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위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를 둘러싼 토론이 전개되고 있다. 이
글은 공간적 시간적 제약으로 이 토론에 직접 참여하기 힘든 필자로서 토론의 방향에 참고가 되기를 원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글의
핵심은 복음주의 진영 내의 토론이 복음적 분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복음주의 진영이란 1980년대 이후로 한국의 개신교 내에서 형성된 온건한 사회 참여 그룹을 말하고 있다. 김명배 박사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진보 측의 과격한 반독재 투쟁, 보수 측의 독재 협조"를 둘 다 거부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온건한 방식의 사회 참여를 실천하려는 일단의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을 필두로 기독교학문연구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명선거실천시민협의회(공선협) 등의 시민 단체들을 창립하였다. 여기에 추가하여, 정강길 선생의 분석에
따르면, 성서한국, 기독교사회책임, 교회개혁실천연대(개혁연대) 등이 후발로 나타난 대표적 조직들이다. 이외에도 <복음과상황>, <뉴스앤조이>와
같은 언론 매체를 포함하여 많은 단체들이 있다. 또한 이들의 배후에는 로잔 언약을 따르는 복음주의목회자협의회와 같은 목회자
단체들이 있었다. 이들이 과연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독점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지만, 앞서 인용한 기독교 사회 운동사가들은 이
명칭의 일반화를 인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 복음주의 진영이 한국교회와 사회의 발전에 다양한 공헌을 했다고 믿고 있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예컨대, 복음주의 진영이 주도한 공명 선거 운동은 선거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제3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평화적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군사 독재의 존립에 위협을 가했던 진보 진영의 강고한 투쟁과 상호 보완적으로
이루어졌다.
최근 복음주의 진영은 사랑의교회가 서초동의 요지에 총 2,100억 원 정도의 자금을 투입하여 건물을 짓는 문제로 매우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복음주의적 원칙을 가진 사람 치고 어떤 교회가 단지 교회의 내부 용도로 그처럼 막대한 돈을 건물 짓는 일에 낭비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다. 그 건물이 개교회의 확장을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아쉬운 것은 사랑의교회가
지금까지 복음주의 진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교회라는 점이다.
막상 본인들은 잘 몰랐을지 모르지만, 사랑의교회는 서울영동교회나 남서울교회와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진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복음주의 진영의 단체 치고 사랑의교회 재정 지원을 받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인적 참여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명 선거 운동을 예로 들 수 있다. 1991년의 기초 및 광역 선거에서 공선협의 주축은
공명선거실천기독교대책위원회(공선기위)였고, 공선기위의 주축은 공선기위 청년위원회였으며, 공선기위 청년위원회의 주축은 박성남
전도사가 이끄는 사랑의교회 청년부였다. 당시 처음으로 개발되어 전국에 배포된 '공명선거채점표'와 '공명선거설교집'은 한국의
선거에서 공평과 정직을 정착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제 사랑의교회가 건축 때문에 복음주의적 원칙에서 현저히 벗어난 태도를 취함으로 인해 복음주의 진영은 어떤 식으로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지를 각각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건축의 불가피성을 용인하고 향후에 더욱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할지,
건축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겠지만 각종 지원과 대표자의 파견을 거부해야 할지, 더욱 적극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건축을
포기하거나 방향을 바꾸도록 설득해야 할지, 아니면 아예 관심을 끊고 내버려둘지를 생각하는 시점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도 숱하게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주제들 중의 하나이지만, 어쨌든 복음주의 진영의 관심사가 된 이상 좋은 토론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토론에 있어 반드시 유의할 점이 있다. '같은 생각'일지라도 '태도의 다름'과 '방법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관용의 정신이야말로 양심의 자유라는 원칙 위에 세워진 복음주의의 기본이다. 이러한 관용의
정신을 빠뜨리면 자칫 무지로 인한 오해와 편견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원래의 목적과 전혀 다른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단체의 차원에서 다름과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단체는 별 관심이 없는 주제이지만 다른 단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일 수 있다. 기독교경영연구원은 성경적 경영 원리를 탐구하지만 개교회의 경영에는 별 관심이 없다. 개혁연대에게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는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관심사이다. 기윤실의 입장은 좀 미묘하다. 기윤실의 딜레마는
전통적으로 '교회보다 앞서 갈 것이냐, 교회와 함께 갈 것이냐?'는 문제였다. 꽤 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의 기윤실(여기서는
현재 전국 기윤실의 본부 역할을 맡고 있는 서울 기윤실)은 '교회와 함께' 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 입장에서 보면 개교회의 건축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연령의 차원에서도 다름과 차이가 발생한다. 복음주의 진영에는 벌써 다양한 세대의 지도자들이 혼재하고 있다. 현재 젊은 지도자들
중에서 원로들의 소극적 태도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적 관계 때문에 복음주의적 원칙을 소홀히 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40대의 역동성을 즐기는 지도자들은 지금 70대에 처한 복음주의 진영의 원로들께서
40대에 발휘했던 역동성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기준으로 보면 지금 40대의 역동성은 이분들이 그 연령에서 발휘했던
헌신과 결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 본다. 그분들은 당시 군사 독재 치하에서 해고와 투옥과 테러의 위험이 상존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부의 횡포에 대해 과감하게 공평과 정직이라는 복음주의적 원칙을 실천했다. 이는 중요한 전통이고 복음주의 진영의 역사적
자원이다.
