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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개혁설교단상] 새싹은 기어이 돋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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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6-06-22 13:42 / 조회 2,2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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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설교단상]

새싹은 기어이 돋고야 말리라!


박득훈 공동대표(새맘교회 목사)

스가랴 6:9-15

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0.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오늘의 유다교가 여전히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로 믿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온 뒤에도 세상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에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김근수 선생은 자신의 저서 행동하는 예수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무신론, 유다교, 이웃종교와의 대화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사실 이론이 달라서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주장한 이론을 그리스도교가 실천하지 못한 역사가 그런 대화에서 가장 부끄럽게 드러난다. (461)

의미심장한 성찰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과연 일반 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들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왔다는 교회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도 믿기 어려울 겁니다. 교회가 세상 못지않게 아니 세상보다도 더 추하고 썩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사람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사람 때문에 영생을 잃는 건 어리석은 거 아니겠어요?라고 조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겠죠. 하지만 매우 구차하고 민망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5:16, 표준새번역)"

개혁피로증


이런 예수님의 당부에 순종하고자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출범한 지 어언 14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저희의 작은 몸부림을 어여삐 여겨 주셔서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갈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개혁피로증에 시달리는 순간들이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맞아, 앞선 사람들의 탄식이 맞아! 한국교회 개혁은 하나님도 감당 못하실 일이야!

아마도 스가랴 선지자가 바로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귀환했을 때, 꿈에 부풀었겠죠. 그는 바로 성전 건축에 착수했습니다. 회복의 역사가 신바람 나게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적대 세력의 강한 저항과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영적 침체에 빠져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는 스가랴에게 주신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동토를 뚫고 나오는 새싹


본문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새싹(branch)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뜻하는가 아니면 총독 스룹바벨을 뜻하는가? 아니면 둘 다를 의미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장차 올 메시아를 의미하는가? 왜 스가랴서는 이렇게 불분명한 상태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 오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런 디테일이 아니라 중심 메시지가 중요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중심 메시지는 아무리 시대가 암담해 보여도 하나님은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갈 지도자를 세우신다는 진리입니다.

새싹이라는 표현이야말로 그런 하나님의 의중을 잘 보여 줍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나무들은 모든 잎을 떨굽니다. 앙상한 가지만 덩그러니 남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통과하면서 땅은 꽁꽁 얼어붙습니다. 도저히 생명이 움틀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봄이 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동토에 숨겨 있던 새싹이 돋기 시작합니다. 연푸른 새싹은 너무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기운은 온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잘 알려진 하워드 진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내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절망한다는 건, 어두운 시대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그의 깊은 인간애가 읽혀집니다. 그는 교수로서 흑인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1963년 당시 보수적인 색채의 흑인대학교였던 스펠만 대학교에서 해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2005년 바로 그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졸업식 연설을 합니다. 제목은 절망에 대항하여입니다. 결론에서 미국의 위대한 흑인소설가 조라 닐 허스턴을 언급하면서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해 주던 말을 인용합니다. 태양을 향해 뛰어오르려무나! - 태양에 이르진 못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땅에서 발을 뗄 순 있지 않겠니?

전 그분이 그리스도인인지 잘 모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어찌 끊임없이 밀려오는 절망에 맞서 희망을 그렇게 고집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더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새싹에 대한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어떻게 희망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이젠 글렀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공감은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절망의 언덕을 넘어가야만 합니다. 사실 역사를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가 희망의 끈을 꽉 붙들 수 있는 근거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칠흑같이 어두운 역사의 동토에서 새싹처럼 솟아났습니다. 그를 통해 출애굽 해방의 역사가 성취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새싹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참 새싹,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통해 공의와 정의를 실현할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를 새싹이라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11:1; 33:15).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정확히 새싹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거기엔 참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세상을 건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주로 강력한 군사력과 풍성한 경제력에 의존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참담했습니다. 잠시 정의를 세우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결국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참된 메시아는 새싹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새싹은 연하디 연합니다. 살짝만 밟아도 망가지고 죽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거기에 놀라운 생명력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새싹으로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교묘히 유혹했습니다. 놀라운 경제력, 신비주의적 카리스마 그리고 막강한 세속권력을 발휘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온 세상의 메시아임을 멋지게 증명해 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의 힘만 의존합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메시아의 길을 가십니다. 그 결국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깊은 실의와 좌절에 빠졌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엄청난 고통을 겪으시며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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