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방인성 칼럼] 건강한 작은 교회가 해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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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0-04-22 14:44 / 조회 3,863 / 댓글 1본문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건강한 작은 교회가 해답입니다
방인성 목사(함께여는교회, 개혁연대 집행위원)
성경은 큰 도시와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탑과 성은 인간의 오만함으로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크고 화려한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바벨론과 로마,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무참히 파괴되고 멸망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우리 마음속 깊이 큰 것이 편하고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큰 음식점, 큰 집, 큰 나라, 큰 사람들이 우리를 끌어들이고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여기에 '큰 교회'도 절대 빠지지 않는다.
교회가 크고, 많고, 화려함을 좇는 자본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면 과연 복음적인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해야 한다. 아파트 광고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라도 대변하는 것처럼 속이고 있는데, 교회도 그러한가 말이다. 웅장한 교회여! 화려한 교회여! 슬픈 교회여! 근엄하고 인기 있는 멋진 목사는 강단에 있어도 예수께서는 교회 문 밖에 계시는 것을 모르는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앞으로 10년 있으면 한국 사회는 초고령 사회가 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는 나라이며 저출산으로 인구가 급속히 줄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대도 큰 빚을 져 가며 대형 건물을 지으려 하니 앞으로 텅텅 비어 관광객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유럽 교회 건물처럼 되려나 보다.
사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건 화려해 보이는 거대한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소박하고 작은 공동체이다. 눈을 현혹시키는 화려함과 웅장함, 사람들을 압도하는 로마의 힘과 싸워 이긴 것은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의 작은 공동체들이었다. 그렇다.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과 다르게 걸어가며 감동을 줄 수 있는 작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큰 교회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꺾고 작은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꿈을 향해 가는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 희망을 갖는다.
예수께서 지향했던 공동체는 대형이 아니라 12명의 제자들이었고 하나님나라의 기본 단위는 작았다는 것을 실천하는 교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거대 주의에 병든 한국교회에 작은 것의 아름다움과 그 장점을 보여 주기 위해 도전장을 던진 멋진 교회들이 있다. 규모가 작다는 것에 열등감을 갖지 않고, 작은 교회는 목회자가 무능하다거나 잘못된 교회가 아니라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목사들이 있다.
이런 작은 교회들은 규제와 통제보다는 자유와 유연한 생명의 공동체를 경험한다. '성령의 교통하심'의 고백이 어떤 것인지를 실제로 경험하는 소통이 이루어진다. 가족 공동체로서 서로의 사정을 알고 같이 아파하고 기뻐하는 섬김과 나눔의 장이다.
작은 교회는 빚을 질 필요가 없다. 규모가 작다 보니 자립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큰 규모는 예외 없이 빚을 지고 있다. 대부분 큰 교회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는 실천을 건강한 작은 교회 공동체가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음으로 오는 공간 및 여러 불편함을 오히려 즐기는 성도들이야말로 친환경적 또는 생태적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기상 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와 환경 오염, 자원 고갈 등은 편리만을 추구한 우리들 욕망의 산물인 것이다.
큰 교회일수록 힘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운영하고 회의는 대부분 형식적 절차만을 밟게 된다. 이것을 '소수의 지배 법칙'이라고 한다. 이 철칙을 깰 수 있는 것은 조직을 되도록 작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교회는 서로의 생각을 열어 놓고 대화와 토론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민주적 운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요즘 새롭게 시작하는 작은 교회들이 민주적 정관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성도는 동등하게 그의 몸을 이루어 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연합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저마다 공룡과 같이 거대해지고 싶은 욕망과 오만함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거대한 공룡과 같이 혼자서 사는 것은 사라졌으나 함께 사는 작은 생물들은 살아 있다. 건강한 작은 교회는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작은 교회와 교회가 연합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지역 사회를 함께 섬기는 것이다. 큰 교회가 혼자 감당하는 것보다 실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역을 하게 된다. 이런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모임이 있어 만나면 반갑고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배움이 된다.
아름다운 건물, 첨단의 음향 시설과 대규모의 예배와 찬양이 우리를 압도하고 흥분시키지만 작은 모임에서 인격적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이 더 깊은 영혼의 울림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변화는 진솔하고 소박한 만남을 통해 일어나듯이 목회자의 삶을 열고 성도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는 인격적 목회를 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감동을 받는다.
