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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리 없이 왔다가 흔적 없이 돌아가렵니다(최윤호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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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4-03-19 22:10 / 조회 5,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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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최윤호 회계사…고난 통해 삶의 참맛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2004년 03월 18일 
 

 나는 1952년에 전남 장성 남면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났다. 아버님은 내가 뱃가죽이 얇아 어떻게 농사를 지어먹고 사느냐고 걱정을 하시곤 했다. 어릴 때 병치레도 많아 시골 약방에서 주사를 맞던 생각이 많이 난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조금씩 하며 자랐는데 호미질은 무릎이 아프고 모내기와 김매기는 거머리에 피를 뜯기고 허리가 무척 아프고, 지게질도 균형을 잘 맞추어야 했다. 동무들과 소몰고 꼴베며 종달새와 꿩의 둥지를 찾으며 풀벌레도 잡으며 자연 속에서 자란 것은 참 좋은 경험이었고 항상 그리운 추억이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흙벽으로 지은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분반공부도 하며 여러 가지를 배우기는 했으나 구원의 확신은 없었다. 6학년이 되어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교회에 다녔으나, 광주시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광주제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비는 자수성가한 형님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었다. 다만 형님이 등록금을 줄 때마다 하는 말이 있었다. “너는 논은 없다!” 결혼 직후에 나는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가정불화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내 명의의 논을 포기했다. 형님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작은 것을 포기했더니 하나님은 나중에 더 큰 것으로 돌려 주셨다. 할렐루야!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는데 논산훈련소에서 4주 훈련을 마치니 특전사로 배치되었다. 설마 공수부대일까 했는데, 검은 안경과 검은 베레모에 얼룩무늬 옷을 입은 무섭게 보이는 군인이 우리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무서웠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수부대로 배치를 받다니! 가자마자 비행기며 헬리콥터 소리도 요란하게 하루가 멀다 하고 낙하산 훈련이었다. 걱정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특전사에서 일반 보병부대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출대기 중에 시키는 것들이 똥푸기, 시멘트 푸대지고 가서 공사장 일하기 등으로 힘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남자답게 공수부대원이 되어 보자는 생각도 들어 다시 번복하여 공수훈련을 받기로 하였다.

막상 공수훈련에 들어가 보니 너무 힘들었다. 오후에 훈련이 끝날 즈음에는 머리도 멍해지곤 했다. 논산훈련소에서 콩나물과 콩기름으로 찐 살이 모두 빠지고 얼굴이 수척해져 갔다. 밥먹는 시간도 2분밖에 주지 않아 평소에 밥을 늦게 먹는 나는 밥을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원한 것이 식당의 청소당번이었다. 청소하면서 눈치를 보면서 남은 밥을 먹었다. 지금까지도 내 키가 항상 중간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공수교육대에서는 내 키가 가장 작고 내가 훈련을 제일 힘들어하고 있었다. 왜 나같이 약한 사람을 공수부대로 뽑아 왔을까 하는 것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지금도 그 답은 알 수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믿게 하려고 공수부대로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고공공포증은 없어서 기합이나 매맞는 것은 없었다. 몇 명은 고공공포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일반부대로 전출되었다.

훈련 중 사고로 두 명의 낙하산이 엉켜 펴지지 않고 떨어져 두 명이 죽는 현장을 보고, 또 다른 사고로 옆의 동료가 죽는 등 정신적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바로 이때 나는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 힘든 훈련을 잘 견뎌낼 수 없는 약한 존재라는 것과,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나를 위로하며 도와주실 분이 찾아오셨다. 그 분은 예수님이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헤어진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먼 곳에서 작은 점처럼 나타나셔서 나를 안아 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마침 동료가 작은 기드온 성경책 한 권을 내게 주었다. 틈나는 대로 성경책을 읽으며 힘든 훈련과정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 무사히 공수훈련과 특수전훈련을 마치고 3공수여단에 배치되어 틈틈이 성경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기독교인이 되어갔다.

특수전훈련 1등으로 포상휴가, 음어우수선수 포상휴가, 25미터 영점사격에서 총알 3개의 탄착이 붙을 정도의 사격실력, 측정때마다 성적이 좋아(구보는 제외하고) 상관들을 기분좋게 했던 것 등은 그래도 즐거운 기억들이다. 지리산 지역과 태백산 지역에서의 산악훈련, 해상침투훈련과 인명구조훈련, 국군의날 행사에 태권도 시범, 낙하 15회 등 큰 사고 없이 3년의 군대생활을 마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다양한 훈련과 체험은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내 인생에는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어도 조금 더 노력해 보는 훈련이 된 것 같다.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조금은 무리한 수준까지 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살게 된 것 같다. 천리행군이 무리가 되어 1달간 걷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나이들어 나를 좀 불편하게 하고는 있다.

