절망할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불의와 맞서 한 발자국을 밀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 아닌가, 온전한 의를 사모하는 진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73호 소식지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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