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민병일 칼럼]뉴튼의 운동법칙으로 본 한국 개신교[뉴조07/19]
페이지 정보
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5-07-20 11:41 / 조회 4,977 / 댓글0본문
뉴튼의 운동법칙으로 본 한국 개신교 |
한국 교회가 안고있는 부정적 측면을 뉴튼의 운동법칙으로 살펴보자 |
|
민병일(jubilmin) jubilmin@chol.com |
|
|
연일 계속되는 한국 개신교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런
문제점들이 왜 근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이 되어가는지 그리고 이런 현상들은 어떤 원리에서 작동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기복신앙, 맘모니즘, 담임목사 우상화, 교회내 재산권 다툼, 비민주적 교회정치 등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부정적 측면과 부패에 대해 뉴튼의 운동법칙을 통해 그 작동의 원리를 한번 살펴 보고자
한다. 뉴튼의 제1법칙(관성의 법칙) 뉴튼은 갈릴레오의 생각을 정리하여 제1법칙을 만들고 이를 관성의 법칙이라 하였다. 즉 정지하고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지점을 향하여 달려 나가다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정지선을 발견했을 때 즉시 정지하려고 해도 관성 때문에 정지선을 서너걸음 벗어나서 정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을 누구나 한 두번은 했을 것이다. 반대로 정지하고 있는 물체를 갑자기 움직이려 하면 잘 움직여 지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을 갖고 서서히 움직일때 비로서 물체가 움직이는것 또한 경험적으로 한번씩은 있을 것이다. 즉 관성의 법칙은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하고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판단하기 곤란하나 물질의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압도하던 조국근대화의 과정에서 거제 헌물의 하나인 십일조를 만복의 근원으로 강조하고 강제하던 무렵부터 타락과 부패가 교회 내에 만연되기 시작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대부분의 양식 있는 교인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오늘날 거제는 드리지 않으면서 그리고 신학적으로 조금만 차이가 나도 서로 분파하여 무수한 교단을 만들면서도 유독 십일조에 대해서 만큼은 각 교단이 일치단결하여 부활시켜 놓고 폐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아 마지막 제물을 드림으로써 제사가 폐하여 졌고, 제사장도 없어졌으며, 레위인도 지금은 이스라엘에서조차 그 혈통을 찾기 힘들어 졌음에도 그리고 구약의 그 무수한 율법들은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유독 십일조만은 살려내어 복과 저주의 근거로서 강단에서 설파되며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 오늘도 교회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십일조의 강제를 통해 쌓은 부가 십일조 정신대로 쓰임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부동산 투기와 목회자의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교회분란의 원인이 되어 목회자가 예배당을 팔아 치우고 야반도주를 하는 지경까지 이르는 현실과 은퇴목사와 신임목사 사이의 끝없는 기득권의 주장으로 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현상은 모양만 다르고 언론에 다 보도되지 못해서 그렇지 지금도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 아닌가? 교회가 헌금이나 연보를 고아와 과부 등 이웃을 위한 성경의 정신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의 삶대로, 가르침대로 사용하여 왔다면 오늘날 교회가 가난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유한 대형교회들이 이처럼 많이 늘어 났다는 말인가? 한국 개신교는 관성력에 의해 정지선을 지키지 못한 좋지 않은 관행이 지속되어 왔음을 우리는 교회 주변의 환경을 통해 익히 보아왔다. 분명히 성경에서 벗어나고 예수님의 온유함과 청빈함 그리고 희생정신과는 상관없는 자들이 스스로를 예수의 제자로, 주의 종으로 사칭하며 강단에서 진실이 호도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기존의 관성에 의해 아무 문제의식 없이 '아멘' 만을 되풀이 하고 있다. 즉 관성의 법칙에 따라 교회의 비리와 부패는 성경과 상관없이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 그대로 계속해서 진행하려 하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교인들은 늘 그렇듯이 그 자리에서 계속 머무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 관성력이 좋지 못한 모습으로 교회에서 계속해서 작용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동안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잠복시켜 버린 교회내 제반 문제점들이 계속해서 상존하고 있다면 한국 개신교는 그 올무에 발목이 잡혀서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어느 조직이나 단체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처음에는 극소수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전체가 