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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종국 칼럼] 태초의 비밀을 밝히는 전도서 묵상[뉴조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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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6-03-10 10:37 / 조회 5,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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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국 교수의 '태초의 비밀을 밝히는 전도서 묵상'

백종국/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진주 주님의교회 장로(ucla53)

왜 전도서인가?

말씀의 묵상은 언제나 새롭고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구약의 <전도서>에 대한 묵상은 필자처럼 학문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묘한 흥분과 도전의 원천이다. 특히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펼쳐놓은 해석들이 그다지 유익하지 못하다고 느껴질 때에 신학과는 거리가 먼 분야에 종사하는, 그러면서도 이 책에 큰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비밀을 밝혀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감을 느끼게 된다.

왜 전도서인가? 삶에 지극히 유익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끔씩 나의 바보 같은 행동 때문에 한껏 토라져 있는 처를 달랠 때에 전도서를 사용한다. 인생의 헛된 날이지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 우리의 사는 날이 얼마 되지 않은즉 이 따위 소소한 문제로 하나님의 위로를 아깝게 놓칠 수가 있느냐. 헛된 세상의 일 때문에 한시라도 놓치기 아까운 우리 사랑을 멍들게 하지 말자고 하면 처의 유감이 곧 풀어지곤 한다.

엊그제는 우리 주변에 거주하는 어떤 목사의 못된 행동 때문에 분노에 가득 차 어쩔 줄 몰라 하는 집사를 위로하면서 전도서를 활용하였다. 명백하게 그 목사가 잘못하였다 할지라도 그에게 바로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때와 장소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속해있으며 우리는 겸손히 그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인용컨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또 인용하기를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그리고 위로하기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 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였다. 그 집사의 분노는 다행히 많이 가라앉았다.

요사이처럼 온 나라가 권력을 둘러싼 집단 히스테리에 감염되어 있을 때에 전도서의 묵상은 극히 유익하다. 어째서 인격이 고매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려졌던 사람들조차도 이처럼 납득하기 힘든 말과 행동을 보이고 있는가? 세속의 지도자들은 고사하고 어째서 그토록 부흥과 선교를 외치던 지도자들의 입에서 정치적인 선동과 이데올로기적인 저주의 말들이 쏟아지는가? 주여, 이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

전도서는 태초부터 감추어 두었던 두 가지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책이다. 첫째는 인생 최대의 비밀인 “선물로서의 삶”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우주 최대의 비밀인 “하나님의 병기”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은 첫 번째 비밀에 관한 것이다. 그 비밀을 풀이하자면, 우리의 삶은 모든 차원에서 허무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게 행복의 비결이라는 점이다.

성경의 지혜서 중에서도 특히 전도서는 “신비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전도서의 첫째 특징은 인생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 일관되게 해설하고 있는 지혜서이라는 점이다. “모순”에 대해 서술할 뿐만 아니라, 서술 자체가 “모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매우 난해하다.

둘째는 “계시형”이 아니라 “관찰형”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어로서 “내가 보니”가 마흔 번 이상, “내가 깨달았다”라는 강조가 아홉 번 이상 등장하고 있다. 이는 고린도전서 7장 12절의 경우처럼 이해력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당혹감을 주기도 한다.

셋째는 솔로몬의 역사성 문제이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솔로몬이 노년에 하나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시기에 쓴 문서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겠느냐 하는 의문이다. 이 질문은 마치 솔로몬이 천국에 갔겠는가는 식의 유치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넷째는 심오한 비유와 화려한 수사 그리고 치밀한 논리 전개로 말미암아 해석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필자는 곧잘 잠언이 유치원생용이라면 전도서는 대학원생용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욥기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난해한 “신정론(theodicy)"에 입각해 있다는 점이다. 잘못 해석하면 비윤리적 영지주의에 빠질 수 있다. 역으로 이를 극복한답시고 많은 전도서의 해석들이 쓸모없는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져있음을 보고 있다.

전도서는 허무와 모순에 찬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허무의 이유를 말해주고, 마지막으로는 그 허무에서 벗어나는 방법, 즉 선물로서의 삶을 누리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으랴? 지금부터 그 아름다움에 대해 묵상하고자 한다.

인생의 허무와 모순에 대하여

인생은 허무하며 모순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전도서의 가르침이다. 첫째는 노동이다. 노동은 괴로운 것이면서(1:13) 동시에 즐거운 것이다(3:22). 둘째는 지혜이다. 지혜는 유익하지만(6:11), 동시에 무익한 것이다(2:14). 셋째는 선행이다. 선행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3:12), 의미가 없기도 하다(8:14). 우리의 삶 전체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 좋기도 하고, “산 자 보다는 죽은 지 오래된 죽은 자를 복되다”할 판이니 나쁘기도 하다.