3학년으로 복학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며 회계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눈에 이상이 생겨 책을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좌절이었다. 그때 마침 같은 하숙집에 있던 한 철(현재 한남대 법대교수)이라는 법대학생이 좌절하고 있는 나에게 성경읽기모임(당시 SBF)을 소개하여 따라 나가게 되었다. 모임의 학생들은 소감발표 등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러면서도 학교성적도 좋은 것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수양회에도 가보고 잘 따라 다니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 입학시험 때 국어 작문 문제를 건드리지도 않고 백지로 냈었는데도, 입학성적이 상위권인 것을 알고 후회막급이었다. 조금이라도 썼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글쓰기 같은 창의적 작업을 잘 못하는 내게는 소감문 쓰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소감문을 한 번도 못 쓰고 말았다. 지금 이 간증문을 쓰는 것이 스스로 대견하다. 말로 하는 것은 괜찮은데…. 소감발표를 들을 때마다 존경심을 갖고 들었다.

이희경 선배와 박정인 학사(항상 누나 같은 표정이었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 두 살 아래임)의 꾸준함과 진지함, 성실성, 그리고 김원훈의 세련됨과 여유로움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몸은 회관 안에 있어도 마음은 바깥 변두리를 맴돌았다. 회관 시절에 열심히 하지 못한 것은 나중에 두고두고 나를 아쉽게 하고 있다. 손석태 목자님의 열심은 늘 나를 부끄럽게 했었고…. 하숙집을 옮겨가며 계속 한 방을 쓰던 한 철은 3년 후배이지만 늘 정신적으로는 형님 같은 존재였다(지금도 마찬가지임). 옴에 걸린 것, 뒤에 얘기하지만 결핵에 걸린 것 등은 모두 전염이 되는 병으로, 한 철에게 평생 미안한 일이다. 후에 신체검사 결과가 괜찮더라는 연락을 해줘서 다소 안심하기는 했지만….

4학년 2학기가 되고 취직시험을 보았는데 결핵 중간기이니 요양을 하고 오란다. 하늘이 노랬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후 세상이 달라 보인 두 번째 일이라고나 할까…. 손석태 목자님의 위로를 받으며(나중에 알고보니 손 목자님도 이미 결핵을 앓은 적이 있었음) 낙향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양복에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데(양복에 넥타이는 출세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었음). 서울의 사립대학에 거금의 학비를 대신 형님의 걱정이 컸을 텐데, 개다리 하나(개 한 마리의 1/5에 해당)를 사오시며 잘 먹어야 한다는 말씀에 감동이 되었다. 평소에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버지와 동생이 거의 처리하셨지만…. 고향에 있는 동안 조카와 같이 교회에 출석하는 중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냈다(후에 조카는 당시에 가르치던 학생과 결혼하였고 현재 이승장 목사님 교회에 출석 중임). 4달쯤 요양한 후 율산그룹에 출근하게 되었고 파스, 에탐부톨 같은 결핵약은 계속 먹어야 했다.

고향 한 동네 출신이며 시인인 선배의 부인이신 정 선생님이 나의 성실함에 감동(?)을 받아서 대학 1학년 때부터 나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윤호 씨, 상대는 내가 책임지고 소개할 것이니 아무나 사귀지 말아요”라는 말이었다. 4학년 2학기에 들어서자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으니 만나보라며 채근을 하였으나, 급한 생각도 안 들고 뭐 대단한 사람일 것 같지도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핵으로 낙향하고 다음해 2월 졸업식 전에 출근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좋은 사람 놓친다는 협박(?)에 더 미루다가 정말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량진 독일빵집(몇 년 전 없어졌다고 함)에서 초등학교 교사이던 아가씨를 소개받게 되었다.

