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황병구 칼럼] 두려움과 염려의 다른 얼굴, 혐오와 경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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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5-08-19 16:38 / 조회 1,965 / 댓글 0본문
[이슈꼬집기]
두려움과 염려의 다른 얼굴, 혐오와 경멸
황병구 집행위원(한빛누리재단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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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꾸준히 권면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 구약적 표현으로는 “두려워하지 말라”이며 신약적 표현으로는 “염려하지 말라”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의 군사력이나 악인들의 협박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오직 두려워할 대상은 하나님임을 늘 되새기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또한 신약의 염려의 기저에는 물신 즉 맘몬이 주는 안정감을 누리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겠다. 오죽하면 심지어 원색적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계실까? 조금 더 살펴보면 이러한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구하는 많은 기도들을 불신과 중언부언으로 평가하시면서, 이는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쓸 것을 이미 아신다고도 하신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물으시면서 말이다.
내가 이용하는 SNS 상에는 여러 단톡방(단체대화방)들이 존재하고, 종종 기도제목으로 전달되는 기막힌 사연들이 있다. 여기서 기막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수준이 지나치다는 표현이다. 오해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수준인 것들도 많다. 가장 최근의 예는 한국에 메르스가 유행한 것은 동성애축제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자 경고이니 이를 감사하며 대적기도로 추한 세력들을 몰아내자라는 취지의 기도제목이었다. 이런 기막힌 기도제목에 대해 가장 적절한 호소를 발견하여 주변에 알린 적이 있었는데, 그 주된 내용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제발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모독을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메르스 사태와 퀴어 축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제가 믿는 하나님은 무고한 생명을 담보삼아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퀴어 축제를 (그것이 선하지 않다 해도) 취소시키기 위해 메르스 위험국가가 되게 하실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약하고 악한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기 위해 바로 당신의 몸을 찢으신 분입니다.
늘 하던 대로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가, 입원하신 부모님 간호를 하던 아들과 며느리가, 심지어 친구 부모님 병문안을 갔던 사람들이 졸지에 메르스에 걸려 이름도 잃어버린 채 전염자 14번, 26번이 되어있습니다. 가장이고 아이의 엄마일 것입니다. 격리된 병실에서 살아나갈 수는 있을까? 갑작스레 엄마와 떨어진 아이들이 제대로 밥이나 먹고 있을까? 얼마나 두려울까요? 그러다 돌아가신 분이 이미 다섯 분입니다. 퀴어 축제를 막자고 어제 바로 나처럼 살던 이웃들이 이렇게 되었다고요?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단순하게 연관 짓는 것이 저는 메르스보다 더 두렵습니다. 무엇보다 나의 하나님께서 저를 이런 방식으로 대하질 않으셨습니다. 바로 제 삶이기에 말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하나님보다 나, 나의 아이들을 숭배하며 매일 불신의 늪을 헤매는, 누구보다 악한 저를 인내하시고 기다려주셨다는 것을요.
SNS에서 본 어느 분의 하신 말씀인데 오늘 가슴이 아프도록 동의합니다. ‘이 세상에 타인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죽음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예수의 생명이다’ 메르스로 인해서 격리 조치된 무고한 60여 명의 사람들, 그들의 가족, 불안과 공포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포비아(혐오)현상은 비단 동성애뿐 아니라 프리메이슨, 종북, 이슬람 등등 기독교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꺼리가 있는 세력(?)들은 모두 그 대상이 되어왔다. 그 대상들을 사단이자 적그리스도로 표현하면서 이들을 대적하는 것이 무슨 기독교신앙의 정수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가 대부분이다. 그런 혐오발언과 행동 중에 모종의 손해나 비난을 경험한다면 바로 순교자 코스프레로 바뀌어서 더욱 그 취지를 강조하는 현상도 자주 보아왔다.
그러나 나는 종종 이런 포비아 현상의 바닥에 복합적인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안정된 교세와 기득권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염려를 읽게 된다. 마치 응답하지 않는 무능한 신에게 응답을 구하는 자해공갈형 제사를 드리는 이교도 사제의 심리를 보게 된다. 단언컨대 우리가 창조주로 믿고 아버지로 고백하는 하나님은 그렇게 작은 분도 아니고 약한 분도 아니다. 그분을 우리가 조른다고 못 이겨서 당신의 원칙을 굽히시는 분도 아니다. 피조세계의 그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는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며, 혐오의 정서와 동전의 앞뒷면인 조롱과 경멸 역시 하나님의 성품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성경은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건 앞에서도 그 악인의 멸망을 조롱한 이들마저 심판의 대상이라는 주제의 말씀들이 즐비한 책이다. 혐오와 경멸을 행하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덕성은 심판의 대상으로서 자기주제파악이다.
우리에게 상종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 누군가와 말을 섞고 동일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나를 신앙에서 멀어지게 할 것 같은 부담이 생긴다면, 이는 정의감이 아니고 두려움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평화의 사신으로 부르시고 보내시기를 원하시지, 심판의 연장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감히 이런 기준으로 평한다면 혐오와 조롱의 기도제목을 처음 생성한 이들도, 이를 보고 놀란 가슴으로 주변에 전하는 이들도 이런 두려움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한 가지 돌아볼 지점이 있다면, 이런 기막힌 센세이셔널리즘적 기도제목들이 유통되는 빈도와 양에 비해,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며 진정 평화를 바라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제목들은 그 빈도와 양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헌신적으로 기도훈련을 받고 기도사역에 헌신한 많은 기도의 용사들이 있건만, 이러한 순수한 분들에게 이런저런 채널로 배달되는 제목들은 두려움과 염려, 혐오와 경멸의 사건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끊이지 않는 전쟁과 테러, 질병과 기근, 패륜과 부정이 판치는 뉴스 속에서도 이를 두려움이 지배하는 혐오 프레임이 아닌 평강이 지배하는 화해 프레임으로 소화하는 진정한 기도제목들이 필요하다. 그분의 성품과 존재를 향한 올바른 고백이 필요하다.
“들어주소서, 우리 기도를. 평화의 주님, 선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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