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오성 칼럼] 전통에 근거한 신앙, 성경에 근거한 신앙[뉴조, 02/02]
페이지 정보
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0-02-09 15:34 / 조회 3,893 / 댓글 0본문
피터 왈도,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윌리암 틴데일, 마틴 루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중세 종교개혁자? 그렇다. 그런데 다른 공통점이 더 있다. 찾아보자.
이 사람들 모두 성경 번역자다. 중세 교회의 라틴어 성경을 자기의 일상 언어로, 즉 피터 왈도는 로마 방언으로, 존 위클리프는 영어로, 얀 후스는 체코어로, 윌리암 틴데일도 영어로, 마틴 루터는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들은 성경을 해방시켰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타락한 성직자들의 탐욕의 수단으로 질식된 성경을, 올바른 신앙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방시킨 것이다. 이들의 성경 번역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은 가능했다. 종교개혁은 소수 영웅의 종교적 정치 활동이 아닌, 성경을 올바로 읽은 일반 성도들의 일상생활 신앙 혁명이었다.
성경에 근거한 신앙?
지금 한국교회 상황은 중세 교회 타락상과 유사하다. 시조 한 편 읊어 보련다.
대형 교회 목사 위세 중세 교황 부럽잖고 / 수천억 원 랜드마크 교회 건물 바라보면 / 면죄부 팔아 짓던 중세 성당 떠오른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 본문이 아닌, 인간의 관습인 교회 전통에 근거한 신앙 행태의 결과는 결국 사람이든 건물이든 피조물을 하나님 삼는 우상 숭배일 뿐이다.
그렇다. 지금 한국교회의 신앙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어떠한가? 간단한 테스트 한번 해 보자. 성경 퀴즈 들어간다.
에덴동산 가운데에는 나무가 몇 그루 있었나? 한 그루? 아니다. 두 그루다. 생명의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 2:9) '선악과'라는 단어는 성경에 몇 번 나올까? 한 번도 안 나온다.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있을 뿐. (창 2:17) 우리 성경에 '이브'가 있나? 없다. 단지 '하와'가 있을 뿐. (창 3:20)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왜 쫓겨났나?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죄로? 아니다.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봐. (창 3:22)
신약으로 넘어가자.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동방에서 온 박사는 몇 명? 세 명? 알 수 없다. 단지 그들이 가져온 예물이 셋이었을 뿐. (마 2:11)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변호하고 낙원에 이른 행악자는 좌우 중 어느 쪽? '우편 강도'? 아니다. 어느 쪽인지 누가는 말하지 않는다. (눅 23:39~43). 그렇게 쓰여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어 왔을 뿐이다.
몇 개나 맞췄나? 인정하시라. 우리 신앙의 기본 자료, 즉 하나님에 관한 기초 정보들 중에는 성경을 읽어 직접 얻은 것보다, 누군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이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신앙은 전통적인 종교 권위, 그러니까 목사, 교사, 설교자, 저자, 출판사, 영화감독 등을 통해 전래된 '성경에 대한 이야기'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작 '성경'은 잘 읽지 않았다. 그리하여 1차 자료 즉 성경 본문보다는, 2차 자료 즉 교회 전통에 근거한 신앙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교회의 전통과 그 권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기독교 전통은 변화하는 인간 문화의 일부이므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담고 있는 것인지 계속 점검되어야 한다.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는 항상 '개혁 중인 교회(reforming church)'여야 한다.
성경의 정신과 무관하게 전승되어 온 교회 관습에 근거한 신앙은 중세 교회의 타락상이자, 지금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신앙의 현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신앙 행태를 거부했다. 우리도 타락한 한국교회의 흐름을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교회 개혁, 어떻게 할까?
한국교회의 개혁, 어떻게 시작할까? 급선무는 성경 읽기다. 예수그리스도의 말과 삶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읽어야 한다. 정치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분노를, 가난한 자들에게는 소망을 가져다 준 그 복음 그대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바리새인처럼 어리석은 제자처럼 스스로 높아지려 버둥대며 살아온 자기 자신, 자기 자녀, 우리 교회, 우리 사회의 모습이, 스스로 낮추신 예수님과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는 갈등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 가난, 고난, 비난의 십자가의 길로, 영생의 길로 갈 것인가, 돈과 힘을 좇아 풍요, 번영, 권력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갈 것인가? 결국에는 결단할 시간이 온다. 그동안의 헛된 신앙을,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허물고 다시 세우려는 목숨을 건 결단, 핏줄과도 같은 교회를 아프지만 바로 세우는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마지막은 실천이다. 자기를 포기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 가자.
