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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득훈 칼럼]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본 한미FTA(3)[뉴스앤조이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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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8-02-28 10:56 / 조회 4,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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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본 한미FTA(3) 한미FTA가 가져올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중심으로

3. 사회적 양극화 심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

성경에서 오늘날의 경제현실에 곧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직접적인 교훈을 찾기는 어렵다. 성경시대의 경제체제와 고도화된 자본주의시대의 경제체제는 서로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오늘의 경제현실 특히 방금 언급한 사회적 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큰 틀의 준거를 제시해준다. 그 준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의 정의에서 우선적으로 찾을 수 있다.

3.1. 하나님나라의 정의는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3.1.1. 하나님나라가 요청하는 정의

그리스도인의 비전인 하나님나라의 정의는 양극화 현상의 심화에 강력히 도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마 6:10)와 실천(마 6;33)을 통해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를 이 땅에 펼쳐나가야 할 사명이 있다. 하나님나라의 정의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정치․경제적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수평적 관계를 함께 아우르는 포괄적인 실체이다. 이는 신구약을 관통하는 진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온 세상이 축복을 받아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비전을 주셨다(창 18:18~19). 그 비전에 등장하는 공의(hq;d;x];, righteousness)와 정의(fP;v]mi,, justice)란 단어는 특히 구약에서 한 쌍을 이루어 자주 나타난다(사 5:16; 렘 9:24; 암 5:24). 이 글에선 이 단어들에 담긴 정치․경제적 의미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공의(hq;d;x])는 특별히 사회 변경으로 밀려난 약자들을 위하여 공동체를 새롭게 만들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즉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켜주셔서 공동체의 존엄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는 행동을 말한다.

정의(fP;v]m)는 공의(hq;d;x)에 비해 좀 더 법정 용어의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정의는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권리(렘 5:8)와 그 권리를 지켜주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될 때 통상적으로 공의와 짝을 이루어 사용된다. 탁월한 구약학자인 크리스토퍼 롸이트는 두 단어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정의는 공동체의 구성원과 환경이 hq;d;x의 상태로 회복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해져야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의와 정의는 자비(mercy)와 신의(faithfulness)와 더불어 율법이 체현하려고 하는 이상이다. 율법에 나타난 정의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장해주고 빈부의 격차를 해소함으로 말미암아 사회 모든 구성원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렘 5:28~29). 하여 구약 율법은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다양하게 보호하고 있다.

첫째 임금체불을 금지하고(레 19:13, 신 24:14, 15), 둘째 금융과 관련해서는 가난한 자에 대한 무이자 대여(출 22:25; 레 25:35-37; 신 15:7~11; 23:19), 전당 잡은 옷을 해지기 전에 돌려주어 침구로 사용토록 하기(출 22:26, 27), 7년 단위의 빚 탕감(신 15:1~3) 등을 담고 있다. 셋째 음식과 관련해서는 매해 가난한 사람을 위해 곡물과 포도의 일부 남겨두기(레 19:9~10; 23:22, 신 24:19~22), 3년마다 레위인과 사회적 약자의 음식장만을 위해 십일조 드리기(신 14:28~29; 26:12), 매 7년마다 그리고 희년에 땅을 놀림으로 스스로 자라난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기(출 23:10~11; 레 25:1~7, 11~12)를 명한다. 넷째 노예생활 6년 후에는 후한 독립자금과 함께 자유를 줄 것을 명하고(신 15:12-15) 마지막으로 매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여 땅을 원 소유자에게 돌려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25:10).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서(사 1:17; 9:6~7; 11:1~5), 아모스서(암 5:24), 미가서(미 6:8) 등의 선지서들도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정의임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예수님께선 바로 이러한 구약전통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다. 또한 이사야 61장 8절과 58장 6절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을 통해 은혜의 해 즉 실질적으로 희년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눅 4:18~19). 이때 굳이 정의란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으셨지만 정의가 담고 있는 내용을 다 표현하셨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을 영적인 의미와 정치․경제적 의미를 아우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경제적 의미에서 보자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가 경제적으로 새롭게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말한다. ‘눈 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한다’는 것은 장애인의 건강을 회복시켜 사회의 존엄한 구성원으로 살 수 있게 한다는 말이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은 가난해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되거나 감옥에 갇힌 자를 해방시켜준다는 뜻이다.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힘이 없어 각종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하여 그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말씀이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정의가 자연스럽게 자유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런 맥락에서 당연히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dikaiosuvnh)를 가장 먼저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하셨다. 예수님은 최후심판에 대한 이야기(마 25:31-46)를 통해 사회적 약자의 기본적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사람이 바로 의인(the just〓oJ divkaio")임을 분명히 하심으로 정의의 실천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가를 보여주셨다.