인생의 악함이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한 희망을 가리고 우리의 허무를 더욱 깊게 만든다. 권세자의 학대(4:1)이며, 허무한 것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이며(5:10), 악을 행하기에 담대한 어리석음이며(8:11), 심지어는 스스로 죽을 꾀를 내는 모습(7:29)이 가당찮기도 하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은 만물조차도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의 미친 마음들이다(9:3). 빠른 경주자라 하여 선착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건마는 인간들은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산다. 돈에 미치고, 명예에 미치고, 권력에 미치고, 지식에 미치고, 섹스에 미치고, 이데올로기에 미치고, 심지어는 자식의 일류대 진학에 미쳐서 허위적 허위적 돌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자르고 깎고 헤치고 무너뜨려서 “만물이 피곤함을” 말로 다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자레드 다이아몬드가 그의 이스터 섬 사례연구에서 보여준 바처럼 인간들은 스스로 결국 죽게 될 파국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다.

인생은 왜 허무한가?

인생은 왜 허무한가? 전도서는 이것이 유한한 육체에 깃든 무한한 영혼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유한의 존재 자체가 허무한 것은 아니지만 무한의 그림자에 비추어질 때에 허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모든 차원에서 유한하게 지어졌지만 하나님이 허락한 무한성으로 인해 스스로 허무에 빠질 운명에 처해있다. 유한성이라,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들에 대해 “유한성에 대한 분노”라는 표현을 썼으나 질그릇이 어찌 토기장이에게 항거하겠는가?

인간은 유한하다. 시간에 있어서(3;1), 기억에 있어서(1:11), 호흡에 있어서(3:19) 유한하다. 그러나 인간은 무한한 것을 지니고 있다. 영혼에 있어서(3:11), 지혜에 있어서(2:26), 심지어 욕망에 있어서(5:10) 무한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이 무한은 우리의 모든 유한을 허무하게 만든다. 언제나 현재인 하나님 앞에서 시간의 틀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든 것은 항상 허무하다. 어거스틴의 지적처럼 시간(죽음과 심판)은 이 모든 것을 가로지르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병기이다.

유한한 인간 안에 깃든 무한의 그림자로 인해 발생하는 허무를 솔로몬 왕보다 더 많이 겪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는 인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부귀와 권력과 영광을 누린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무후무한 지혜를 누린 사람이었다(왕상 3:12). 그러나 그는 또한 그의 생명이 끝나면 그의 지혜도 함께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학식, 연구업적, 비밀의 가르침, 그가 발견한 기계, 그가 개발한 경영체계 등 모든 것이 역사의 모래 속에 파묻힐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전무후무한 지혜자라는 사실은 그 이후로 그의 지혜를 계승하고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간이 등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역사의 귀결조차도 잘 알고 있었다.

전무후무한 지혜자이므로 미래의 모습도 충분히 예견되었을 것이다. 그가 벌인 사업들의 정치적 결과가 어떠할지도 알고 있었고, 그의 왕위 계승자인 르호보암의 인물됨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노안에는 그가 정성을 들여 금으로 치장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는 모습과 눈을 뽑히고 착고에 차여 끌려가는 어리석은 후손들의 모습이 회한의 눈물 속에 비쳤을 것이다.

그 위대한 솔로몬조차도 이러하거늘 그의 발꿈치도 따라가기 힘든, 벌레 같은 우리들이 무얼 한답시고 제법 객기를 부리는 모습이 하늘에 계신 이가 보시기에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1)

전도서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바로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동기를 결과와 연결시키지 말고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라고 전도자는 충고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모순들을 해석한 결과이다. 예컨대 “지혜는 유업 같이 아름답고” 좋다. 그러나 지혜자나 우매자나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깨달아야 한다. 우선 죽음에 있어서 일반이며 그리고 그 행위의 보응을 받음에 있어서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동일하게 임하기 때문이다.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항상 기계적으로 동시에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악의 결말을 기계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라면 이 이성조차도 시간의 틀에 얽매여 있음을 깨닫는 이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인생의 행복은 아무데도 없는 것일까? 인생은 단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분복(lot, 헤레크)”을 누릴 때에 행복하다.

