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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평신도운동 2화] 백정 박성춘, 인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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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5-08-19 16:39 / 조회 1,9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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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평신도운동 2]

백정 박성춘, 인간이 되다

김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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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봉출이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 말은 박성춘(朴成春, 1862-1922)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제중원 원장 에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에게 맡기면서 부탁한 말입니다. 그냥 들으면 행실이 엉망인 자기 아들을 선교사가 잘 지도해주기를 부탁하는 말처럼 여겨지지만, 박성춘이 백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말 속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백정은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는 천민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양반, 중인, 상민(양인), 천민으로 나뉘어졌는데, 대표적인 천민은 노비였고, 백정, 기생, 광대, 무당, 상여꾼, 묘지기, 공장(工匠) 등도 천민으로 분류되어 차별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사람이되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는, 그야말로 천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신분질서에 의한 차별은 1894년 갑오개혁을 하면서 제도적으로 폐지되기 시작했는데, 양반과 중인, 상민을 가리지 않고 실력 있는 인재를 관리로 등용하고 노비제를 폐지하며 아울러 천민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개혁이 1896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이런 개혁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때까지 천민들을 사람대접하지 않던 양반이나 상민들이 하루아침에 그들을 순순히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겨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천민들이 사람대접 받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고 천민들 스스로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통해서 얻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정인 박성춘은 사람이 되는 길, 즉 사람대접 받는 길을 기독교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관자골(지금의 관철동 부근) 백정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18939월에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그 때 한국에 갓 도착한 의사 에비슨이 무어(Samuel F. Mooer)선교사의 요청으로 그와 함께 관자골 백정마을을 여러 번 방문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던 박성춘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박성춘은 천민인 자신을 정성껏 치료해 준 에비슨과 무어에게 감동하여 무어가 사역하고 있던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1895420일에 세례를 받으면서 새봄을 맞아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성춘(成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양반들이 많이 살던 곤당골(지금의 롯데호텔 부근)에 있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양반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천민인 박성춘이 자신들과 같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박성춘이 동료 백정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자 양반교인들은 결국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교회 출석을 거부하거나 교회당 안에 좌석을 분리해서 양반들은 앞쪽에 앉고 백정들은 뒤쪽에 앉게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교회당 안에 신분에 따라 귀함과 천함을 구분하는 귀천(貴賤)좌석을 만들자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양반교인들의 요구에 대해서 무어선교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신분계층의 귀천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은 복음에 위배됩니다.”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결국 양반교인들은 1895년 여름에 곤당골교회를 떠나서 홍문수골(지금의 광교 교차로 부근)에 따로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박성춘은 기독교야말로 천민인 자신을 사람대접 해주는 종교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마치 물건처럼 천한 것들로 취급받던 자신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피조물로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복음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 속에서 신부적(神賦的) 인권사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성춘이 아들 봉출이를 에비슨에게 맡기면서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말 속에는 신부적 인권사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즉 복음의 정신을 깊이 간직한 의사가 되도록 해달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에 복음이 전해질 때 복음 속에 담겨 있는 신부적 인권사상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실천한 사람들은 전통사회의 신분질서 속에서 차별 받던 하층민과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통하여 사람이 된 박성춘은 본격적으로 두 가지 일에 주력하면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그 첫 번째 일은 백정해방운동이었습니다. 박성춘은 189556일 곤당골교회 예수교학당 교사 채 씨와 함께 내부협판(內部協辦) 유길준에게 갑오개혁으로 시작된 신분차별에 대한 철폐를 백정에게까지 확대해 달라는 탄원서를 보냅니다. 또한 무어와 에비슨도 동일한 내용의 탄원서를 보내게 됩니다. 마침내 그해 66일에 서울에 살고 있는 백정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포고문이 발표됩니다. 그리고 18962월에는 상민 이상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었던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일이 백정에게도 가능해졌습니다. 이때는 이미 단발령이 시행되고 있던 때였지만 백정들 중에는 갓을 쓰게 된 것이 너무 꿈같은 일이라서 잠을 잘 때도 갓을 쓴 채로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박성춘은 계속해서 선교사들과 함께 백정해방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일과 백정이 상민과 같이 호적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는 건의를 하게 되고 18969월에는 백정들도 호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백정해방운동의 중요한 인물이 된 박성춘은 독립협회에도 참여해서 66명의 총대위원 중 한명이 되었고, 18981029일에 열린 관민합동 만민공동회에서는 관()과 민()이 합심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자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성춘이 주력한 또 다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람이 되게 해주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해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박성춘에게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동료 백정들을 곤당골교회로 인도했으며, 자신의 집에서 매일 20여명의 동료들이 모여서 무어의 지도로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18956월부터 두 달 동안 백정해방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지방순회를 떠났는데, 그 때에도 성경 1,500권을 가지고 가서 판매하면서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189510월부터는 수원, 부평, 안산, 영종도 등 경기도 지역을 다니면서 백정들을 대상으로 전도 집회를 하고 성경을 판매했습니다. 박성춘이 전하는 복음은 차별의 한()을 안고 살아가던 백정들에게 큰 호소력이 있어서 그가 전도하는 곳곳에서 백정들이 기독교인 되었고 곤당골교회 또한 백정들과 다른 천민들이 많이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첩장교회(첩과 백장(백정)이 모이는 교회)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당골교회는 1898년 홍문수골교회와 다시 합치게 되었고 그 후 1905년에는 탑골에 새 교회당을 마련하여 중앙교회라고 이름을 바꿨는데, 이 교회가 현재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입니다. 그 후 박성춘은 1911년에 승동교회의 제2대 장로로 선출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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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에비슨에게 맡겼던 아들 봉출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박서양(朴瑞陽, 1885-1940)이라고 이름을 바꾼 봉출이는 에비슨으로부터 1년 넘게 개인적으로 훈련을 받은 후 1900년에 정식으로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해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08년 동료 6명과 함께 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의술개업인허장을 받고 의사가 됩니다. 특이한 것은 교장인 에비슨이 박서양을 포함한 7명의 졸업생을 의료선교사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에비슨이 볼 때 7명의 졸업생들은 의사이자, 선교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박서양은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와 모교인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17년 북간도로 가서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워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또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봉오동전투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박서양은 아버지 박성춘의 소망대로 복음을 가슴에 품고 의사로, 교사로, 선교사로, 독립운동가로 살아갑니다.

결국 박성춘과 박서양은 복음을 통하여 백정도, 백정의 아들도 하나님이 부여한 권리를 가진 고귀한 인간임을 알게 되었고 그 감격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면서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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