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호윤 칼럼] 교회는 진정 믿음의 공동체인가 [뉴조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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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7-06-08 19:50 / 조회 4,985 /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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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들과 같이 고민하고 씨름하고 기다리는 과정 있어야
2007년 06월 06일 (수) 최호윤 집행위원
교회(敎會)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교회가 진정 믿음의 공동체인가? 교회의 방향설정과 의사결정은 공동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주일날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같이 밥 먹고 헤어진다. 마치 우리가 특강을 듣고 끝나면 다른 수강생이 누군지 관심 없이 뿔뿔이 헤어지고, 일반 식당에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더라도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식사만 하고 헤어지는 것과 같이.
공동의회가 열리더라도 많은 교인들은 회의 내용에 대하여 고민하기보다 자리만 채우고, 시간만 채우고 빨리 끝나기를 기다린다. 무언가 같이 고민하고 상의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 된 지체들의 관계인가?
공동체를 한 몸(one body)의 지체(parts) 관계의 연결로 본다면 현대 교회에서 공동체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많은 대형 교회 심지어 중소형 교회에서조차 교인들은 교회에 손님으로 왔다가 차려진 밥상이 시원찮으면 직접 밥상을 차리기보다는 또 다른 밥상(?)을 찾아서 방황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방랑하는 교인의 책임으로 규명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공동체성에 기반을 둔 자주성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모든 일을 소수가 결정하는 교회
교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서로의 의견에 차이 나는 원인을 조정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인정하지만, 많은 교인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서로 조정하자면 1) 서로 다른 의견을 설명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2) 발생할지 모르는 교회 방향성의 왜곡에 대한 부담도 있고, 3) 공간과 시간의 현실적인 제약을 이유로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소수의 결정을 따라 교회의 의사는 정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선 공동체의 실질적인 구성원인 일반 교인들은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가지거나 기존의 생각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더라도 교회에 불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포기하거나 의견을 개진하더라도 ‘뭘 모르고 하는 소리’로 묵살된다. 그래서 공동체 의사결정과정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 교인들은 공동의회나 제직회에서 생각이 다르더라도 벙어리가 되거나 교회의 의사결정과정을 주도하는 특정인(담임 목회자 또는 소수가 지배하는 당회)의 생각에 따른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을 둔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공동체성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효율성(공의)만을 중시하였다면 인간들은 그 죗값으로 이 땅에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효율성만을 강조하지 않고 사랑으로 인간들과의 공동체성을 회복하셨다.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공의차원을 넘어선 사랑으로 인간들을 감싸 안으신 것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사실’만큼 우리에게 공동체의 필요성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없다.
민주적 절차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공동체성은 창조주가 스스로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해결하셨고 남은 것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세우기를 개대하신다. 그래서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하여 섬기라 하셨고 그 다음의 둘째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창조주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새 계명을 제시하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피조물들에게 요구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리신 것같이 우리도 지체들 간에 서로 기다리고 이해하며 조정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직접적으로 교회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채택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이 요구하신 공동체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민주적인 절차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분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이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사랑으로 기다리면서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과 같이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려면 조금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서로가 다른 점들을 고민하고 씨름을 하면서 맞추어가고,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민주적인 절차는 뛰어난 철인(哲人)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조정하면서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설사 교회 공동체의 결정이 제3자가 보기에는 비효율적이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같이 공감하면서 같이 이겨나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요구하신 새 계명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고,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최호윤/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회계사
지체들과 같이 고민하고 씨름하고 기다리는 과정 있어야
2007년 06월 06일 (수) 최호윤 집행위원
교회(敎會)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교회가 진정 믿음의 공동체인가? 교회의 방향설정과 의사결정은 공동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주일날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같이 밥 먹고 헤어진다. 마치 우리가 특강을 듣고 끝나면 다른 수강생이 누군지 관심 없이 뿔뿔이 헤어지고, 일반 식당에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더라도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식사만 하고 헤어지는 것과 같이.
공동의회가 열리더라도 많은 교인들은 회의 내용에 대하여 고민하기보다 자리만 채우고, 시간만 채우고 빨리 끝나기를 기다린다. 무언가 같이 고민하고 상의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 된 지체들의 관계인가?
공동체를 한 몸(one body)의 지체(parts) 관계의 연결로 본다면 현대 교회에서 공동체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많은 대형 교회 심지어 중소형 교회에서조차 교인들은 교회에 손님으로 왔다가 차려진 밥상이 시원찮으면 직접 밥상을 차리기보다는 또 다른 밥상(?)을 찾아서 방황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방랑하는 교인의 책임으로 규명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공동체성에 기반을 둔 자주성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모든 일을 소수가 결정하는 교회
교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서로의 의견에 차이 나는 원인을 조정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인정하지만, 많은 교인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서로 조정하자면 1) 서로 다른 의견을 설명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2) 발생할지 모르는 교회 방향성의 왜곡에 대한 부담도 있고, 3) 공간과 시간의 현실적인 제약을 이유로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소수의 결정을 따라 교회의 의사는 정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선 공동체의 실질적인 구성원인 일반 교인들은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가지거나 기존의 생각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더라도 교회에 불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포기하거나 의견을 개진하더라도 ‘뭘 모르고 하는 소리’로 묵살된다. 그래서 공동체 의사결정과정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 교인들은 공동의회나 제직회에서 생각이 다르더라도 벙어리가 되거나 교회의 의사결정과정을 주도하는 특정인(담임 목회자 또는 소수가 지배하는 당회)의 생각에 따른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을 둔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공동체성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효율성(공의)만을 중시하였다면 인간들은 그 죗값으로 이 땅에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효율성만을 강조하지 않고 사랑으로 인간들과의 공동체성을 회복하셨다.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공의차원을 넘어선 사랑으로 인간들을 감싸 안으신 것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사실’만큼 우리에게 공동체의 필요성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없다.
민주적 절차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공동체성은 창조주가 스스로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해결하셨고 남은 것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세우기를 개대하신다. 그래서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하여 섬기라 하셨고 그 다음의 둘째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창조주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새 계명을 제시하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피조물들에게 요구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리신 것같이 우리도 지체들 간에 서로 기다리고 이해하며 조정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직접적으로 교회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채택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이 요구하신 공동체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민주적인 절차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분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이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사랑으로 기다리면서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과 같이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려면 조금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서로가 다른 점들을 고민하고 씨름을 하면서 맞추어가고,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민주적인 절차는 뛰어난 철인(哲人)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조정하면서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설사 교회 공동체의 결정이 제3자가 보기에는 비효율적이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같이 공감하면서 같이 이겨나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요구하신 새 계명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고,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최호윤/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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