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목회자는 누구이며 무엇으로 사는가[뉴스앤조이/김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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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3-01-16 21:38 / 조회 4,462 / 댓글0본문
목회자는 누구이며 무엇으로 사는가
김관선 목사, 가난해야 훌륭한 성직자?
이 글은 98년 기윤실 교역자포럼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가 발제한 내용이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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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는 돈과 무관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통적이지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성경에는 돈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이 신·구약 전편에 산재해 있다. 대천덕 신부는 성경에서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구절이 986번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는 거의 신·구약 성경 매 장마다 한 번씩 문제를 언급했다는 의미이다. 조지 스위팅은 매우 의미 있는 통계를 제시한다. 예수님께서 37회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 무려 17회에 걸쳐서 부(富) 혹은 재산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더욱 특이한 점은 예수님의 돈에 관한 언급이 사역의 막바지로 가면서 점점 더 고조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난 주간 중에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과부를 눈 여겨보셨을 뿐 아니라 성전에 모인 백성들에게 '헌금 설교'를 하셨다는 사실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아니, 우리 한국인들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이다. 죽음을 지척에 두고서 돈 문제를 언급하시다니! 우리 나라에서 어떤 목사가 수난 주간에 헌금 설교를 했다면 성도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이 문제를 조금 더 언급해 보자. 예수님의 돈에 대한 언급이 초기보다는 말기, 즉 십자가가 가까워질 때 더 많이 하셨음을 밝힌 사람은 누가이다. 십자가를 지시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잃었던 은전의 비유(15장),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6장), 부자와 나사로 비유(16장), 그리고 18장의 부자와 천국에 대한 말씀과 19장의 므나의 비유를 쏟아놓으신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은 돈과 신앙 내지 경제 문제와 내세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통해 명백해지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지도자는 아니셨다. 따라서 가급적 돈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것이 '거룩한 목회자'라는 우리의 통념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거룩함이 아니라 무책임함이고 성직에 대한 직무유기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가 그 분이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자주 언급하셨던 문제에 대해서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우리가 여는 포럼의 일차적 의미는 우리 사회에 전반에 흐르는 전통 문화에 의하여 왜곡된 돈과 교역자,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생각을 바로 잡는데 있다.
오늘 본인의 발제는 교역자의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교역자의 생활비를 교역자의 정체성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성직자'로서의 교역자
나는 교역자를 먼저 '성직자'로 정의하고자 한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말은 목회만이 성직이라든지, 목회보다 더 거룩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 말은 아니니까. 성직자로서의 교역자란 자신의 목회 사역과 그 직책만이 자신의 유일무이한 사역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목회를 위해서라면 목숨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역자는 구약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사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또한 사도적인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그 사실을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만인제사장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로 부름 받은 것도 또한 아니다. 성직자로서의 교역자의 사명과 자부심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앞선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성직자로서의 교역자의 일이 생명을 아끼지 않아야 할만큼 쉽지 않은 일이란 점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역자의 생계 문제를 포함한 삶 전체를 전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맡기셨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관할 아래 있지만 말이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통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거나 오해하는 것이 있다. 일반적인 경우 교역자의 생계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그 교역자가 속한 공동체의 책임으로 맡겨 놓으셨다. 레위 사람들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은 이유는 모든 지파로 하여금 레위 사람들을 책임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셨던가? 레위 지파는 그렇게 돈을 목적으로 일하지 않는 성직 수행을 명령받은 것이 아닌가?
