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문서자료

칼럼 [남오성 칼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6-11-03 11:44 / 조회 2,468 / 댓글 0

본문

[교회개혁단상]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남오성 집행위원(주날개그늘교회 담임목사)

5년 전 남산 기슭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청어람아카데미>20119월과 10월에 걸쳐 종교개혁 앞에 선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5주 연속 강좌를 열었다. 먼저 손봉호, 이만열 교수가 한국교회가 선 자리라는 주제로 대담했고, 이어 나는 꼼수다김용민 PD<국민일보> 김지방 기자가 왜 한국교회는 정치화되는가라는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했다. 그리고 강영안 교수가 오늘날 붙잡아야 할 종교개혁의 가치’, 김회권 교수가 어떤 대안을 상상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당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이었던 나는 교회 분쟁의 원인과 현실에 대해 강의했다.

, 목사님 뭐 여쭤 볼 게 있는데요.” 강의가 끝난 뒤 누가 내게 말을 걸었다. 맨 앞자리에서 유독 열심히 듣던 남자와 그 옆에 같이 있던 여자였다. 부목사와 사모 부부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다니는 교회가 예장합동 평양노회 소속이고, 담임목사가 노회장이라고 했다.

! 평양노회! 2011년 예장합동 평양노회는 뜨거웠다. 한기총 해체 운동의 계기가 된 대표회장 부정선거 사건의 당사자 길자연 목사, 교회 헌금 100억 원을 펀드에 투자했다가 문제가 된 분당중앙교회 최종천 목사, 여러 교인을 수차례 성추행해서 모두가 분개했던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이들이 모두 평양노회 소속이었다. 평양노회는 목사들의 소문난 정치판이었고, 노회를 열었다 하면 교계 언론뿐 아니라 일반 방송과 신문까지 주목했다.

그 부목사는 교회 타락의 현장 목격자였다. 자기 교회에서 정치 목사들이 모여 나눴던 부끄러운 뒷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노회장인 담임목사의 지시에 따라 지저분한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심부름꾼이었다. 하지만 뒤치다꺼리를 할 때마다 양심에 찔렸고 그래서 갈등했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저 한 명의 부목사 나부랭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했다.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이게 목사가 할 짓인지 죄책감에 몸서리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부부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 힘들었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담임목사로 계신 교회에서 주일학교 전도사로 있으면서, 참 많이도 싸웠다. 말도 안 되는 성경 해석, 윽박지르는 설교, 독선적인 목회가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그러다 도망치듯 유학을 떠났다. 귀국해서 신학교 교수가 되기 전, 잠깐 영등포에 있는 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할 때도 갑갑하긴 마찬가지였다. 증경총회장으로 교단과 신학교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시던 보수우익 담임목사에 대해 분노하며 뒷담화만 떠들 뿐 앞에서는 끽소리도 못한 채 시간을 죽였다. 교수가 되어 아버지 교회에서 부목사를 할 때는 교회의 건강한 변화는 진작 포기한 채, 맡은 교육부 목회에만 전념했다. 교수직을 내려놓자 교회 세습 제안이 흘러나왔을 때는 갈등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당시 나는 그날 <청어람아카데미>에서 만난 부목사와 비슷한 신세였다.

그 힘든 세월이 끝난 건 교회개혁실천연대와 일산은혜교회에 와서였다. 박득훈 목사, 오세택 목사, 백종국 교수를 공동대표로 모시고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참 행복했다. 더는 갈등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악한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교회 개혁의 정신을 따르고 전파하는 새사람이 되었다. 일산은혜교회에서는 당시 성서한국 이사장이셨던 강경민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시고 <뉴스앤조이><복음과상황> 편집장을 역임한 이광하 목사와 함께 하나님 나라 신학을 실천하는 개혁적인 목회를 하면서 매우 즐거웠다. 드디어 자유와 해방이 왔다.

그럴수록 나쁜 교회를 향한 삿대질도 늘었다. 교회 비리의 주범인 포마드 머리에 막걸리 목소리를 장착한 노땅 목사들은 물론이고, 아직도 나쁜 담임목사 밑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사냥개 노릇이나 하는 젊은 부목사들을 보노라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쯧쯧쯧 혀를 차면서 한국교회의 어두운 미래를 들먹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힘들었다. 남을 정죄할수록 나의 내면은 메말라만 갔다. 비판과 비난은 처음 몇 번은 스트레스 해소에 좋지만, 지속하면 오히려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교만해진 나를 발견했다. 남을 정죄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 나는 잘났는데 너희들은 못났다고 깐죽거리고 있었다. 등에 땀이 흘렀다. 마귀가 틈탄 것이다.

그때 내게 문득 다가온 말씀이 있다. 누가복음 189-14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자세와 내용을 비교한다. 기도하는 자세를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기도하는 반면(11a),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13) 기도한다. 세리의 자세가 훨씬 겸손하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더니,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11b-12). 감사 기도를 드리는 듯하지만 결국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다. 반면 세리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자기의 연약함을 그대로 노출하는 기도를 드린다.

예수는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기도를 칭찬한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는 세상을 뒤집는 하나님 나라의 전복적 원리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주신 비유다(9). 누가 그런 자인가? 바리새인이다. 세리를 얕보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교만한 바리새인이다.

누가 바리새인인가? 내가 바리새인이었다. 교회 개혁 운동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던 내가 바리새인이었다. 나쁜 목사들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내가 얼마나 교회 개혁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지를 드러내던 내가 바로 바리새인이었다.

교회 개혁은 형식적 개혁과 내용적 개혁으로 나뉘는 것 같다. 형식적 개혁이란 제도 개혁, 구조 개혁이다. 정관을 만들고 목사 임기제와 평가제를 실시하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절차를 구성하는 것이다. 내용적 개혁이란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 공동체에 사랑의 교제가 충만하고, 사회적 약자를 섬기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식 개혁이든 내용 개혁이든, 반드시 선행 또는 동반되어야 할 더 근본적인 전제가 있다.

그것은 자기 개혁이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다. 회개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남을 낮춰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는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 자기 개혁 없이 교회 개혁 없다. 내가 바리새인이라고, 내가 개혁의 대상이라고 시인해야 한다. 교회 개혁은 내 입술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세리의 고백이 흘러나올 때 시작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글쓴이 소개: 남오성 님은 200912월부터 2012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