다행히 확신있는 크리스천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복하던 생활은 끝이 나고 어머니의 정신적 방황과 재산탕진, 가출로 인해 할머니와 두 동생의 생활을 과외공부 수입으로 꾸려 왔고 초등학교 교사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성격이 밝고 이해심도 많고 만나면 말도 잘 통해서 계속 만나게 되었다. 특히 식사 후에 꼭꼭 결핵약을 챙겨먹는 나를 아내는 싫은 내색없이 대해 주어 무척 고마웠다. 적극성 긍정성도 좋은 점인데, 특히 내가 공부할 때 바가지를 전혀 긁지 않고 항상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나는 아내에게 평생 고마워하며 살고 있다. 아내의 장염이 심해져서 결혼 1주일 전에는 일어나서 세수나 겨우하는 정도로 악화되었다. 여러 병원을 다녀보고, 새벽에 유명한 마포의 한의원에 다니며 열심히 약을 지으러 다녔던 생각이 난다. 결국 신유능력이 있는 어느 전도사님의 기도를 받은 후 좋아져서 겨우 결혼식을 마칠 수 있었다. 이후 아내는 많은 일을 감당하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할렐루야!

결혼 1년이 되어 큰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의 탯줄이 까맣게 썩어 있고 숨을 매우 가쁘게 쉬며(폐에 공기가 차는 폐기종 증세) 인큐베이터에 있었다. 황달 수치도 일정 수준을 넘어가고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하며 지냈는데 어쨌든 아이는 살아났다. 그런데 아이가 정상이 아닐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아이가 자라며 목을 가누지 못하고 최중도 뇌성마비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다.

아이가 밤에도 심하게 울고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서 아내는 교사직을 그만두는 결단을 내리고 아이의 치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 여러 전문의사를 찾아다니며 물리치료를 받고 신유집회를 찾아다니며 기도를 받고…. 그러면서도 아내는 아이를 업고 다니며 교회 구역장으로서의 임무도 충실히 수행하였다. 기도를 받으러 다니면서 지나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보고 실망한 적도 있고, 물리치료를 받을 때 아이의 자지러지는 고통의 울음소리는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했다. 물리치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아이의 뼈가 몇군데 골절된 상태이다.

아이를 키우다가 힘들어 화가 나려 하면 입으로 무조건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3번쯤 외치고 나면 화가 다소 잠잠해진다. 그리고 아이가 힘들게 하면 아이에게 “예수님, 왜 그러세요, 네?”하고 묻곤 한다. 아이는 우리 집에 오신 예수님이다.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 것이다. 잘 감당하자.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무엇하다 왔느냐?”고 물으시면 “우리 집에 오신 예수님 잘 모시다가 왔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 축복으로 세상에서 편하고 즐겁게 살다 왔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과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실지를 생각하며 위로와 소망을 가져본다.

뇌성마비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한 가정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고 정말 국가의 큰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입영통지서가 나왔을 때는 동사무소 직원에게 “제발 우리 아들 군대 데려가서 몇 년 기저귀 갈아주고 밥 떠 먹여주고 누워있는 아이 잘 보살펴 주쇼. 부모인 우리가 그동안 좀 쉬어 봅시다”고 했었다.

뇌성마비 아이는 우리의 삶을 힘들게도 하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게도 하였다. 아내는 현재 어린이집 원장으로 일하면서 장애아동 통합교육을 실천하고 있고 이화여대에서 특수교육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를 마치면 중도 장애아동과 가족들을 위한 시설을 운영할 계획을 세워 준비하고 있고 나도 그 일을 도우며 인생의 마무리를 할 생각이다. 우리 아이를 잘 감당하는 수준을 넘어 다른 아이까지도 감당하는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결혼 후 처 외할머니와 처제와 같이 오래 살다보니 중3이던 처제는 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하고 할머니는 94세로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몇 년 전 돌아가셨다. 사실상 치매환자 본인은 별 고생이 아니나 돌보는 가족들이 더 고생이다. 치매문제도 한 가정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문제여서 국가 차원에서 분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할머니를 더 많이 모시던 처제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할머니를 모시는 것은 전적으로 다시 우리 몫이 되었다. 뇌성마비 아이를 키우며 자기 일을 많이 하며 사는 아내가 치매할머니까지 모시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이후 1년반 가량 시설에서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큰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아! 그런데 내 나이가 50이 다 되는구나!

직장생활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취직 후 1년만에 율산그룹이 무너지고 유한킴벌리 회계부서에 결혼 직후에 입사하게 되었다. 전 직장보다 퇴근시간이 3시간이나 빨라서 처음에는 일하다 말고 퇴근하는 것 같았다. 외국인 투자회사라서 선진화된 회계제도를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아내가 사직하여 처가식구들과 함께 장애인 아들을 부양하는 것이 힘들었으나 다행히 회계부서는 야근이 많아 야근수당을 많이 받아서 겨우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과일을 자주 사먹을 수도 없었고 저축은 몇 년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3년이 될 무렵 나의 미래가 빤히 예측이 되었다. 인생의 전환을 하고 싶은데…. 자주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렵고 복잡한 살림에 회사를 그만두고 생활대책도 없이 공부를 하겠다는 말을 아내에게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남들 잘하는 직장생활을 나는 왜 잘 못하는 것일까? 고민 끝에 아내에게 회계사 시험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나자 아내는 큰 결심으로 “공부하세요. 생활은 내가 어떻게 해 볼께요”라고 말해 주었다.