교역자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믿고 산다는 것은 항상 옳다. 그러나 만약, 성도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진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왜 교역자의 생계비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으로 맡기셨을까? 그리고 그것은 교역자만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임지므로 얻는 유익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교회가 교역자의 생계 문제를 포함한 물질 문제를 해결할 때 그 유익이란 성도들에게 돌아간다.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축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될 때 목회자는 자신의 사역에 전념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교역자가 육신적, 물질적으로 편안해지면 긴장이 사라지고 나태해지지 않겠느냐는 일부 성도들의 우려가 부질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교역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에게 맡겨주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목회자의 문제는 정말 하나님께서 책임져 줄 일이다. 바른 성도라면 그런 선하지 않은 교역자가 스스로 도퇴될 수 있는 분위기 형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줄로 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엘리사를 일정 기간 먹이셨던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의 표적이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사르밧의 한 가난한 과부에게 보내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그 여인에게 엘리사의 생계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일은 신구약 전체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으며 살았고, 바울 사도 역시 가는 곳마다 그를 돕는 몇 몇 사람들에게 공궤를 받았으며 예수님 조차도 그를 따르는 여인들로부터 사역에 필요한 물질적 도움을 받았다(누가8:1,2). 이렇게 하나님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로 성직자로서의 교역자 생활을 책임지게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직자로서의 교역자는 물질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생계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우리의 현실을 이유로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교역자 개인 차원에서의 불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이 정한 원칙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는 안타까움은 한국교회 속에서 이 원칙이 매우 불투명해졌다는 것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교역자는 자신의 생계를 포함한 돈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한다. 교역자의 사역은 먹고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이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를 개척하거나, 더 많이 먹고 더 편하게 살기 위해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 사람들의 오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교역자는 자신의 직책과 일을 직장이나 직업으로 인식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엘리사에게서 본다. 엘리사는 일국의 장관인 나만의 문둥병을 고쳐준다.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성직자를 이해할 수 없는 나아만은 그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엄청난 선물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오해를 염두에 둔 엘리사는 그 선물을 한사코 거절한다(왕상 5장). 그렇게 엘리사는 성직자로서의 명예를 분명히 했다.
그 사건 전후에 선지자의 생도들은 돈 때문에 많은 곤란을 당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 어려운 형편에도 선지자는 받아서는 안 되는 물질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밥을 굶어도 성직을 수행한다는 자부심과 감격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고난을 당하고 굶어도 선지자는 선지자였고 사도는 사도였다. 그러나 엘리사와 그때의 생도들이 물질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교역자(당시는 선지자)는 돈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선언 정도로 이해할 수는 없다.
교역자의 삶과 사역이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여 돈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도 기뻐할 수 있고, 그런 삶을 가르치는 것이 교역자의 사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역자 역시 돈이 없으면 버스를 탈 수도 없고 책을 살 수도 없다. 돈을 가지지 않고는 사역에 필요한 거의 모든 활동이 불가능해진다. 돈이 목적이 아니란 사실을 수단으로서의 돈의 기능까지 부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돈과 무관해야 한다? 가난해야 훌륭한 성직자다?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온 교역자들은 대체로 가난했다. 70년대 이전의 한국 교역자들은 돈이 없어도 사역을 기뻐하며 살았다. 비록 자신의 교역자들이 엄청난 희생과 고난을 감당해야 했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옛날의 교역자들이 옛 선비들의 전통을 이어 받아 돈에 대하여 가급적 언급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교역자들의 생각과 가르침은 마침내 헌금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 성도들을 양산했다.
때문에 아직도 대다수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청빈한 목회자들을 추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시대는 모두가 가난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 현실은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야나 엘리사 시대 또한 매우 가난했던 시절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자비량으로 일했던 것 역시 일반화시킬 수 없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 즉 비상시대의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조차도 만약 바울이 결혼을 했었다면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례비'라는 용어?
그러면 이제 교역자의 생활비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정리되어야 할 것은 교역자의 생활비에 대한 올바른 개념정립이다. 사실 한국교회 교역자의 생활비와 관련하여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발표자의 생각이다. 그 잘못된 개념은 '교역자 생활비'를 '교역자 사례비'로 통용되는 현실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구약의 성직자들은 사례비를 받은 것이 아니고 생활을 보장받았다. 교회는 마땅히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한다. 이는 원칙의 문제이다. 사례란 주관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생활비란 객관적인 문제이다. 사례의 근거는 집단으로서의 교회이거나 어떤 개인일 수 있다. 그러나 생활비란 우리가 마음대로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원리이다. 때문에 목회자에게 지급되는 물질은 생활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고 강조되어야 옳다.
우리 사회도 늦었기는 하지만 '최저생활비'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법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성경의 법과 충돌되지 않는다면 이를 무시하지 않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최소한 교역자의 생계비는 '최저생활비' 이상인 것이 옳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교역자의 생활비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목회에 지장을 받지 않을 만큼의 정도는 되어야 옳다. 교역자가 가장 기초적인 생활과 사역을 위한 돈이 없어 쩔쩔매는 일들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서도 결코 득이 될 게 없다.