바울 역시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이런 신구약을 관통하는 전통의 배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로마서 1장 16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 한데서 매우 분명해진다. 즉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언약의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능력이다. 이것은 곧 죄인들을 구원의 공동체로 이끄실 뿐 아니라 그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보존하시는 능력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의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행위와 하나님이 죄인에게 선물로 주시는 객관적 의를 포괄한다. 즉 죄인을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to count righteous)과 ‘의롭게 만드는 것’(to make righteous)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우리의 법적 지위를 의롭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죄인의 삶을 정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능력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로워진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 때 정의로운 삶이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 자신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목숨을 걸만큼 매우 중요한 사명으로 인식했으며(갈 2:10; 행 20:22~24; 21:13; 24:17; 롬 15:26)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dikaiosuvnh, 고후 9:9)임을 밝혔다. 이제 이러한 정의가 자유와 평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3.1.2. 정의가 요청하는 자유와 평등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하나님나라의 정의가 실현되면 자유와 평등이 함께 꽃피는 인간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기초가 다져지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흔히 자유와 평등이 서로 충돌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유의 이름으로 평등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본질적으로 항상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정의가 요청하는 자유와 평등을 각각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3.1.2.1 정의가 요청하는 자유

영국의 탁월한 기독교경제사학자였던 토니가 잘 지적한 것처럼 ‘평등은 자유와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유에 대한 특정 해석과 충돌이 일어날 수 있을 뿐이다’. 평등에 의해서 억압된다고 주장하는 자유는 통상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를 의미한다. 소극적 자유는 하이에크가 잘 정의한 것처럼 ‘타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의해서 강압 당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그에 의하면 이러한 자유는 ‘내가 자신의 주인인지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따를 수 있는지의 여부’의 문제로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얼마나 많은 지의 여부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여기서 선택 가능성의 폭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자신이 보유한 경제적 힘과 직결된다.

그러나 하이에크 자신이 인정한 것처럼 소극적 자유의 가치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율적이며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의미가 있다면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실제로 받쳐줄 수 있는 경제력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레이몬드 플란트도 ‘만일 내가 실제로 하기 원하는 바가 내게 열려있는 가능성들과 별로 겹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대단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매우 이상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롤즈는 단순히 소극적인 자유엔 ‘자유의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율적이고 책임 있는 삶을 실제로 살 수 있으려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목적한 바를 실현할 수 있는 일정정도의 능력 즉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가 필요하다.

정의는 위에서 본 것처럼 바로 이런 적극적 자유까지 요청한다. 50년마다 자기 땅의 사용권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희년을 선포할 때 하나님은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고 하셨다(레 25:10).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복시켜주시기 원하는 자유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뿐 아니라 자기 땅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즉 적극적 자유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예수님도 같은 맥락에서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하심으로 포로 되고 눌린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메시아로서의 사명임을 분명히 하셨다(눅 4:18).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정의의 이름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하여 일정 수준의 경제적 평등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유에 반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평등의 요구가 법적 제재를 통해 지나친 개인의 이기적 욕망의 추구를 일정 정도 제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문제는 평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모르는 자유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니가 잘 지적한 것처럼 사실 자유가 사회에 일반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도 언제나 각 개인 특히 강한 자의 자유는 평등이라는 잣대에 의하여 법적으로 일정 정도 제한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자가 자신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강제력을 이용해 군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힘을 동반한 적극적 자유가 사회에 일반적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평등의 이름으로 개인의 이기적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반대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적극적 자유의 확보를 위해 정의가 요청할 수 있는 경제적 평등에 한계는 없는 가라는 질문을 간과할 수 없다. 지나치게 평등을 추구하다 보면 자유와 치명적으로 부딪힐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동구사회주의 국가는 권력집중현상으로 말미암아 자유가 무너지고 결국 정치경제 체제 자체가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가 요청하는 평등의 내용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3.1.2.2. 정의가 요청하는 평등

정의와 평등을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시킨 사람은 바로 바울이다. 한편으로 바울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 헌금하는 것을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표준새번역, 고후 8:13~15)

‘평형’으로 번역된 ‘ijsovth"’란 헬라어는 ‘동일, 공평, 평등’(equality)이란 뜻을 갖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으로 평등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겐 이웃의 필요를 채워줘야 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똑같은 행위를 바울은 정의란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것은 성경 말씀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로우심이 영원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해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서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표준새번역, 고후 9:9~11)

9절은 시편 112편 9절를 인용한 것인데 의로우심은 히브리어로 ‘hq;d;x];,’이고 헬라어론 ‘dikaiosuvnh’로 되어 있다. 10절의 의는 역시 ‘dikaiosuvnh’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정의로 이해함으로써 구약에서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평등과 정의가 같은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정의는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평등의 원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가 요청하는 평등의 한계는 무엇인가? 센이 잘 지적한 것처럼 평등에 관한 논쟁을 평등 ‘옹호’론자와 평등 ‘반대’론자의 싸움으로 보면 핵심 주제를 놓치는 셈이다. 소득평증주의자든, 고전적 공리주의자든, 순수한 자유주의자든 자기 나름대로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평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요는 ‘무엇에 대한 평등을 요구하는가’에 있다.

