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교회사를 통해본 평신도운동] 전도부인, 기독교여성운동의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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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5-06-30 10:05 / 조회 1,808 / 댓글0본문
[한국교회사를 통해본 평신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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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부인, 기독교여성운동의 문을 열다
김일환 목사
1897년 12월 31일, 정동감리교회 신축 예배당 봉헌을 기념하는 행사로 같은 해 5월 5일에 조직된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엡윗청년회의 남성지회인 워른회(Warren chapter)와 여성지회인 조이스회(Joyce chapter)가 합동으로 개최한 것이었는데, 토론의 주제는 “여성을 교육하고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옳으냐?” 였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을 비롯하여 많은 청년들이 참석한 가운데 양편으로 나뉘어 찬반 토론을 했는데, 찬성 편에는 서재필과 김연근이 연설자로 나섰고, 반대 편에는 윤치호와 조한규가 연설자로 나섰다. 여성회원들은 아직 연설자로 나설 수 없었다.
미국 시민권을 지니고 있던 서재필은 미국의 여성 사회를 예로 들면서 여성들도 교육을 받아야 하며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김연근은 동양의 음양조화론을 근거로 찬성 발언을 했다. 반면 5년 동안 미국 유학을 다녀왔음에도 윤리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윤치호는 여성 교육은 필요 없고 가사만 잘 돌보면 된다는 주장을 했으며, 조한규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가 됨이라” 는 성경구절과 창세기 3장을 예로 들면서, “인류의 타락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탓이 아닌가?” 라고 하며 여성 교육은 타락만 조장할 뿐이라는 논리를 폈다. 토론회의 분위기가 여성교육 반대로 기울어 갈 즈음에 회중석에 있던 조이스회 회원 한 명이 소리쳤다.
“물론 하와가 죄를 지었으나 성경에는 하와만 있는 게 아니오. 만약 마리아가 없었으면 예수께서 어찌 세상에 나셨을 것이며, 구원은 어찌 이루어졌으리오.
성경에서 하와만 보지 말고 마리아도 보시오”
이 외침을 계기로 토론회에서는 남자 회원과 여자 회원 사이에 난상토론이 전개되었다. 이날 열린 엡윗청년회 토론회는 1896년 7월 2일에 설립된 독립협회가 당시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토론회운동의 흐름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독립협회가 주도한 토론회운동에는 양반뿐 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연설과 토론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이런 토론회 운동의 절정이 1898년에 개최된 만민공동회였다. 이 토론회운동은, 이전에는 공론(公論)의 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사대부를 비롯한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신분질서의 벽을 넘어 누구나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혁명적인 운동이었다. 그런데 1897년 엡윗청년회 토론회에서 여성들이 처음으로 남성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 을 주장하였다는 것은 신분질서와 남존여비라는 이중의 벽을 넘어서 드디어 여성들이 공론의 장에 등장하였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남존여비(男尊女卑),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로 대표되는 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은 언제나 침묵을 강요당하고 숨어있는 존재였다. 이런 여성들이 공론의 장으로 나와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게 되고 은둔의 문을 열고 사회 속으로 나올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준 것이 기독교와 선교사였다.
1884년 선교사 알렌의 입국 이후, 당시 한국에서 여성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일은 대부분 여성선교사들의 몫이었다. 여성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통하여, 그리고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했지만 당시 관습상 주로 집안에만 머물러 있는 여성들을 선교사들이 접촉하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선교사들을 대신하여 여성들을 자유롭게 만나고 복음을 전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울, 인천, 부산 등의 개항장뿐만 아니라 지방으로까지 순회전도가 확대되고 가정방문전도를 통하여 여성 기독교인들이 늘어나면서 확대된 선교사역을 함께 감당할 사람들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등장한 사람들이 전도부인(Bible Woman)이었다.
전도부인은 신앙적인 열정과 특별한 사명감뿐만 아니라 일정수준의 교육을 받은 후에 임명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여성선교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성경과 교리교육을 받은 후에 임명되었고, 1897년 이후에는 성경반(Bible Class)과 성경연구반(Bible Institute), 성경학원(Bible Training School)을 통하여 교육을 받고 임명되었다. 전도부인들은 여성선교사의 지휘 아래 관할지역에 파송되어 전도사역을 감당했는데, 그 활동영역에 따라 도시전도부인, 학교전도부인, 병원전도부인으로 구분되었다. 도시전도부인은 구역을 담당하여 순회하거나 교회를 전담하는 일을 했으며, 학교전도부인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전도부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고, 병원전도부인은 선교부가 세운 의료기관에서 전도부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현재의 원목에 해당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전도부인이 실제 수행한 역할은 크게 전도활동, 사경회와 성경반 지도를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 교회설립과 부흥활동 등으로 매우 광범위했다.
초기 전도부인의 전도활동에는 성경을 판매하는 권서(勸書)의 역할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여성권서를 통해서 기독교신앙을 갖게 되는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것은 여성들이 외부와 거의 차단된 생활을 하여 권서를 통해서만 그들과 접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여성들 대부분은 한자는 물론이고 한글도 몰랐기 때문에 성경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자연스럽게 전도부인은 여성들의 한글선생이 되어 그들이 문맹(文盲)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성경연구반과 성경학원에서 배운 새로운 학문과 사상의 전달자 역할까지 감당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도부인의 사역은 단순히 직접적인 전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당시 여성들의 전반적인 삶을 돌보는 목회와 그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는 선구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초기 전도부인의 역할은 여성선교사의 조력자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전도부인들은 나름대로 주체적인 활동영역을 넓혀가며 지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즉 한국기독교 여성지도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가령 개별교회의 여성조직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전도부인들은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감리교의 경우, 한국최초의 여성단체인 조이스회가 1897년 10월 31일 창립될 때 한국인으로 부회장을 맡은 사람이 전도부인인 여메례였으며, 위에서 언급한 정동감리교회 신축예배당 봉헌기념 엡윗청년회 토론회에서 조이스회를 이끌고 남녀 간 일장토론회를 이끌어낸 사람도 여메례였다. 여메례는 1900년 11월 11일에 한국 여성기독교인들만으로 감리교 여선교회의 모체인 보호여회(保護女會)를 조직하였으며, 1903년 평양 남산현교회 보호여회의 설립주역도 전도부인 김세지였다. 또한 전도부인들은 여성조직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여성조직에 의해 전도부인으로 파송되기도 했는데, 장로교는 1898년 평양 장대현교회 여전도회가 조직되면서 여성들이 매월 전도 비용을 모아 전도부인을 파송하기로 했으며, 1908년 제주도에 이선광을 전도부인으로 파송하기도 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침묵과 은둔을 강요당하던 당시의 한국여성들이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은둔의 문을 열고 사회 속으로 나올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 준 존재는 기독교와 선교사였다. 하지만 한국여성들이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실제로 그들을 이끌어 준 사람들은 전도부인들이었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전도부인이 복음적이며 보수적인 미국 여성선교사의 그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한 기독교복음 안에서의 평등과 여성의 권리라는 개념이 사회적 역할 속에서의 성적(gender) 평등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절하 하기도 하지만 그런 평가는 1세기 전의 전도부인들에게 1세기 후의 사람들이 너무 과중한 기대를 투영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전도부인 김세지가 “기독교의 복음은 조선의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주고 여성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고 증언한 것처럼 바로 그런 복음을 여성에게 전해 준 전도부인들에게 한국기독교 여성운동의 문을 연 선구자라는 명예를 헌정해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이 글은 55호 소식지 공감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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