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개혁 설교단상] 길 가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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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6-04-25 13:23 / 조회 2,206 / 댓글 0본문
[교회개혁설교단상]
길 가시는 예수님
오세택 집행위원(두레교회 목사)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눅 7:11-17)
1. 예수님의 생애는 특기할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 그 중에 한 가지가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공생애 초기만 봐도 계속해서 옮겨 다니셨습니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는 곧 바로 갈릴리 여러 지역으로 돌아다니셨습니다(눅4:14). 그러다가 고향 나사렛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눅4:31).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을 낫게 하시자 소문이 근처 사방에 퍼졌습니다(눅4:37). 사람들이 몰려와서 떠나지 못하도록 만류했지만 주님은 다른 마을들로 가셨습니다(눅4:41).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산지에서 해변으로 밤낮으로 다니셨습니다(눅5:1-6:49). 그리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눅7:1). 그 곳에 있는 백부장의 집으로 가셨다가 잠시 후에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눅7:11).
- 이후에도 예수님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생애 마지막 골고다에서 죽으실 때까지 잠시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다니셨던지 배가 침몰할 지경인데도 모르고 주무실 정도였습니다(눅8:22-25). 이처럼 예수님은 대부분의 공생애를 길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부분의 사역 역시 길에서 벌어졌습니다.
2. 무엇이 예수님을 잠시도 머물지 않고 길 가시게 했습니까?
- 어떤 사람이 길을 간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길을 가게 하는 동력이 있습니다. 니체는 ‘인간이란 길 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아니 ‘길을 가야 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신이 죽었으니 각자가 자기의 길을 적극적으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추동은 초인 정신이며 권력에의 의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길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이 죽었으니 -절대가치와 기준이 무너졌으니- 이제 자신의 몸의 충동과 감각과 본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그런데 주님이 가신 길은 니체가 주장한 길과는 전혀 다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나인이라는 조그마한 마을로 가셨습니다(11절). 이 나인성은 가버나움에서 동남쪽 25Km 지점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성으로 갑자기 가셨습니다. 길을 떠나기 전 일행에게 가시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가신 것이 분명합니다.
- 주님은 나인성으로 가셔서 한 죽은 청년을 살려 내셨습니다(12-15절). 그 청년은 그 마을 불쌍한 과부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살려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일의 동인입니다. 주님이 나인성으로 가시고 죽은 청년을 살려 그 모친에게 돌려주신 이 일의 동인은 독자를 잃은 한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창자가 찢어질 듯한 아픔’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죽은 청년의 관을 손으로 멈춰 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은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청년을 살려서 앉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청년을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 불쌍히 여기는 마음, 슬픔과 고통에 빠진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주님으로 하여금 길 가시게 했습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온갖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게 했고 결국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로 가시게 했습니다.
- 거라사인 지역으로 가신 것, 그것도 밤중에 광풍이 휘몰아치는 갈릴리를 건너 가신 이유도 귀신 들릴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군대 귀신이 들려서 집에도 있지 못하고 옷을 벗고 무덤에서 자며 온 광야를 짐승처럼 헤매고 다니는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눅8:26-39).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신 이유도 그의 죽은 딸과 그 아비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눅8:40-56). 칠백여 년 동안이나 닫혔던 사마리아 길로 급히 가신 이유도 우물가의 한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요4:1). 도시와 마을을 다니면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이유도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마9:35-38).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이유도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마15:32).
-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자체가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동원되셨습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성취하심 자체가 하나님의 인간을 불쌍히 여김 때문입니다. 신32:36에 ‘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고 하셨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진멸하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왕하13:23). 심지어 욥의 구원도 욥의 의나 인내 때문이 아닙니다. 욥을 향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이었습니다(욥33:23-25).
3. 이처럼 불쌍히 여기심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 우리가 성도며 주의 자녀일진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품어야 한다’가 아니고 ‘품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본성이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벧후1:3,4).
-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때 구원의 역사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집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리고 이웃과 세상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때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백부장이 죽어가는 자기 종을 불쌍히 여김으로 주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 살아났습니다.(눅7:1-10) 백부장은 믿음으로 주님을 초청했고 주님도 그 믿음을 귀히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실 정도로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믿음을 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사랑하는 개혁연대 동역자 여러분!
- 세상은 우리에게 충동과 감각과 본능의 길로 가라고 합니다. 성공과 출세, 부와 권력의 길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픔과 눈물의 길, 불쌍히 여기는 길, 주님의 길로 가야 합니다.
- 지난 2년 동안 한국교회는 아픔과 눈물의 길, 주님의 길로 가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의 눈물을 닦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변부 중에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이제는 그들에게 제발 길거리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외칩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 뜸해지고 있습니다.
- 다시 돌이킵시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갑시다. 그들과 아픔을 함께합시다. 우리가 아파하는 만큼 우리도 한국교회도 자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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