지금은? 지금은 민주주의 체제이므로 권력과 부로부터의 위협도 간접적이다. 그리 엄청난 결단을 할
필요가 없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이제 이분들은 실무에 은퇴하셨고 기력도 예전과 다르다. 이분들에게 자신과 동일한 수준의
역동성을 기대하는 40대가 있다면 필자는 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참여 방식의 차원에서도 다름과 차이가 나타난다. 원로들은 개인적 대화 방식을 사용한다. 논쟁의 당사자들이 이들의 영향력과 권위를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젊은 지도자들도 직접 대화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대화가 거부당한 이상 이들이 성명서 발표나
공개 세미나로 의사를 표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화를 거부한 것은 상대의 잘못이다.
그러나 또한 같은 내용의 충고를 너무 자주 들어야 하는 당사자들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다.
개혁연대는 1인 시위를 했다. 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은 지금 교통사고로 피를 흘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타 세습이나 금권 선거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은 왜 개혁연대가 저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소위 3단계 운동 방식 중에 겨우 1단계인 긴급 구난에 나섰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제도 개혁과 의식 개혁의 단계를 실천하려면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하나님이 써야 무섭지 인간들이 쓰면 원래 의도와 달리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여하튼 모두가 자신과 동일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너무 섭섭해 할 필요가 없다.
필자도 미력하지만 나름대로 사랑의교회와 동지적 연대 의식을 가지고 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였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 첫 단계로
꽤 오래 전에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를 만나 무엇이 문제인지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첫 번째 문제는 개교회 이기주의이다. 사랑의교회가 건축에 투입할 2,100억 원은 사실상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한국교회 전체 기금의 일부이다. 이것이 개교회의 예배와 교육만을 위해 사용된다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사랑의교회에
좋은 것이 한국교회에도 좋고, 한국 사회에도 좋을 수 없겠는가? 대안으로 남서울은혜교회가 지은 밀알학교의 사례를 추천한 바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대형 교회 중심의 수평 이동 발생이다. 대형 마트가 군소 마트의 매출을
싹쓸이하듯이 시설 좋은 대형 교회는 불가피하게 수평 이동을 부추기고 주변의 여타 소규모 교회 공동체를 어려운 처지에 몰아넣을
것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수평 이동 금지 선언과 실천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세 번째 문제로 의사 결정의 비민주성을 지적했다. 몇몇 교회 지도자 중심의 성급한 의사 결정으로
명분과 실제에 있어 불법성이 나타났다. 정관 개정과 공동의회를 통한 합법적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필자는 지금도 사랑의교회가 바로 서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떤 교회가 공간이 필요하고 역량이 있으면 건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급적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 넘쳐흐르는 공간을 만드는 게 좋다. 솔로몬의 성전 운운하는 이단적 사고는 버리는 게 좋다. 큰 교회가
되어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버리는 게 좋다. 한때 70만 명이 모이던 세계 최대의 교회가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를
위해 한 일을 보면 참으로 비참하다. 몇 천 명 시절의 사랑의교회가 이 교회보다 훨씬 더 주님과 사회로부터 칭찬받을 일을 했었다.
간곡히 말하건대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숫자란 정말 의미 없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 규모가 커질수록 매개의 변증법도 심해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여하튼 교회의 주권이라는
원칙으로 볼 때 사랑의교회 일은 마땅히 사랑의교회 교인들이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 결정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꾸지람을
면할 수 없다.
복음적 분업은 당면 과제들을 토론함에 있어서 복음주의 진영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복음적 분업이란 하나님나라를 위해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필자가 다름과 차이를 강조한 것이 단순히 관용의 정신을
말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효율성도 중요하다. 다름과 차이를 활용하는 분업 체계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효율성에
있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우수하다.
모든 공동체에는 각각의 수준에 따라 다원적 공동체의 영역 자율성이 존재한다. 한 공동체 내에 있는 각각의 단체들은 각각의 목표와
운영 방식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성서한국은 여러 단체의 연합체로서 한국을 성서 위에 구축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주
관심사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며 교회 개혁은 아니다. 한국교회와 함께 가야 한다는 점에서 서울 기윤실과 유사한 방향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보다 앞서가는 방향인 교회 개혁은 개혁연대와 바른교회아카데미의 주 관심사이다. 그러나 전자는 실천에, 후자는 이론에
주요 관심이 있다. 이 차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우리는 좋은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모두 똑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것을 시장
가격으로 환원시키려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오류와 비극을 참조하는 게 좋다. 도리어 서로 다른 분야에 전문화하고 공통의 비전을 위해
협조할 때에 훨씬 더 유익한 결과가 나타난다.
가장 주의할 일은 지나친 이상주의이다. 여기에서 지나친 이상주의란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의식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말한다.
강경한 태도로 윤리적 선명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는 게 좋다. 이 강경한 태도의
이면에 조직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강경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매개적 사고가 깔려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역량임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목표 수행을 요구하는 것은 피차에 패배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니버가 말한 대로, 지나친 이상주의는 패배주의와
한걸음이고, 패배주의는 기회주의와 한걸음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인류는 지금 과거보다 더 한국 복음주의 진영의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현 시대를 보면 부정직한 이데올로기와
세계적 금융 공황, 무절제가 빚어낸 전대미문의 환경 재앙, 테러와 테러의 맞대응, 점차 강화되는 종교 분쟁, 그리고 기아와 살육이
전 세계적 수준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 사회는 이데올로기적 갈등, 양극화의 확대, 천민자본주의의 고착화로 고통당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품성 즉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 발현되는 공동체를 만들어 보임으로 인류 사회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어야 한다. 이 일을 감당하려면 복음주의 진영은 복음적 분업을 통해 한층 더 역량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백종국 / 경상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