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득훈 강해] 행복한 가정의 탄생[뉴스앤조이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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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8-04-30 11:00 / 조회 4,919 /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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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득훈 | ![]() |
본문: 창세기 2장 18~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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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면 우리의 소원대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 ||
어떻게 하면 우리의 소원대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본문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가족관계 중에서도 남편과 아내 즉 부부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고자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이 관계에 주목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부부 사이가 건강하고 행복할 때 자녀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정이 어떤 의도로 어떻게 탄생되었으며, 가정의 행복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부사이의 행복을 먼저 회복할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1. 가정은 하나님의 소중한 창작품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을 읽어 볼까요?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아담)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게 된 시발점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최초의 가정은 하나님이 직접 고안해낸 창작품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창조의 순간입니다. 그 자체로서도 사람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마음에 안 드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가 홀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것이 가정 탄생의 기원입니다.
현대가정의 부부들이 가정 문제를 쉽게 갈라섬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을 외면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대체적으로 가정이란 단순히 개인적 편의에 의해, 혹은 사회적 관행과 관습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가정을 바라본다면 가정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내어야만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갈라서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것이라는 결론에 상대적으로 쉽게 도달하게 됩니다.
물론 이혼함으로써 일정 정도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최악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선을 놓치고 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부관계와 가정은 하나님의 창작품이기에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어이 부부관계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그런 결의를 한다면 그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해결책들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신앙적 노력들을 기울이게 될 겁니다. 상대방의 변화만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변화를 일구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었다 살아나면 더 이상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하셨는데(막 12:25) 그렇다면 결혼과 가정의 가치도 그 만큼 축소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하여 로드니 클랩이라는 분이 <사람을 위한 영성>(IVP, 2006)이란 책에서 흥미 있는 해석을 합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결혼의 핵심은 자녀를 낳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면 모두 영원히 살기에 자손을 더 이상 낳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 결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남녀 간의 친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 후에도 남성은 남성으로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성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천사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도 이 땅에서의 결혼과 가정의 가치는 결코 감소되지 않습니다. 부활에 이르기 전 미리 사랑을 배우고 키워나갈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훈련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가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가정 밖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쉬울 수 있습니다. 늘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잘 눈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경우 전혀 다르죠. 배우자는 늘 만나고 봅니다. 일상 속에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목격합니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도 발견합니다. 그에게서 새롭고 흥미로운 점을 찾지 못해 권태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우자를 사랑할 때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상대를 내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만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일단 내 손아귀에 들어오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용하는 것이죠. 바로 그런 점에서 가정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을 익혀나가는 최고의 훈련장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창작품인 가정을 더욱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할 수 있기 바랍니다.
2.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평등한 존재입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의 기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는 바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실 때, 사람은 아담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도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도 사람은 아담입니다. 그런데 이를 부연 설명하면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자카르’와 ‘네케바’란 단어를 각각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남자를 지칭하기보다는 사람 일반을 의미합니다. 물론 아담이 남성 명사이기 때문에 남자라고 추측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에서 볼 때 그냥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보입니다. 그리고 그 기원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한 존재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최초에 창조된 존재는 남자(즉 자카르나 이솨)가 아니라 사람(아담)입니다. 왜냐하면 남자를 의미하는 이솨와 여자를 의미하는 이쉬가 처음으로 쓰인 순간은 최초의 사람(아담)이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신 여자를 보았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아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이솨)에게서 나왔으니 여자(이쉬)라고 부를 것이다.”
