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병성 칼럼] 연봉 4억 2천만 원짜리 목사가 살아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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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5-08-19 16:37 / 조회 1,686 / 댓글0본문
연봉 4억 2천만 원짜리 목사가 살아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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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성 전문위원(환경운동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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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연봉은 4억 2천만 원입니다. 좀 많다 생각하시나요? 그런데 4억 2천만 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난 8개월간 열심히 수고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며 조만간 추가로 더 챙겨 주겠다고 합니다. 과연 얼마가 될지 기대가 큽니다.
시작부터 제가 농담이 좀 과했죠? ‘422,711,142원’ 며칠 전 제게 날아 온 손해배상 청구 소송 금액입니다. 요즘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의 학교 숲을 지키는 일을 하다 보니 공사업체가 저 때문에 공사를 하지 못해 피해를 입었다며 제게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제가 받은 선물은 4억 2천만 원짜리 손해배상청구만이 아닙니다.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라는 이름으로 고소되어 요즘 열심히 경찰서에 출근도 하는 중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싸움이 벌써 8개월이 되었습니다. 작은 숲 하나 지키는 일이 제 일상이 되었는데, 사건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조용히 살고자 숲으로 둘러싸인 경기도 용인시의 작은 마을로 지난해 봄에 이사 왔습니다. 그러나 고르고 골라 이사 온 이곳이 전쟁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지요.
이사 온지 6개월이 흐른 지난 겨울의 어느 날, 마을 바로 곁 산을 허물고 콘크리트혼화제 연구소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이사 오기 전에 이미 사업 인허가가 다 난 상태였고, 조만간 공사가 착공된다는 긴박한 상황이 되어서야 마을 주민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바로 보이는 학교 앞산이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건물 길이가 60m, 운동장 폭이 50m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앞산을 깎아내고 들어서는 건물은 길이가 80m*50m로 초등학교 보다 더 큰 대형공사입니다.
초등학교 앞산을 허물고 화학물질을 다루는 시설이 들어온다니? 어떻게 이런 몰상식적인 일이 가능했을까요? 환경영향평가서를 꼼꼼히 살펴보니 식생조사와 사용하는 화학물질량과 폐수 발생량과 소음 예측 등 모든 것이 허위였습니다. 식생조사의 허위를 증명하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숲에 있는 나무 하나 하나 지름을 측정하고, 위치를 기록하며 환경영향평가서가 왜 허위인지 증명해냈습니다. 이젠 숲에 있는 풀과 나무들이 제 눈에 훤합니다. 길을 오가며 만나는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을 우리 마을에 보내주셨어요.”
환경영향평가서 담당 부서인 환경부에 엉터리로 가득한 증거를 내밀었지만, 조사자가 현장에 나가기만 했다면 법적으로 거짓과 부실로 처벌할 근거가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환경을 파괴하도록 면죄부 주는 대한민국 환경부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놀라운 선물을 안겨 주셨습니다. 며칠 전 비가 그친 뒤 산에 오르니 맹꽁이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맹꽁이는 멸종위기 2급인 법적보호종입니다. 멸종위기종을 누락하면 환경영향평가서 거짓과 부실 판단 기준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환경부가 뭐라고 말을 바꿀지 기대가 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인가? 성공을 보장하는 탐욕의 신인가?
초등학교 앞 작은 산봉우리 하나 지키는 일을 시작한지 8개월이 되었습니다. 몸무게가 7kg이나 빠질 만큼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했던 4대강사업이나 쓰레기시멘트처럼 이 일을 한다고 제가 유명해지거나 무언가 덕을 보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을 지키는 일에 크고 작은 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풀 잎사귀 하나 만들어낼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타당성도 없는 사업을 위해 수천그루의 나무가 살아가는 숲을 밀어낸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학교 앞 숲을 파괴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사업주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저를 더 슬프게 합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매일 창조를 마칠 때마다 그것을 보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성공을 보장하는 탐욕의 신을 믿을 뿐입니다. 만약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신음하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인간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지만, 인간 삶의 환경에 대해선 전혀 관여하지 않는 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떠한 하나님인가? 성경의 첫 쪽이 하늘, 땅, 태양, 달, 별, 풀, 나무, 새, 물고기와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만이 아니라 온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심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이다. 단지 사람의 하나님으로만 이해되는 하나님은 더 이상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창조세계에 관심을 가져야함을 역설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드는 방법을 일러주시며 창세기 6장 19-20절과 7장 3절에 공중의 새와 들짐승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유전케 하라고 3번이나 언급하셨습니다. 또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창9:9-10)고 홍수가 끝난 후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향한 언약이라고 강조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참된 ‘정복’과 ‘다스림’이란 ‘보호’와 ‘책임’을 수반하는 것임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다스림이란 ‘사랑’과 ‘섬김’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이란, 그저 인간의 이익을 위한 이용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돌봄과 섬김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이 잘 보존되도록 청지기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기 원한다면
이스라엘의 들과 광야를 거니시던 예수님은 자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연과 친숙했기 때문에 들의 백합화, 참새 한 마리, 겨자씨 한 알 등 예수님의 삶 속에 배어든 친숙한 자연의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에게 하늘나라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몰트만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 안에 임재 해 있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며, 그의 영원한 빛을 반사한다. 모든 창조를 창조자 앞에서 경외하기 위해서 우리는 창조자가 그의 창조 안에 거하신다는 ‘창조자의 내재성’을 재발견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자연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은 하나님의 숨결이 숨어 있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우리가 조용히 바라보며 귀 기울이면 그것을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