아내가 미술에 소질이 있고 초등학교 교사 시절 미술반을 지도했던 경험으로 미취학아동을 대상으로 한 미술학원을 해보기로 했다. 개봉역 철길 옆 아파트에서 당시 신개발지이던 과천으로 이사를 했다. 형님한테 돈을 꾸어 과천에 아파트를 사서 집에서 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미술학원이 잘되어 상가의 작은 유치원을 인수하게 되고 차츰 유치원을 키워 나갔다. 자금은 모두 빚이어서 20년 전이지만 한 달 이자를 220만 원을 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치원이 잘 되어갔다. 아내가 공부하라고 한지 1년 반이 지나서 입사한지 5년이 다 되어 드디어 회사를 사직하고 세무사 시험공부에 들어갔다.

세무사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다. 단번에 1차, 2차 모두 합격하여 자격증을 받았다. 바로 이어서 4개월 남짓한 회계사 1차시험 공부도 고시원에서 열심히 했으나 가능성만 확인하고 낙방하였다. 2번째 도전. 1차 합격, 2차 낙방.  3번째 도전에는 1차에 낙방!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하늘이 노랗고 정말 밥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했다. 다시 일어나야 했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회개를 했다. 실력있다고 자만했고 공부한다고 교회 봉사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자신을 추스르며, 새벽기도를 3달하며 주일학교 교사를 계속했다.  4번째 도전에 1차 합격, 그리고 드디어 2차도 합격이었다(당시 만 36세로 최고령 합격). 합격을 전해주자 아내가 울었다. 나도 눈물이 났다. 같이 말없이 울었다.

이후 세동회계법인에서 2년 연수를 받고, 3차 시험에 합격하고, 1년후 개인 회계사 사무소를 열었다. 개업하자마자 큰 일감이 몇 개 와서 첫해부터 적자를 면할 수 있었고 매년 순조롭게 성장하였다. IMF 시절에 일감이 크게 줄어 걱정했으나 다시 늘기 시작해, 지금은 나로서는 가장 잘 되는 시기이며 앞으로 더욱 하나님께서 키워 주실 것을 기도하고 또 기대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며 살고 있다.

교회(분당 지구촌교회)에서 적성검사(은사테스트)를 두 가지 해보았다. 내게 가장 맞는 일이 놀랍게도 공인회계사와 회계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도 감사했다. 나는 친구들보다 10년 정도 늦게 공인회계사가 되었고 최선의 길이 아닌 차선의 길을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늦었지만 하나님은 결국에 나를 최선의 길로 이끄셨던 것이다!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다!

교회의 재정위원장이었을 때는 복식부기 보고제도를 도입하고 목회자와 직원들의 근로소득세 납부를 실현하였다. 그리고 고향교회에 정기적인 헌금을 해드려서 최초로 목사님이 상주하는 교회가 되게 하고, 땅을 사드려서 동네 후미진 곳에 있던 교회를 동네 입구에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고향에 갈 때마다 교회를 보면 보람이 느껴진다. 그리고 몇 군데 선교단체들과 평화연대, 신우회 등에서 회계감사 등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어느덧 나이가 53살이다. 이 세상을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벌게 하시는 소득과 시간을 일부나마 유용한 일에 쓰고 싶다. 그리고 이름없이 빛도 없이 남을 도우며 살고 싶다. ‘소리없이 왔다가 흔적없이 돌아갑시다‘(산에 조용히 와서 놀다가 쓰레기 버리지 말고 가라는 뜻임)라는 공익광고가 내게는 무척 와 닿는다. 일단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을 해 놓았다. 그러니 묘자리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묘자리가 있던가? 기독교는 유형의 가치보다는 눈에 안 보이는 무형의 가치를 좇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내 인생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다. 그리고 계속 이루어 가실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겠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럽지 않도록….


최윤호 / 회계사(우리회계법인)·뉴스앤조이 경영자문위원·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최윤호 jhkim@newsnjo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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