이 사람들 모두 성경 번역자다. 중세 교회의 라틴어 성경을 자기의 일상 언어로, 즉 피터 왈도는 로마 방언으로, 존 위클리프는 영어로, 얀 후스는 체코어로, 윌리암 틴데일도 영어로, 마틴 루터는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들은 성경을 해방시켰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타락한 성직자들의 탐욕의 수단으로 질식된 성경을, 올바른 신앙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방시킨 것이다. 이들의 성경 번역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은 가능했다. 종교개혁은 소수 영웅의 종교적 정치 활동이 아닌, 성경을 올바로 읽은 일반 성도들의 일상생활 신앙 혁명이었다.
성경에 근거한 신앙?
지금 한국교회 상황은 중세 교회 타락상과 유사하다. 시조 한 편 읊어 보련다.
대형 교회 목사 위세 중세 교황 부럽잖고 / 수천억 원 랜드마크 교회 건물 바라보면 / 면죄부 팔아 짓던 중세 성당 떠오른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 본문이 아닌, 인간의 관습인 교회 전통에 근거한 신앙 행태의 결과는 결국 사람이든 건물이든 피조물을 하나님 삼는 우상 숭배일 뿐이다.
그렇다. 지금 한국교회의 신앙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어떠한가? 간단한 테스트 한번 해 보자. 성경 퀴즈 들어간다.
에덴동산 가운데에는 나무가 몇 그루 있었나? 한 그루? 아니다. 두 그루다. 생명의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 2:9) '선악과'라는 단어는 성경에 몇 번 나올까? 한 번도 안 나온다.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있을 뿐. (창 2:17) 우리 성경에 '이브'가 있나? 없다. 단지 '하와'가 있을 뿐. (창 3:20)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왜 쫓겨났나?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죄로? 아니다.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봐. (창 3:22)
신약으로 넘어가자.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동방에서 온 박사는 몇 명? 세 명? 알 수 없다. 단지 그들이 가져온 예물이 셋이었을 뿐. (마 2:11)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변호하고 낙원에 이른 행악자는 좌우 중 어느 쪽? '우편 강도'? 아니다. 어느 쪽인지 누가는 말하지 않는다. (눅 23:39~43). 그렇게 쓰여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어 왔을 뿐이다.
몇 개나 맞췄나? 인정하시라. 우리 신앙의 기본 자료, 즉 하나님에 관한 기초 정보들 중에는 성경을 읽어 직접 얻은 것보다, 누군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이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신앙은 전통적인 종교 권위, 그러니까 목사, 교사, 설교자, 저자, 출판사, 영화감독 등을 통해 전래된 '성경에 대한 이야기'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작 '성경'은 잘 읽지 않았다. 그리하여 1차 자료 즉 성경 본문보다는, 2차 자료 즉 교회 전통에 근거한 신앙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교회의 전통과 그 권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기독교 전통은 변화하는 인간 문화의 일부이므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담고 있는 것인지 계속 점검되어야 한다.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는 항상 '개혁 중인 교회(reforming church)'여야 한다.
성경의 정신과 무관하게 전승되어 온 교회 관습에 근거한 신앙은 중세 교회의 타락상이자, 지금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신앙의 현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신앙 행태를 거부했다. 우리도 타락한 한국교회의 흐름을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교회 개혁, 어떻게 할까?
한국교회의 개혁, 어떻게 시작할까? 급선무는 성경 읽기다. 예수그리스도의 말과 삶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읽어야 한다. 정치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분노를, 가난한 자들에게는 소망을 가져다 준 그 복음 그대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바리새인처럼 어리석은 제자처럼 스스로 높아지려 버둥대며 살아온 자기 자신, 자기 자녀, 우리 교회, 우리 사회의 모습이, 스스로 낮추신 예수님과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는 갈등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 가난, 고난, 비난의 십자가의 길로, 영생의 길로 갈 것인가, 돈과 힘을 좇아 풍요, 번영, 권력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갈 것인가? 결국에는 결단할 시간이 온다. 그동안의 헛된 신앙을,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허물고 다시 세우려는 목숨을 건 결단, 핏줄과도 같은 교회를 아프지만 바로 세우는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마지막은 실천이다. 자기를 포기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 가자.
- 이전글[하종호 칼럼] 2,100억 교회지만 결코 대교회주의로 나가지 않겠단다 [뉴조, 2/8] 2010-02-18
- 다음글[구교형 칼럼] 기독교계가 한기총 개혁에 나선 이유[민중의소리12/30] 2010-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