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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개혁 설교단상]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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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5-06-30 10:04 / 조회 2,105 /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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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 설교단상]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세택 집행위원(두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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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46-52)

1.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은 제자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를 묻으시고 다음으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로부터 주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뒤로부터 주님은 여러 가지 사역을 감추시고 오직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합니다(9:30-32).

그 가르침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8:31, 9:31, 10:33,34). 이 십자가와 부활은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라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짊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이어집니다. 이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의 본체는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함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존재를 소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눈을 뽑고 손발을 자르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지가 하루 이틀이 안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10:13). 이를 보신 주님께서 분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10:14-15).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accept, receive>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만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받아드리지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와중에 한 부자 청년이 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이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면서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10:17-21). 그러자 부자 청년이 슬픈<우울> 기색을 띠고 근심<분노>하여 돌아갔습니다. 이는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10:22).

이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10:23-25). 그랬더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며 서로 말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10:26)

주님이 세 번째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난 직후의 일입니다(10:32-34). 열 두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10:35-41). 세베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청탁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 청탁의 내용은 이제 영광을 받게 되면 우리를 주님의 좌우편에 앉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10:42-45).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시면서 여리고에 도착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여리고까지 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하신 말씀들입니다.

2.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 사람들과 너희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 이전과 이후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주장하고 십자가를 벗어 다른 사람에게 지우지만 너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2)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원하지만 너희는 낮은 자리에 서라 3) 세상 사람들은 섬김을 받기를 원하지만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 4) 세상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지만 너희는 타자중심적이 되라 5) 세상 사람들은 소자의 존재를 무시하지만 너희는 소자의 존재를 하나님처럼 중시하라 6) 세상 사람들은 빼앗지만 너희는 나눠주라 7) 세상 사람들은 쌓지만 너희는 흩어라 8) 세상 사람들은 고지를 지향하지만 너희는 저지를 지향하라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어떤 마음이 듭니까? ‘이게 진리구나!’ ‘최고다란 감탄이 나옵니까? 어느 분이 젊었을 때 성리학의 학습법인 거경궁리(居敬窮理)’를 깨닫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그런 경탄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윤리나 도덕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입니다. 윤리나 도덕적 결단으로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원래 우리는 본성적으로 높은 자리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려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런 삶을 요구하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과 생명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심각해집니다.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가치를 보지 못하고 부담을 느낀다면 이는 정상이 아닙니다. 심각한 장애를 가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눈을 가졌다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쪽이,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의미와 가치를 볼 수 없다면 자신이 심각한 장애를 가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바디매오처럼 해야 합니다.

3. 바디매오는 자신의 시각적 장애를 안타까워하면서 예수님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이 들으시고 불러오라고 하시고 네가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실 때까지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우리도 외쳐야 합니다. 주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외치고 또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님이 개입하도록 하는 유일한 일입니다. 주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자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따를 때까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방해할 수 있습니다. ‘뭘 그런 것까지 구하냐?’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에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소리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자를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부르짖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혈루증 여인도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찾아 높이셨습니다. 야이로의 딸도 사람들이 더 이상 주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눈을 밝히시면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삶의 가치를 보게 됩니다.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므로 하늘로부터 보화를 받는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높은 자리, 좌우편에 앉고자 하는 삶은 타자를 경쟁자로 몰 수 밖에 없습니다. 끝없는 투쟁과 배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은 타자와 연대를 이루게 됩니다. 높은 자리를 지향하는 삶은 죽음을 부르지만 낮은 자리를 지향하는 삶은 생명을 이룹니다. 부를 지향하는 사회는 경제적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는 사회적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가족, 마을, 시민사회를 거치는 점진적 사회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사회가 약화, 분산, 해체되면서 개인과 사회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와 연결고리가 끊어진 자들을 사회학자들은 고독한 군중’(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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