농어촌과 미자립 교회의 목회자의 생활비 보장
목회자의 받는 돈은 생활비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농어촌의 미자립 교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농어촌 교회에서는 생활비 보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와 비슷한 경우, 성경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미자립 교회의 목회자들은 여러 교회에 보조를 요청하고, 여유있는 교회의 개별적인 보조는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생활보장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를 지원하면서 마치 자기 교회가 그 많은 교회들의 생활비 문제를 책임지는 듯한 자랑을 일삼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받는 교회 가운데는 여러 교회로부터 풍족하게(?) 받아 생활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자기 옆 교회는 매우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는 데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인지 후원교회를 관리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현상들도 눈에 띈다. 이 모든 경우, 문제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교역자의 생활비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안되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 발표자는 몇 가지 사항을 구체적으로 제안하려고 한다.
먼저 개교회가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여력이 있는 의식 있는 개교회는 여러 교회를 조금씩 돕는 것보다 가능한 몇 교회라도 완전하게 생활을 보장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미 이것을 시행하는 교회가 있다. 마치 본교회의 목회자처럼 대접하고 그가 목회에 전념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 가지 문제를 낳을 개연성이 존재한다. 즉 도움을 받는 교회나 교역자가 종속되는 현상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노회나, 더 나아가 총회가 이 일을 정책적으로 주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총회는 교회의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자료를 중심으로 개교회의 지원을 총괄하여 제도적으로 분배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본 발제자는 이 일은 정말 총회가 정말 시급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인 교회 정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더 이상 목회자가 돈에 얽어 매이지 않도록 배려하는 일보다 개교회 목회를 지원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목회자라는 이유만으로 생활 보장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능과 역기능을 면밀히 계산하여 미자립 교회나 농어촌 교회의 지원 방법을 구체적으로 마련하면서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점 또한 해결해 가야 하리라고 믿는다.
이 일이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자립이 가능한 지역이나 교회로부터 시작되어야 옳다. 충분히 교회가 있고 교회가 꼭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자립이 불가능 지역에 대한 부분별한 지원이나 교회 개척은 고려되거나 배제되어야 옳다.
아울러 정말 필요한 농어촌 교회가 도시에 발붙일 능력(?)이 없어서 밀려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고 농어촌에 사명을 가진 준비된 교역자들이 가게 만드는 정책의 계발도 중요하다. 자질 있는 목회자가 배출되는 분위기나 여건의 성숙도 교단이 맡아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라 확신한다.
우리는 물론 지금도 생활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돈으로도 기쁘게 사역하는 분들이 많음을 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를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목회자는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
거칠게 요약하자면 교역자는 하나님은 물론 성도들이 그 권위와 봉사를 인정해 줄 때 행복을 느낀다. 그것이 삶과 사역의 보람이자 즐거움이다. 만약에 생활비는 부족함이 없지만 자신이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거나 권위에 손상을 입고 있다면 살맛도 일할 맛도 나지 않을 것이다. 교역자의 생활비에는 반드시 성도들의 존경과 인정(認定)이 담겨야 한다. 생활비를 받을 때 교역자는 나는 인정받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돈의 액수는 아닐 것이다.
성공한 목회자란 그가 받는 생활비의 많고 적음이나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의 대접이 좋고 나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와 목회자의 관계, 그래서 목회자가 보람과 기쁨을 누리고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에서 천국을 맛보는 그런 모습으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김관선 목사 / 산정현교회
김관선 (2003-01-16 오후 7:52:06)
김관선 목사, 가난해야 훌륭한 성직자?