요즘 한국교회가 개독교 소리를 들어 가며 욕을 먹고 있다. 이런 불신은 대부분 대형 교회 목사들과 지도자들의 부패 때문이다. 목회 세습, 성적 불륜, 재정 횡령, 대형 건축, 정치권력과 야합, 과다한 부동산 소유 등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사회에 알려져 있지만 대형 교회의 힘으로 질주하고 있다. 크고 멋있고 많은 것에는 무릎을 꿇고 작은 것을 무시하는 한국교회는 망해야 한다. 작고 못생겼고 초라하다고 버리는 교회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작은 것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0:42; 18:14)고 말씀하셨다. 이제 한국교회는 새로운 작은 교회 운동을 벌여야 한다. 지역 사회와 함께 소통하고 교회들과 연합하여 사역하는 작은 교회가 곳곳에 생겨나야 한다.
대형 교회는 지금이라도 성장주의를 멈추고 분립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과 건물을 지역 사회와 단체들에게 헌납하고 몸집을 작게 해야 한다. 큰 교회가 큰일을 한다는 허상에서 벗어나 연합하여 사역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목회자가 못 하면 성도들이 나서야 한다. 그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이렇게 외쳐도 비웃는 대형 교회와 그런 것을 동경하고 좇는 목사들을 불쌍히 여기고 새로운 대안적 교회 운동을 펼쳐야 한다. 지금 젊은 목회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건강한 작은 교회 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
영국에서 공부하며 목회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교회에 찾아온 사람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난 대형 교회에 다니거나, 특히 직분자들은 자랑스럽게 출신 교회를 소개한다. 마치 그런 유명한 교회가 자신의 신앙 또는 신분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정말 꼴불견이다. 그런가 하면 이름 없는 작은 교회를 다니면 "그냥 동네 작은 교회에 다녀요"라고 교회 이름도 밝히지 않는다. 왠지 씁쓸하다.
사랑스러운 후배 목회자가 유학 생활하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동네작은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했다.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작은 교회 운동을 펼치겠다는 열망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60명 정도 모이는데, 벌써 분립하려고 나에게 방법을 물어 왔다. 놀라기도 하고 큰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그날 저녁 나는 많이 울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아직 멀었다. 이런 소박한 목회자와 성도들 때문에 교회는 지금도 개혁되고 있다. 분명히 주님이 꿈꾸신 소박하고 작은 교회가 이 땅에 희망이다. 건강한 작은 교회가 세상을 바꾼다.
방인성 목사(함께여는교회, 개혁연대 집행위원)
성경은 큰 도시와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탑과 성은 인간의 오만함으로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크고 화려한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바벨론과 로마,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무참히 파괴되고 멸망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우리 마음속 깊이 큰 것이 편하고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큰 음식점, 큰 집, 큰 나라, 큰 사람들이 우리를 끌어들이고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여기에 '큰 교회'도 절대 빠지지 않는다.
교회가 크고, 많고, 화려함을 좇는 자본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면 과연 복음적인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해야 한다. 아파트 광고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라도 대변하는 것처럼 속이고 있는데, 교회도 그러한가 말이다. 웅장한 교회여! 화려한 교회여! 슬픈 교회여! 근엄하고 인기 있는 멋진 목사는 강단에 있어도 예수께서는 교회 문 밖에 계시는 것을 모르는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앞으로 10년 있으면 한국 사회는 초고령 사회가 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는 나라이며 저출산으로 인구가 급속히 줄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대도 큰 빚을 져 가며 대형 건물을 지으려 하니 앞으로 텅텅 비어 관광객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유럽 교회 건물처럼 되려나 보다.
사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건 화려해 보이는 거대한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소박하고 작은 공동체이다. 눈을 현혹시키는 화려함과 웅장함, 사람들을 압도하는 로마의 힘과 싸워 이긴 것은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의 작은 공동체들이었다. 그렇다.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과 다르게 걸어가며 감동을 줄 수 있는 작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큰 교회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꺾고 작은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꿈을 향해 가는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 희망을 갖는다.
예수께서 지향했던 공동체는 대형이 아니라 12명의 제자들이었고 하나님나라의 기본 단위는 작았다는 것을 실천하는 교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거대 주의에 병든 한국교회에 작은 것의 아름다움과 그 장점을 보여 주기 위해 도전장을 던진 멋진 교회들이 있다. 규모가 작다는 것에 열등감을 갖지 않고, 작은 교회는 목회자가 무능하다거나 잘못된 교회가 아니라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목사들이 있다.