매도 당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만연되어 오히려 사회 전반이 부패해 가는 것 처럼 교회도 처음에는 작은 사건으로부터 그리고 소수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교계 전체의 일처럼 매도 당하다가 나중에는 만연되기 시작해서 종국에는 교회의 구성원 자체가 그것이 부패요 타락인지도 모르는 채 관성에 의해 계속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주변환경이 급속히 변화되고 있음에도 지난날의 관행에 젖어 관성의 또 다른 성질처럼 조금도 변화됨이 없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려는 목회자나 교회내 직분자들을 볼 때 마다 교회개혁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뉴튼의 제2법칙, 가속도는 작용한 전체 힘에 비례하며 질량에반비례 한다 어떤 수레위에 300Kg쯤 되는 무게의 물체가 있는데 이것을 혼자서 갑자기 세게 밀면 꼼짝도 안하는데 시간을 갖고 서서히 밀면 잠시 후에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즉 가속도가 작으면 힘 F값이 작아서 움직이기 쉽다. 그러다가 점차 속도가 빨라지고 나중에는 상당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빠르게 움직이려 하면 가속도 a값이 커서 힘 F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기에는 너무 벅차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 개신교가 관성의 법칙에 따라 변화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시대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뉴튼의 제2법칙이다. 변화와 개혁은 처음부터 세게 밀어 부치면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을 갖고 서서히 밀어 부치면 결국 교회는 변화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제는 a값이 크면 그만큼 F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혁을 향한 몸부림을 처음부터 크게 할 경우에는 많은 힘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를 필요로 하지만 그 변화는 템포가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뉴튼의 제3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즉 어떤 물체를 밀어서 움직이려고 하면 히므이 크기는 똑같고 방향이 반대인 상대적인 힘이 발생한다는 것. 즉 내가 누군가를 한대 때릴 때 상대가 받는 타격의 힘 만큼 내 주먹에도 동일한 상대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고무보트를 타고 상대편의 고무보트를 삿대로 밀 때 내가 탄 고무보트도 동일하게 뒤로 밀리는 현상을 체험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뉴튼의 제3법칙을 다른 말로 하면 심는대로 거둔다. 즉 행한대로 받는다는 의미가 적절할 것이다. 내가 한 행위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는 쌍방적 관계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내가 한 행위가 좋든 나쁘든 10이라는 행위를 상대에게 했다면 나도 반드시 10이라는 결과물을 되돌려 받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여느이 법칙이다. 한국 개신교는 되돌아올 반작용을 염두에 두고 작용을 올바로 행사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개신교가 철저한 반성과 회개 없이 부패와 스캔들의 가속도를 더해 간다면 한국 교회는 반작용에 의해 필연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가르침과 몸소 행하심에 있어서 청빈과 이웃사랑을 실천하신 분이다. 한국 개신교가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더 이상 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복음시대에 근거 없는 십일조 타령을 더 이상 교인들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 토지에서 나는 산물과 축산물로 드려지던 십일조가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 나그네들에게 나눠지던 그 정신은 어디로 가고 어떻게 해서 이름만 살아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처럼 정작 쓰여져야 할 곳에 쓰여지지않고 십일조 창고를 비어버린 제사장들처럼 엉뚱하게 쓰여지고 있는가? 복과 저주의 십일조를 함부로 부활시켜 정신을 훼손시키고 그 물질을 전용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아직도 강단에서 복과 저주를 운운하며 십일조를 강제하는가? 한국 개신교가 물량적으로 사이즈가 늘어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며 진정한 부흥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교회 성장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한국 개신교가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분규에 분규를 거듭하는 이유가 바로 물신주의로 인한 기득권의 다툼은 아닌지 다시 한번 냉철히 생각해 보자. 개신교의 잘못된 관행이 계속해서 관성력을 유지한다면 그리고 작용점이 올바르지 않다면 반작용은 작용과 동일한 힘으로 개신교 쇠락을 가속화 시킬 것이다. 민병일/ 숭사리교회개혁포럼(http://cafe.daum.net/soongsari) |
|
2005년 07월 1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