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종운 칼럼] 세월호 참사와 고통·고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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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4-12-26 11:54 / 조회 1,587 / 댓글0본문
세월호 참사와 고통·고난 신앙
- 욥기서 묵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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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운(공동대표, 변호사)
안녕하세요? 회원 여러분, 공동대표 박종운 변호사입니다.
저는 지난 4월 CLF(기독법률가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대한변협 세월호 특위에 참여하여, 대변인, 현장대응지원단장, 총괄지원팀원, 특별법제정팀장/원 등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7일에는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세월호 참사 발생 205일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지금은 피해자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는데 조력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 많은 학부모들은 내 자녀도 언제든지 이러한 참사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함께 “왜 이런 참사가 벌어지는가?” 의구심에 젖어들고,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발생하는가? 왜 우리 자녀들이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가?”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하고, 각종 매체의 영상을 통해 세월호가 침몰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배 안에 남아 있던 3백여 생명이 죽어간 것을 알게 된 국민들도 한동안 헤어나기 어려운 고통에 빠져들었으며, 그로 인해 국내 소비경제가 불황에 빠져들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때, 대형 참사로 인한 고난/고통에 대해 각 종교들도 다양한 태도와 행동을 보였습니다. 참사가 발생하자 개신교 교회들은 서둘러 헌금을 모으고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가 음식물을 내 놓으며 봉사활동을 펼쳤지만, 막상 유가족들은 자녀를 잃은 애끓는 마음에 음식물을 삼키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정성을 다해 시신을 염하는 모습을 통해, 원불교에서는 말소리 내는 것마저 저어하며 푯말을 들고 빨래감을 모아 빨래를 해 드리는 등 여러 봉사활동을 통해 고난/고통 중에 있는 분들과 공감을 나누었습니다.
불교 특히 조계종 계열의 정토회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고 큰 성과를 거두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가톨릭은 방한 기간에 교황이 우리나라 대통령보다 더 많은 횟수와 시간을 들여 세월호 유가족들과 만나서 위로하며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전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교황이 사고/고난/고통의 원인을 밝혀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아니고 단지 고통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인데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많은 분들이 성당을 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신교는 각 교단별 예배 및 지원활동을 통해, 성서한국운동 진영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기독인모임’ 등을 통해 많은 좋은 일을 했지만, 일부 대형교회 목사, 교단 명망가들의 실언 혹은 왜곡된 발언으로 인해 큰 실망을 안겨주고 비판/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세월호 사건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고난/고통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 특히 우리 개신교가 고난/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고통/고난을 당하기보다는 너무 쉽게 지나치게 빨리 정죄하는 경향이 강하고, 그분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 지난 7월 26일 예장 통합측 총회장 등 임원진과의 <세월호 참사 100일 특별좌담회> 때에는 <한국교회에 드리는 부탁 말씀>으로 ① 재난/재해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신앙적 관점/입장을 정립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나아가, 재난/재해 당한 사람들 즉 고난/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 달라, ② 한국교회 또한 국가적 사회적 재난/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백서, 매뉴얼을 만들어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③ 한국교회 또한 특히 미자립교회, 가난한 교회, 구제/봉사 사역 등과 관련하여 안전에 대한 체크/보강 작업을 해 달라고 요청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고난/고통당한 분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을까요? 욥기서 말씀을 보면서 욥과 세 친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욥기서 전체를 통해 저자는 욥이 자신의 죄나 잘못으로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고 실제로 욥은 오히려 그의 온전한 신앙으로 인해 고통/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는 고통받는 욥을 보면서 인과응보론에 빠진 나머지 욥이 뭔가 잘못을 한 것이 있으니까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며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의 고난/고통은 죄로 인한 것 단 한가지 밖에 없다고 맹신한 나머지, 고난/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 중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꿰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바람에 나중에 하나님은 세 친구를 크게 책망하시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고통/고난의 원인은 최소한 3가지 이상으로 보입니다.
① 죄로 인한 고통/고난 즉, 죄의 대가로 인한 고통/고난입니다. ‘죄’란 SIN 즉, 하나님이 아닌 내가 주인/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므로, 그로 인한 대가로 치르게 되는 고난/고통입니다. 여기에는 ‘나의 죄로 인한 고통’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죄로 인한 고통’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후자는 공동체 전체 혹은 구성원 중 일부의 죄로 인한 고통/고난입니다. 다윗시대 다윗의 범죄로 인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유기체적인 공동체의 특성상, 공동체 일부의 죄는 공동체 전체의 고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② 믿음/의로 인한 고난/고통 즉,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오히려 당하지 않아도 될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나 혹은 공동체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이것은 시험(test), 연단, 훈련으로서의 고통입니다.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공동체를 성숙케 하시려고 훈련하기 위해 주시는 고난/고통입니다. 꼭 시험을 봐야만 실력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 및 준비과정을 통하여 보다 분명하게 실력을 쌓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③ 애매한 고통/고난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不可知論적인 고통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잘 알지는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고난/고통의 원인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왜 이러한 고난/고통이 나 혹은 우리에게 닥쳐 온 것인지, 그 원인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고, 그 원인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죄로 인한 고난/고통은 자복하고 회개한 후 그에 상응하는 대가(처벌 등)를 치른 후 자숙의 기간을 통해 돌이킴, 치유, 회복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고통은 인내하고 견디면서 자신을 더욱 연단하여 성숙, 성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애매한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이러하니, 우리는 고난/고통 받은 이들을 함부로 예단하며 정죄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왜 고난/고통 받는 이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질까요? 가부장제 시대의 잘못된 아버지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께 투영한 결과는 아닌지, 고난/고통 받는 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을 돕는다는 미명 아래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은 아닌지, 고민이 깊어갑니다. 아무래도 어머니 하나님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욥에 대해서도 그러하듯이, 고통/고난 속에서 울부짖는 신음, 한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