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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탄생 ⑤] 천세용의 저항적 자살과 성공회 사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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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8-01-10 14:36 / 조회 2,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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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탄생 ⑤] 천세용의 저항적 자살과 성공회 사제들


강성호


2015년에는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평신도 운동’, 2016년에는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교회 개혁 운동’이라는 주제로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한국교회 안팎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교회개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봤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인 올해에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저항하며 개혁자의 길을 걸었는지,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저항의 길을 함께 걸어 봅시다.


글 싣는 순서
1. 예수는 어떻게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는가?
2. 교회 여성, 기생 관광을 규탄하다
3. 기독 청년들의 교회 개혁 이야기
4.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 88 평화통일선언
5. 천세용의 저항적 자살과 성공회 사제들



들어가며


제가 기억하기로 2014년은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로 시작되었습니다. ‘박근혜 퇴진’과 ‘국정원 특검 실시’를 외치며 분신했던 故 이남종 씨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1월 1일에 숨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남종 추모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정의평화를위한기독인연대, 향린교회, 촛불교회 등 주로 진보적 입장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추모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이남종 추모 기도회를 보도한 <뉴스앤조이> 기사 밑에 “자살한 사람을 추모하다니,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있는가 묻고 싶다”, “영정 앞에 있는 십자가를 치우면 좋겠다. 자살한 사람에게 십자가가 웬 말인가?”라는 댓글을 봤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자살을 죄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자살한 사람들의 교회 장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접근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이럴 때는 기독교인들이 종교라는 틀에 갇혀 타자의 고통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귀중한 생명을 천시하자는 건 결코 아니지만, 모든 문제를 도그마에 갇힌 교리로 잣대를 들이미는 것에 뭔가 반박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래의 글은 역사학도로서 1991년 5월에 있었던 한 사건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쓴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기원

자살은 지배에 저항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단을 불문하고 지배 세력에 대항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든 경우를 저항적 자살이라고 합니다. 결코 일반적인 형태의 저항이라고 할 수 없죠. 최근만 해도 티베트와 인도에서는 분리 독립을 목적으로 분신자살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2009년부터 2014년 2월까지 최소 127명에 달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요는 저항의 수단으로 분신자살을 선택하는 게 아주 한국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991년 5월 3일에 일어난 한 학생의 죽음도 저항적 자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천세용. 1990년 2월 서울 동북고를 졸업한 그는 경원대에 입학하여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던 대학생이었습니다. 이날 그는 경원대 공대건물 3층 현관 난간 위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5m 아래 바닥으로 투신하였습니다. 분신자살 시도 후 천세용은 화상 전문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도대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걸까요?


사실 그해 5월은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었습니다. 박승희‧김영균‧천세용‧김기설‧윤용하‧이정순‧ 차태권‧김철수‧정상순 등 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분신자살의 방법으로 말이죠. 이때 학생운동은 노태우 정권 퇴진 투쟁을 하던 중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전경이 휘두르는 쇠 파이프에 살해되자 6월 항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격렬히 싸웠습니다. 강경대의 죽음에 분노하며 이들은 동조 자살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때 박승희와 김영균, 그리고 천세용의 분신자살은 그해 5월 분신 투쟁의 출발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연속적인 분신자살은 대중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거기다 87년 민주화로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80년대와 같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저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저항적 자살의 시초는 전태일입니다. 그의 분신은 유례가 없던 죽음으로 수용되면서 예수의 부활로도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전태일의 죽음이 지배 세력의 폭압에 맞선 극단적 자기희생을 의미했다면, 1980년대에 이르러 지배 세력의 폭압에 죽음으로 저항한 투사로 호명되었다고 합니다(임미리, 95). 이때부터 전태일을 기원으로 열사들이 투쟁의 도덕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세용에 앞서 전태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며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태웠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16시간 이상을 중노동에 시달리는, 심지어 잠이 오지 않게 하는 ‘타이밍’이라는 약을 먹도록 강제당하면서, 노동자들의 부당한 근로조건을 바꾸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녔던 스물 셋의 젊음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련의 기독 청년들에게도 의식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새문안교회의 청년들은 전태일의 분신자살에 대한 「참회와 호소의 금식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공모자 인식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즉, 한국교회도 전태일의 죽음에 공모자의 책임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전태일의 죽음이 언론이나 교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지 못하자 새문안교회의 청년들은 메마른 사회와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호소하기 위해 ‘금식 기도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분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을 외면하고, 교회여! 무엇을 하려는가. 회개하라”고 기성 교회를 향한 책망의 목소리를 외쳤습니다.