적어도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차원에서 남자와 여자가 나눠진 것은 바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 동시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이 최초로 만든 인간을 이솨 즉 남자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원의 측면에서 볼 때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평등한 존재임을 넌지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 8~9절이나 디모데전서 2장 13절을 보면 좀 당혹스럽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고 나중에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남녀 사이의 질서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도 성경전체의 흐름 속에서 균형을 잡아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1~12를 볼까요?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생겨났습니다.” (고전 11: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을 언급한 직후 바울 자신이 균형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나왔다고 말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님에게서 생겨났다는 점임을 강조합니다. 그 기원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임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21절에서 부부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의 대전제를 선언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이어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상위에 있는 원칙은 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남편과 아내는 근본적으로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죠. 다만 당시 남성우월주의 문화에서 복음을 전하려 하니 일정 정도 양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녀의 근본적 평등은 여자를 ‘돕는 사람’, ‘그에게 알맞은 짝’으로 규정한데서도 드러납니다. 돕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에제르’인데 후대의 시인은 하나님을 바로 우리의 도움 즉 ‘에제르’라고 고백합니다(시 33:20). 돕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에게 알 맞는 짝’은 히브리어로 ‘네게드’인데 부사로 ‘정면에’ ‘맞은편에’ ‘반대쪽에’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나가드’란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나가드’의 본래 의미는 ‘정면에 두다', 즉 반대편에 담대하게 서다’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다, 알리다, 선포하다, 설명하다’라는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김회권 교수는 여자의 정체성을 ‘마주 보고 서 있는 도움의 짝’, ‘아담과 다르게 보는 관점을 가지고 아담을 돕고 보충하는 짝’으로 해석합니다. 원어에 담겨있는 평등성을 잘 반영한 해석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남성우월주의 유산을 훨훨 털어버릴 수 있기 바랍니다. 물론 성적 정체성에 따른 자연스럽고 건전한 역할 분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남자는 대체적으로 여자보다 육체적으로 더 힘이 세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도맡아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여성만이 아이를 잉태하고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직된 사회관행이나 관습에 따라 이것은 남자가 할 일, 저것은 여자가 할 일로 절대적으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부부가 서로의 은사와 성품을 잘 이해하여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역할 분담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일을 해도 남자가 여자보다 더 대우와 인정을 받는 것은 더더구나 극복되어야 할 일입니다. 남녀평등에 대한 이해가 부부사이에 공유되면 불필요한 갈등이 많이 해소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훈련을 잘 쌓아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3. 부부는 진실하게 사랑하고 연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진실하게 사랑하고 한 몸으로 연합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 의도는 여자의 창조 방법에서 잘 드러납니다. 왜 하나님은 여자를 첫 사람처럼 독자적으로 흙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첫 사람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내 그 것으로 만들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을까요? 그 의도는 그 첫 사람이 하나님이 새로 만드신 여자를 보면서 한 고백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고백을 읽어볼까요?
“그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창 2:23)
그는 여자에게서 너무나 깊은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녀가 자기 몸의 일부였음을 기억하고 그녀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합니다. 자기를 이솨로 인식하면서 그를 여자 즉 이쉬라고 부릅니다. 즉 그는 그녀와 깊은 연대감을 느끼면서도 그녀를 자기와는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합니다. 이를 보고 하나님은 너무 기쁘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대신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혼을 선언합니다(창 2: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어 저자는 막 결혼한 신랑신부의 순수하고 행복한 모습을 묘사합니다.(창 2:25)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아담처럼 사랑고백을 늘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담의 사랑고백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조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녀가 아름다운 몸매,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S라인을 갖고 있는가 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똑똑한 여자인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정 배경, 학력 뭐 그런 것들은 따질 것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외적 조건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뼈가 내 뼈요 그녀의 살이 내 살이라는 점이 그렇게 중요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는 하나님이 만드셔서 나에게 데려온 존재라는 점이 소중했습니다. 이제 배우자를 보면서 외적 조건을 따지지 맙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점으로 그를 봅시다. 그가 나와 하나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가 하나님이 나에게 짝 지워주신 존재라는 점을 붙듭시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진심어린 사랑고백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둘째,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물론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거나 공경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의존적인 존재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될 때 가까운 친지들 사이에 생기는 불필요한 갈등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는 인격적인 연합과 육체적인 연합이 서로 잘 조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둘이 불균형을 이룰 때 부부사이는 불행해집니다.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한 깊은 대화를 통해 정신적으로 하나 되는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한 몸을 이루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여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행복이 더욱 깃들길 축원합니다.
박득훈/ 언덕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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