이런 작은 교회들은 규제와 통제보다는 자유와 유연한 생명의 공동체를 경험한다. '성령의 교통하심'의 고백이 어떤 것인지를 실제로 경험하는 소통이 이루어진다. 가족 공동체로서 서로의 사정을 알고 같이 아파하고 기뻐하는 섬김과 나눔의 장이다.
작은 교회는 빚을 질 필요가 없다. 규모가 작다 보니 자립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큰 규모는 예외 없이 빚을 지고 있다. 대부분 큰 교회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는 실천을 건강한 작은 교회 공동체가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음으로 오는 공간 및 여러 불편함을 오히려 즐기는 성도들이야말로 친환경적 또는 생태적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기상 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와 환경 오염, 자원 고갈 등은 편리만을 추구한 우리들 욕망의 산물인 것이다.
큰 교회일수록 힘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운영하고 회의는 대부분 형식적 절차만을 밟게 된다. 이것을 '소수의 지배 법칙'이라고 한다. 이 철칙을 깰 수 있는 것은 조직을 되도록 작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교회는 서로의 생각을 열어 놓고 대화와 토론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민주적 운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요즘 새롭게 시작하는 작은 교회들이 민주적 정관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성도는 동등하게 그의 몸을 이루어 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연합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저마다 공룡과 같이 거대해지고 싶은 욕망과 오만함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거대한 공룡과 같이 혼자서 사는 것은 사라졌으나 함께 사는 작은 생물들은 살아 있다. 건강한 작은 교회는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작은 교회와 교회가 연합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지역 사회를 함께 섬기는 것이다. 큰 교회가 혼자 감당하는 것보다 실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역을 하게 된다. 이런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모임이 있어 만나면 반갑고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배움이 된다.
아름다운 건물, 첨단의 음향 시설과 대규모의 예배와 찬양이 우리를 압도하고 흥분시키지만 작은 모임에서 인격적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이 더 깊은 영혼의 울림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변화는 진솔하고 소박한 만남을 통해 일어나듯이 목회자의 삶을 열고 성도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는 인격적 목회를 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감동을 받는다.
요즘 한국교회가 개독교 소리를 들어 가며 욕을 먹고 있다. 이런 불신은 대부분 대형 교회 목사들과 지도자들의 부패 때문이다. 목회 세습, 성적 불륜, 재정 횡령, 대형 건축, 정치권력과 야합, 과다한 부동산 소유 등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사회에 알려져 있지만 대형 교회의 힘으로 질주하고 있다. 크고 멋있고 많은 것에는 무릎을 꿇고 작은 것을 무시하는 한국교회는 망해야 한다. 작고 못생겼고 초라하다고 버리는 교회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작은 것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0:42; 18:14)고 말씀하셨다. 이제 한국교회는 새로운 작은 교회 운동을 벌여야 한다. 지역 사회와 함께 소통하고 교회들과 연합하여 사역하는 작은 교회가 곳곳에 생겨나야 한다.
대형 교회는 지금이라도 성장주의를 멈추고 분립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과 건물을 지역 사회와 단체들에게 헌납하고 몸집을 작게 해야 한다. 큰 교회가 큰일을 한다는 허상에서 벗어나 연합하여 사역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목회자가 못 하면 성도들이 나서야 한다. 그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이렇게 외쳐도 비웃는 대형 교회와 그런 것을 동경하고 좇는 목사들을 불쌍히 여기고 새로운 대안적 교회 운동을 펼쳐야 한다. 지금 젊은 목회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건강한 작은 교회 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
영국에서 공부하며 목회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교회에 찾아온 사람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난 대형 교회에 다니거나, 특히 직분자들은 자랑스럽게 출신 교회를 소개한다. 마치 그런 유명한 교회가 자신의 신앙 또는 신분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정말 꼴불견이다. 그런가 하면 이름 없는 작은 교회를 다니면 "그냥 동네 작은 교회에 다녀요"라고 교회 이름도 밝히지 않는다. 왠지 씁쓸하다.
사랑스러운 후배 목회자가 유학 생활하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동네작은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했다.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작은 교회 운동을 펼치겠다는 열망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60명 정도 모이는데, 벌써 분립하려고 나에게 방법을 물어 왔다. 놀라기도 하고 큰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그날 저녁 나는 많이 울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아직 멀었다. 이런 소박한 목회자와 성도들 때문에 교회는 지금도 개혁되고 있다. 분명히 주님이 꿈꾸신 소박하고 작은 교회가 이 땅에 희망이다. 건강한 작은 교회가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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