한편, 진보 기독교 진영에 속한 기독 청년들은 전태일 사건의 영향으로 노동 현장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파헤치고 어용 노조 문제의 해결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 7월에는 독재와 인간소외의 현실 속에서 청년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보았느니라”는 성서 구절(마 25:35-36)이 기독 청년을 향한 하느님의 참 요구이자 눌림에서 자유로 이끄는 산 지표의 근거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가 노동자와 눌린 자의 참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걸 역설했습니다.



거리로 나온 사제들


다시 돌아와 천세용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알고 보니 천세용은 고등학생 때 영세를 받은 성공회 신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소속 회원 100여 명은 “천세용을 살려 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을 나와 서울시청을 향해 시위를 했습니다. 이들은 서울대성당에서 ‘요한’으로 영세를 받은 천세영의 죽음을 애통해했습니다.


여기에 성공회 사제들이 가세하였습니다. 성공회 사제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현 정부가 민주화의 의지가 전혀 없으며, 민주화를 실현할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성공회 사제들은 천세용의 죽음이 현 정권의 본질적인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나아가 사제들은 젊은 학생들의 죽음이 모든 기성세대에 대하여 자성과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요즘 일어나고 있는 온갖 비리와 사회의 모순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사제단은 노태우 정권이 양심적이고 실질적인 민주화 조치를 분명히 취할 때까지 모든 신자와 청년들과 함께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천세용의 장례 일정을 놓고 성공회 측은 유가족의 위임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운동권 세력과 의견이 충돌되어 장례 일정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런저런 설전이 오가다 5월 9일에 치르기로 했습니다. 이날 오전 9시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그의 장례미사가 열렸습니다. 원래 천세용의 장례미사는 성공회의 규정에 따라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세용의 분신자살을 접한 성공회 사제들은 열띤 토론 끝에 “그의 죽음은 단순한 자결이 아니라 폭력 사태와 비민주적 상황에 의한 타살”이라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21년 전 새문안교회 청년들이 전태일의 죽음에 회개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였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교리라는 잣대를 가지고 기계적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해석이었습니다.


성공회 사제들은 자살한 자의 장례미사를 치를 수 없다는 교회법에 대해 “예식을 해석할 권한이 주교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항을 인용하여 장례미사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사제들은 윗선의 재가를 받아 천세용의 죄를 사한다는 의미로 ‘특별 관면’을 발표하였습니다. 성공회 사제들은 그의 죽음이 “귀한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세상을 밝히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특별 관면’ 조처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성공회의 시국인식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교회법 또는 관계를 뛰어넘는 획기적 조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날 장례미사에서 설교를 맡은 신부는 “비록 요한(천세용)의 분신자살은 가장 고귀하게 생명을 사용한 것이지만, 더 이상 희생이 없도록 하자. 오늘 영결 미사를 생명의 축제로 승화시키는 자리로 만들자”고 외쳤습니다. 장례미사에 참석한 한 신자는 “영세를 받은 천씨가 왜 분신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형제들을 분신으로 내몬 유일한 배후 조종자는 현 정권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성공회 사제들은 천세용의 분신이 단순히 한 개인의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았습니다. 타자의 고통,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한 오늘의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외침이지 않을까요. 강연을 나가면 종종 대안에 대해 여쭤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죠. 저는 교회에서 신본주의 vs 인본주의 구도를 강조하면서 이원론적 세계관을 형성시키는 게 불만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건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본주의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상상력과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요. 한 사람의 죽음을 너무 쉽게 대하는 교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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