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평신도운동 3화] 의주상인들, 한국기독교의 요람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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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5-10-19 14:44 / 조회 1,946 / 댓글 0본문
[한국교회사를 통해 본 평신도운동 3화]
의주상인들, 한국기독교의 요람을 만들다
김일환 목사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시작을 말할 때면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해집니다. 프로이센 지방 출신의 귀츨라프 목사가 로드 암허스트호를 타고 1832년 7월에 서해안 고대도를 방문한 사건을 한국 기독교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고, 1866년 9월에 영국 웨일즈 출신의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왔다가 순교한 사건을 한국기독교의 시작으로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회적인 만남을 넘어 한국인들이 실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신앙을 다른 한국인들에게도 전파하는 일이 지속되어서 국내에 신앙공동체가 생겨난 시점을 한국 기독교의 시작으로 본다면 의주상인들이 만주 고려문(高麗門)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들을 만난 사건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187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주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가 한국인들에게 선교할 결심을 하고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관문인 고려문을 방문한 시기가 1874년 10월이었습니다. 이 고려문에서 만상(灣商)이라고 부르는 의주상인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들은 상인들답게 영국산 양모에만 관심을 가져서 로스를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876년부터 이응찬, 서상륜, 이성하, 김진기, 김청송 등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과 선교사들이 함께 성경번역작업을 해서『예수셩교젼셔』라고 부르는 최초의 한글성경이 1882년부터 단권형태로 출판되다가 1887년에는 신약성경 전권이 출판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인 의주상인들이 만주와 국내로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서 곳곳마다 한국인 신앙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의주상인들이야말로 한국인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신앙공동체가 만주 집안현(輯安縣)교회, 의주교회, 소래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들은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에 정식으로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 전도자와 교인들이 자립적으로 설립한 자생교회로 한국 기독교의 요람일 뿐만 아니라 장차 한국 기독교가 가지게 되는 자립적인 신앙과 활동이라는 특성을 이미 품고 있던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집안현교회는 식자공으로 일하고 있던 김청송이 한글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 수천 권과 전도책자를 가지고 고향인 집안현 한인촌으로 돌아와 배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청송의 노력은 6개월도 되지 않아서 열매를 맺기 시작해서 그에게 성경과 전도책자를 받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선교의 결실이 나타나자 김청송은 로스에게 이런 상황을 알리고 로스가 직접 집안현으로 와서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번역과 출판 때문에 로스의 방문이 6개월 정도 지연되던 중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고, 1884년 가을에는 몇 명의 집안현 사람들이 로스를 직접 찾아가는 일까지 일어나자 결국 그해 11월에 선교사 웹스터(J. Webster)와 함께 집안현을 방문하여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이 집안현 4개 마을에서 모두 75명이나 되었습니다. 로스는 이때의 감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2년 전에 그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킨 일이 일어났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골짜기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구원의 길을 찾아 날마다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외국)선교사도 찾아간 일이 없는 곳에 한글성경과 전도문서가 전해지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2년 전까지 이교의 암흑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기쁨에 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존 로스가 The Foreign Missionary 1886년 9월호에 쓴 글)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김청송이라는 한 평신도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록 국내는 아니지만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현에 최초의 한국인 중심의 개신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집안현교회는 1년 후에 25명이 더 세례를 받아서 세례교인만 100명이 넘었고 세례지원자가 600명에 이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집안현교회는 중국인들로부터 감시와 방해를 받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인들 입장에서 급성장하는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인들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서 이런 방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중국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집안현교회는 계속 발전하여 1898년에는 이성삼, 임득현을 집사로 임직했으며 압록강 주변 지역의 모 교회이자 선교기지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김청송에 의해서 집안현 선교가 시작될 때 의주 지역의 선교는 백홍준과 이성하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들의 선교에 의해서 의주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1883년 이성하는 권서로 의주에 들어와서 말로 복음을 전하다가 성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만주로 건너가 한글성경을 가지고 의주 연안에 있는 구련성(九連城) 만주인 여관에 투숙했지만 워낙 국경의 경계가 삼엄하여 월경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가지고 온 성경을 소각하거나 압록강에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이성하는 다시 여러 차례 국내로 몰래 들어와서 성경을 반포하며 선교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권서직을 사퇴하고 1884년 가을부터는 백홍준이 그 일을 대신 맡게 되었습니다.
백홍준은 성경을 한 장씩 뜯어서 말아 새끼를 만든 후에 그것으로 다른 여러 권의 책을 묶어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국경을 통과하는 방법으로 한글성경을 반입해서 배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고향인 의주와 강계, 부성, 삭주 등 평안북도지역을 다니면서 선교를 한 결과 1885년에는 약 18명의 교인들이 그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889년에는 김이련을 포함한 33명이 의주를 방문한 언더우드에게 압록강에서 세례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홍준은 1892년 로스를 비롯한 외국인과 불법으로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봉천 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하던 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백홍준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선교사역은 계속 열매를 맺어 1897년경 의주지역에는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600명 이상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한국개신교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소래교회는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의 선교에 의해서 형성된 교회입니다. 1882년 10월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인 권서로 임명된 서상륜은 한글성경과 전도책자를 가지고 봉천을 출발했지만 고려문에서 발각되어 별정소에 구금되었습니다. 다행히 별정소의 관리로 있던 친척 김효순과 김천련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탈출하여 의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을 느낀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소래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선교활동을 하여 18명이 개종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1883년 5월 16일부터 주일마다 은밀하게 집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소래교회의 시작입니다. 물론 이 때에는 서상륜이 중심이 되어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였고, 집회도 개인의 집을 돌아가면서 모였습니다. 그러다 1886년경에는 교인들이 스스로 독자적인 예배장소를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1886년 말에 서상륜은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언더우드에게 소래의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의 지방여행이 아직 어려운 상황이어서 소래의 교인들은 1887년 1월 23일 서울까지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 3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받은 소래교회 교인들은 1887년 9월 초까지 11명이나 되었습니다. 소래교회 교인들은 1887년 9월 27일 서울 정동의 언더우드 자택에서 정동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가 설립될 때에도 함께 하였습니다. 정동교회의 처음 설립교인 14명 중 13명이 서상륜과 서경조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소래교회 사람들이었으니 만주에서 의주상인들이 로스를 만남으로 시작된 한국기독교의 도도한 흐름이 이렇게 서울의 정동교회까지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가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여겨지고 성경이 금서(禁書)였던 시기에 의주상인들이 평신도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한 결과 한국기독교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들이 형성되고,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국내에 단권형태의 한글성경이 만권 가까이 배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정신을 잘 보여 줍니다. 더구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계절인 10월에 복음으로 한국을 새롭게 하고자 했던 의주상인들과 같은 선구자들을 기억하는 일은 매우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57호 소식지 공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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