이기심과 죄가 없는 이상적 세상을 가정하고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평등은 소득과 부의 평등한 분배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헬러는 흥미 있는 주장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결합된 사회에선 각 개인이 사회에 진입할 때는 경제적으로 평등하고 나올 때는 불평등하다. 즉 사회진입 시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그러나 그 재능을 발휘한 노력에 대한 보상은 각기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헬러는 평등과 불평등의 순서가 뒤집어져야 한다고 본다. 사회에 진입할 때는 불평등하고 나올 때는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들은 저마다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재능을 발전시켜나가는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각 개인에게 불평등하게 자원을 배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재능을 개발하고 사용한 것에 대한 보상은 같아야 한다. 왜냐하면 각 재능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헬러의 평등과 불평등 사상은 타락하기 이전의 세상 혹은 구속받은 다음 절대 다시 죄를 짓지 않는 세상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자유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곧 인간이 평등한 존재인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이 진리를 재확인해 준다(갈 3:28). 바울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은사들이 평등하게 소중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전 12:13~27). 칼빈의 경제윤리에 있어서도 인간의 평등사상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만일 이렇게 평등한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여 건강한 자아성취와 이웃사랑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그 결과로 평등한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타락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완벽하게 죄를 극복할 수 없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실성과 세상에서의 현실성 사이에서 평등의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은 좋은 도움을 준다. 그의 정의론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발전시켜나간다면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동체성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정의가 요청할 수 있는 평등의 한계점에 대하여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논문의 지면상 롤즈의 정의론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결과만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

1. 시민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모든 구성원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2. 민주적 참여를 확보하기 위해 평등한 기본권과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는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3. 사회적 지위와 직책을 얻는 데 균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와 아울러 본인이 속해 있는 기관 내의 경제적 결정과정에 참여 할 수 있는 균등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4. 사회의 모든 조직체의 구조가 공공협력을 유도해 낼 수 있는 방향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5. 사회적, 경제적 불균등은 다음의 조건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첫째, 그 불균등이 가장 불리 한 입장에 있는 계층에게 최대의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이는 정당한 저축의 원칙과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의 정의론에 입각하여 보면 정의가 요구하는 경제적 평등에는 4단계 혹은 차원이 있다. 첫째, 기본적인 필요에 대한 평등한 권리의 보장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본다. 둘째, 사회적 지위와 직책을 얻는 데 균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이 역시 성서적 경제정신에 합치한다고 본다. 위에서 언급한데로 구약의 안식년에 빚을 탕감해 주는 것(신15:1~3), 특히 희년에 땅을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것(레 25:8~13) 등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세대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좋은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셋째, 가장 불리한 계층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조건하에서만이 경제적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그 사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한다(마 25:31~46, 렘22:16). 그러므로 프레스톤이 주장한 것처럼 ‘기독인에게 있어서 거증의 책임은 불평등에 있는 것이다’. 넷째, 가장 불리한 계층의 자기 존중감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일정한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절대적인 차원에서 경제적 소득이 증가한다고 해도 불평등이 너무 심화되면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정의가 요청하는 자유와 평등의 관점에서 한미FTA를 평가한다면, 그리스도인은 한미FTA로 말미암아 더 심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외면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병폐가 국경을 뛰어 넘어 더 고차원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저지해야 할 것이다.

해방신학자 E. 듀셀은 대자본가들이 정부를 등에 없고 국가 간 경제동맹을 맺어 죄를 확대해 가는 것을 이사야 30장 1절에 빗대어 ‘죄에 죄를 더하는 것’(adding sin upon sin)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적절한 분석이다. 죄란 가장 본질적인 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죄는 인간집단들 간의 수평적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정치․경제적 영역에서 그 흉악한 정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은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그러한 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줄 수 있어야 한다. 사회와 국가가 그 죄에서 떠날 수 있도록 외쳐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양극화 현상을 정당화하며 추동해가고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문제점을 밝혀내야 한다.(계속)

박득훈/ 언덕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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