우선 크든 작든 자신의 직업에서 행복할 수 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많든 적든 자신의 소유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면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분복이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놀라운 일은 인생의 직업과 소유와 가정은 인간이 죄를 범하기 이전 에덴동산에서 부터 있었던 것들이라는 점이다(창 1:18-30). 이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은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창 1:31). 노동이 저주인가 하는 문제는 오래된 토론이므로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다. 단지 필자는 노동이 본래 축복이었으나 죄를 범하므로 저주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존 스토트의 주장에 한 표를 행사하고 싶다.

인생의 삶이 선물이라고? 나에게 삶은 저주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삶은 당신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고난이다(2:23). 그러나 이 고난이 끝날 때가 있다는 전도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3:4). 우리가 생전에 볼 수도 있고 못 볼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면 더 큰 위로가 된다(3:17, 11:9, 12:14). 우리의 고통을 서로 나눔으로 고통의 무게를 줄이고 절망이 차지할 기회를 박탈할 수 있다(4:10). 그러므로 고난조차도 행복하다.

무엇보다도 네 자신을 알아야 한다. 욥이 깨달았던 것처럼, 미물보다 못한 네가 너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피조물 됨을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가지를 범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빠져드는 썩은 늪과 같은 인간 사회를 보고 손뼉치며 즐거워하는 사탄의 존재에 항상 주의해야한다.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2)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 모든 (허무한)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첫 단계이다. 그는 만물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3:14, 7:13, 8:17). 그의 뜻을 인간이 다 알 수 없다(7:14, 8:17). 이 점을 알아야 한다.

그 분이 인간에게 복을 주셨다. 만물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3:11), 인간을 정직하게 지으시고(7:29), 선물(분복)을 주어 즐기게 하셨다(3:13 등). 더 이상 인간들이 그에게 요구할 게 무엇인가? 만물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 말씀은 참으로 아릅답다. 진리를 탐구한답시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철을 따라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과 나무들을 창가에 스치는 파노라마 정도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학자란 인간들은 아름다운 초원에서 건초더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망아지와 같은 신세라는 괴테의 빈정거림이 뼈아프다. 아마 돈에 미쳐, 권력에 미쳐, 이데올로기에 미쳐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유감이 있을 것이다.

종말에 심판하실 것이라는 약속 또한 삶이 선물이라는 말씀을 더욱 빝나게 한다. 종말이 있다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람들에개 서로 다르게 다가간다.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허무의 뿌리이다.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결국 모든것을 완성시키는 축복의 약속이다. 모두에게 주어지면 무슨 선물이랴? 언제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선물이랴?

그러므로 우리는 합당한 방식으로 그를 경외해야한다. 그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을 받아들린다면 그대로 행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오시는 분 앞에서 우리가 표리부동 할 수 있을까? 정직한 그리스도인은 경배의 기본이다. 물론 전도서는 우리가 그에게 돌려드릴 합당한 경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는 그를 가까이하여 말씀을 청종해야 한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 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도리어 제사를 빙자하여 저주와 포악을 남발한다면 도대체 그의 진노를 어떻게 피할 셈인가?

둘째는 우리의 말을 조심해야 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특히 정치적 히스테리에 싸여 온갖 소리를 다하고 잇는 몇몇 목사님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마땅히 말을 적게 하라. 꼭 정치적으로 해야 할 말이라면 설교의 형식을 빌리지 말고, 교회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예배당에서 하지 말고 그러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에 합당한 자리를 찾아 발언하는 게 온당하다.

교회개혁의 길에 선 사람으로 날마다 반성이 없을 수 없다. 혹시 나의 말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그 분의 마음에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가? 그보다 더 큰 것들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나 않은가? 한시라도 그를 경외함에서 벗어나고 있지나 않은가?

셋째는 선을 행하라는 그의 말씀에 유의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는 게 좋다. 물론 그 선 자체도 유한하며 헛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 의지하여 행하면 무한의 은총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이는 선물로서의 삶을 통해 허용해주신 가장 큰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무리하면서

말씀의 묵상은 특별한 형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무리로 앞의 내용을 정리하는 게 좋을 성 싶다. 인생은 그 존재의 본질 때문에 허무하다. 유한한 육체에 깃든 무한한 영혼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가 선물로 주신 삶을 누리는 일이다. 또한 그를 진심으로 경외하므로 우리는 이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지혜의 근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생을 정직하게 지으시고 온갖 아름다운 것을 주셨으나 인간들이 스스로 미쳐 돌아가므로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이쯤에서 진짜 마무리로 전도서의 에센스를 말고 싶다. 그것은 '이러한지혜조차도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2006년 03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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