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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개혁 설교단상] 저항, 인내 그리고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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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5-08-19 16:35 / 조회 2,0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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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 설교단상]


저항, 인내 그리고 승리


박득훈 공동대표(새맘교회 목사)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7-11)


저항, 낯설고 불온한 단어?


오늘 날 그리스도인의 귀에 ‘저항’이란 말은 낯설 뿐 아니라 불온하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이는 오랜 동안 사회적 요인과 신학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 결과입니다. 사회적 요인의 근저에는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IMF관리체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 때 이후 인간의 존엄성보다 소수 자본의 이익을 앞세우는 맘몬주의와 시장만능주의가 한국사회를 갈수록 더 철저히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군부독재와 달리 시장독재는 자유와 민주의 탈을 쓰고 관철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잘 감지가 되질 않습니다. 두들겨 맞는 사람은 보이는데 두들겨 때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쓰러지는 사람들조차 누구에게도 저항의 몸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설사 그렇게 두들겨 패는 주먹의 정체를 발견했다한들, 개인이 저항하기엔 너무 강력해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신학적 요인이란 교회의 지배세력이 오랜 세월동안 성경을 왜곡하여 ‘저항’은 그리스도인의 본분과는 무관한 것처럼 가르쳐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주로 이용되어 온 대표적 말씀으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 22:21),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 13:1-7)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원칙은 교회 안에도 확대 적용되었습니다. 교회지도자가 부패하여 불의를 저질러도 교인들은 그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지 스스로 저항해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이 두 요인이 상호작용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존의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존재로 길들여져 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교회와 사회를 개혁해나가는 주체세력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개혁을 가로막는 기득권세력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런 현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언자,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라는 권면을 잘못 읽으면 그리스도인은 단지 고난을 견뎌내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면의 진의는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라’는(10) 말씀과 연관 지어 읽을 때 비로소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야고보가 예언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사람들로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주님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딘다는 것은 예언자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겪게 되는 고난을 인내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 삶의 특징을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저항, 인내 그리고 승리입니다.

저항


예언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말했다는 건 억압과 폭력으로 가득 찬 불의한 시대, 지도자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저항하면서 회개를 촉구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말씀을 보면 너무나 분명합니다. 야고보서를 잘 읽어보면 야고보 자신도 예언자의 이러한 전통을 충실하게 이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약 1:27)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주는 것을 진정한 경건으로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예언자적 영성입니다. 하여 야고보는 헐벗고 배고픈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고 못 박아 말합니다(약 2:15-17). 가난한 사람은 업신여기고 하대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압제하고 법정에 세우는 부자들을 오히려 존대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통렬히 꾸짖습니다(약 2:1-9). 그 뿐 아니라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의 품삯을 가로채면서까지 자기의 부를 축적하여 향락에 빠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언합니다(약 5:1-6).

우리가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려 한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저항의 메시지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마땅한 도리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불의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본연의 정체성을 스스로 방기하는 셈입니다. 소위 중립 혹은 세상권력에 대한 신앙적 복종 혹은 경건을 빙자하여 저항의 사명을 포기한다면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약 2:1).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분으로써(마 5:17) 예언자적 저항의 완벽한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법과 성전제사를 통치수단으로 삼아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체제와 그 중심세력에 분노하셔서 강력히 저항하셨습니다(막 2:23-3:6; 요 7:16-24; 눅 19:45-46).

이러한 저항적 영성을 회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법을 빙자해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안전한 사회 건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오늘의 지배세력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저항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교회법을 빙자해 타락한 목회자의 불법적 행동들 즉 성폭력, 교회재산 횡령, 리더십 세습 등을 비호하는 교회지배세력에 대하여도 저항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존재하는 중요한 목적 중 하나임을 늘 마음에 새길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인내


저항적 삶은 자연적으로 고난을 불러 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배세력은 자기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저항자를 끈질기게 핍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에 맞서 해방을 추구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괴롭힌 바로에게서 우리는 그 전형을 봅니다. 이는 오늘 한국 현대사와 교회사에서도 분명히 증명되어 왔습니다. 그러면 예언자처럼 고난을 인내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무런 불평도 없이 달관한 자처럼 견뎌내는 걸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다행히도 예레미야는 고난을 견뎌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 지자,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자신이 잡혀 죽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렘 15:15). 예언자처럼 고난을 인내한다는 건, 때론 불평도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마침내 믿음을 지켜내는 것을 뜻합니다.

승리


예언자를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는 사람에겐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건 궁극적 승리입니다. 그들은 마치 씨앗을 심은 후 오래 참다 땅의 귀한 소출을 마침내 얻는 농부와 같은 존재입니다(7).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때(8), 그리스도인은 마침내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정의의 심판자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9). 그 날이 오면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며 인내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욥처럼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속히 오시지 않는 이유는, 죄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최후심판을 연기하고 계시는 사랑 때문입니다(벧후 3:8-9).

그렇다면 저항과 인내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궁극적 승리 외엔 그 어떤 다른 위로도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걸어가는 이들 가운데 더욱 가까이 계셔주시기 때문에 놀라운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요 15:9-11). 바울처럼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외칠 수 있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6:9- 10). 사랑하는 개혁연대 동지 여러분! 이 영광스러운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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