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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강창수 칼럼]'유교적 목회'유행하려나[뉴조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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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5-08-24 16:23 / 조회 5,150 /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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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목회' 유행하려나
담임목사 되면 흠 없고 무결한 사람인 양 행하는 세태

장창수(rassvet) lyuboph@hotmail.com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별개라고 이해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다. 교회에서 다수결에 의한 투표 결과가 목회자의 생각과 다를 경우 교회가 분열될까 걱정해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각 교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어느 하나를 결정하여 투표하도록 했다면 목회자도 이에 따라야 한다. 성령은 목회자 마음에만 임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 제비뽑기가 있었고 모든 교인들은 자신들이 참여한 제비뽑기를 통해 나타난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그대로 승복하고 받아들였다.

또 하나, 목회자들과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동급'으로 보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그러나 오늘날의 목회자는 초대교회 사도들과 같이 오류에서 항상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 목회는 잘못 할 수 있고 이에 대해 견제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는 불경죄를 범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목회자가 완전무결하여 교회 지도자로 그를 초청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영적 자질과 인격이 교인들보다 앞서기 때문에 지도해 주십사 초청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담임목사 또는 위임목사만 되면 완전무결한 목사처럼 행동한다. 한국 교회에 비민주적인 유교적 목회관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증거다. 이것은 구약 시대부터 비성경적이었다.

남방 유다에서 선한 여호사밧 왕이 통치할 때 아합은 22년간 북방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러나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섬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 농업 신 바알을 섬겨 숭배했다. 그는 여호와 신앙을 스스로 버려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왕상 16:29~31).

어느 날 그는 자기 왕궁 근처에 있는 포도원을 소유하여 나물 밭으로 만들고자 그 주인 나봇에게 포도원을 다른 밭과 교환하거나 팔 것을 제안했다. 이때 나봇은 당당하게 아합 왕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 21:3). 이를 들은 아합은 마음이 답답하여 침상에 누워 음식을 들지 않았다. 이 이유를 들은 왕비 이세벨은 아합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왕상 21:7). 그리고 나봇을 인민재판에 올려 증인을 세워 거짓 증언케 하고 돌로 쳐 죽였다(왕상 21:13). 그렇게 아합은 값도 치르지 않고 나봇의 포도원을 얻었다. 이로 인해 아합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왕상 21:19).

'도'에 어긋나면 따져라

아주 재미있는 사실은 한 나라의 왕인 아합이 평민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거나 교환하자고 제안했을 때 나봇이 당당하게 왕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동양의 문화권에선 이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왕에게 거절하는 것은 목숨을 건 아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봇에게 무슨 막강한 힘이나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이 거절을 들은 한 나라의 주권자인 아합도 어쩌지 못하고 고민하고 침상에 누워 침식을 거절했다. 동양인의 사고로는 이것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나봇을 왕 앞에 당당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평민의 거절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왕은 고민해야 했는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각 가문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다. 이들의 땅은 인간 왕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며 출애굽의 하나님인 여호와로부터 받은 기업이며 권리였다. 그러므로 어느 인간도 이 기업과 권리를 강제로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도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명했다. 그리고 이를 지킬 것을 이스라엘은 '아멘'으로 하나님께 답했다(신 19:14, 27:17).

이스라엘인인 나봇과 아합은 어릴 때부터 이 율법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민 나봇은 일국의 왕에게 당당히 거절할 수 있었고, 이에 아합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구약 시대 즉 BC 8백년 전 일이지만 선민 이스라엘에는 일반 백성도 왕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요구나 일을 하면 당당히 따질 수 있었음이 증명된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법 위에 존재할 수 없고 일반 백성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결국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법치(法治)가 이미 실현된 그 당시 나름의 민주주의 나라였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의 법을 예외 없이 지켜야 했다. 탈법적이거나 초법적인 왕의 행위는 즉시 선지자의 공격을 받았고 그 결과 왕은 견제되어 전제 정치나 독재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선진화된 나라였다.

그러나 아합 당시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의 왕은 늘 법 위에 존재했다. 왕은 자신이 만든 종교의 교주였고 동시에 통치자였다. 아니면 종교는 늘 왕의 정치를 돕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왕은 법 위에 존재하여 마음대로 나라를 통치했다. 이런 통치를 우리는 덕치(德治)라고 부른다. 나라의 통치가 왕의 불완전한 인격과 덕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이세벨은 왕의 이런 통치에 익숙한 공주였다. 시돈의 왕인 그녀의 아버지 엣바알은 절대 왕권을 소유하여 하고 싶은 대로 백성에게 행했고, 이에 백성은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은 목숨을 잃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임을 상기시키고 뭐 그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냐고 자기 남편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세벨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음모를 꾸며 나봇을 죽였다. 나봇의 죽었음을 안 이세벨은 남편 아합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어나서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포도원을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왕상 21:15).

맹신을 요구하면 망할지니

다른 한편 북방 이스라에르이 아합 왕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 예수님을 알고 믿지만 결국 마음의 탐심을 따라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을 버리고 우상 종교 방식으로 교회의 왕 노릇한 목회자를 지칭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즉 성경 말씀이 분명히 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자기 유익을 위해 마음대로 양들을 먹이고 치는 목회자들은 어느시대에나 존재한다. 이들은 신자의 건전한 비판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위협하며 교인들에게 맹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앞에 이들은 모두 망한다.

위의 사건들을 보면서 한 나라의 종교가 그 나라의 정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을 본다. 종교가 가르치는 바에 의해 형성된 사고방식이 개인 삶과 그 사회의 사고를 형성하고 이것이 정치사상에 영향을 미친다. 즉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종교적 신념은 개신교 나라에서 더욱 민주주의가 발전하거나 정착하게 됨을 볼수 있다. 그러나 우상 종교나 그와 비슷한 기독교는 결국 권력자의 탐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종교로 이런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잘 발전할 수는 없다. 혁명이나 쿠테타 같은 급격한 사회변동에 의해 서서히 민주주의는 보급된다.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불란서의 혁명은 이 당시 통치자 루이 16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일반 백성을 폭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일어난 유혈 폭동사태였다. 이 점에서 불란서 유혈혁명은 영구의 무혈 혁명과 잘 비교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초법적으로 통치하고 난 뒤 문제가 되면 통치 행위였다고 주장하며 면책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은 헌법 위에 정대로 존재하지 못하며 그 목적은 그의 전제 정치와 독재 정치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나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수 없다. 이를 어긴다면 당연히 목회자도 사퇴해야 한다. 교회는 부활주님이 주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하여 그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소명자는 자신의 생각과 소원과 뜻을 철저히 하나니므이 말씀 아래 두려고 자기 부정과 자제와 절제에 힘쓴다. 그렇게 그는 소원이나 생각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임 교회의 지체들인 신자들을 일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에 달한다.

2005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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