이 글은 98년 기윤실 교역자포럼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가 발제한 내용이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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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는 돈과 무관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통적이지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성경에는 돈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이 신·구약 전편에 산재해 있다. 대천덕 신부는 성경에서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구절이 986번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는 거의 신·구약 성경 매 장마다 한 번씩 문제를 언급했다는 의미이다. 조지 스위팅은 매우 의미 있는 통계를 제시한다. 예수님께서 37회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 무려 17회에 걸쳐서 부(富) 혹은 재산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더욱 특이한 점은 예수님의 돈에 관한 언급이 사역의 막바지로 가면서 점점 더 고조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난 주간 중에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과부를 눈 여겨보셨을 뿐 아니라 성전에 모인 백성들에게 '헌금 설교'를 하셨다는 사실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아니, 우리 한국인들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이다. 죽음을 지척에 두고서 돈 문제를 언급하시다니! 우리 나라에서 어떤 목사가 수난 주간에 헌금 설교를 했다면 성도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이 문제를 조금 더 언급해 보자. 예수님의 돈에 대한 언급이 초기보다는 말기, 즉 십자가가 가까워질 때 더 많이 하셨음을 밝힌 사람은 누가이다. 십자가를 지시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잃었던 은전의 비유(15장),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6장), 부자와 나사로 비유(16장), 그리고 18장의 부자와 천국에 대한 말씀과 19장의 므나의 비유를 쏟아놓으신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은 돈과 신앙 내지 경제 문제와 내세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통해 명백해지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지도자는 아니셨다. 따라서 가급적 돈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것이 '거룩한 목회자'라는 우리의 통념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거룩함이 아니라 무책임함이고 성직에 대한 직무유기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가 그 분이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자주 언급하셨던 문제에 대해서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우리가 여는 포럼의 일차적 의미는 우리 사회에 전반에 흐르는 전통 문화에 의하여 왜곡된 돈과 교역자,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생각을 바로 잡는데 있다.
오늘 본인의 발제는 교역자의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교역자의 생활비를 교역자의 정체성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성직자'로서의 교역자
나는 교역자를 먼저 '성직자'로 정의하고자 한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말은 목회만이 성직이라든지, 목회보다 더 거룩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 말은 아니니까. 성직자로서의 교역자란 자신의 목회 사역과 그 직책만이 자신의 유일무이한 사역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목회를 위해서라면 목숨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역자는 구약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사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또한 사도적인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그 사실을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만인제사장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로 부름 받은 것도 또한 아니다. 성직자로서의 교역자의 사명과 자부심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앞선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성직자로서의 교역자의 일이 생명을 아끼지 않아야 할만큼 쉽지 않은 일이란 점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역자의 생계 문제를 포함한 삶 전체를 전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맡기셨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관할 아래 있지만 말이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통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거나 오해하는 것이 있다. 일반적인 경우 교역자의 생계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그 교역자가 속한 공동체의 책임으로 맡겨 놓으셨다. 레위 사람들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은 이유는 모든 지파로 하여금 레위 사람들을 책임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셨던가? 레위 지파는 그렇게 돈을 목적으로 일하지 않는 성직 수행을 명령받은 것이 아닌가?
교역자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믿고 산다는 것은 항상 옳다. 그러나 만약, 성도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진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왜 교역자의 생계비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으로 맡기셨을까? 그리고 그것은 교역자만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임지므로 얻는 유익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교회가 교역자의 생계 문제를 포함한 물질 문제를 해결할 때 그 유익이란 성도들에게 돌아간다.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축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될 때 목회자는 자신의 사역에 전념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교역자가 육신적, 물질적으로 편안해지면 긴장이 사라지고 나태해지지 않겠느냐는 일부 성도들의 우려가 부질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교역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에게 맡겨주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목회자의 문제는 정말 하나님께서 책임져 줄 일이다. 바른 성도라면 그런 선하지 않은 교역자가 스스로 도퇴될 수 있는 분위기 형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줄로 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엘리사를 일정 기간 먹이셨던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의 표적이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사르밧의 한 가난한 과부에게 보내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그 여인에게 엘리사의 생계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일은 신구약 전체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으며 살았고, 바울 사도 역시 가는 곳마다 그를 돕는 몇 몇 사람들에게 공궤를 받았으며 예수님 조차도 그를 따르는 여인들로부터 사역에 필요한 물질적 도움을 받았다(누가8:1,2). 이렇게 하나님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로 성직자로서의 교역자 생활을 책임지게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직자로서의 교역자는 물질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생계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우리의 현실을 이유로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교역자 개인 차원에서의 불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이 정한 원칙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는 안타까움은 한국교회 속에서 이 원칙이 매우 불투명해졌다는 것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교역자는 자신의 생계를 포함한 돈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한다. 교역자의 사역은 먹고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이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를 개척하거나, 더 많이 먹고 더 편하게 살기 위해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 사람들의 오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교역자는 자신의 직책과 일을 직장이나 직업으로 인식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엘리사에게서 본다. 엘리사는 일국의 장관인 나만의 문둥병을 고쳐준다.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성직자를 이해할 수 없는 나아만은 그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엄청난 선물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오해를 염두에 둔 엘리사는 그 선물을 한사코 거절한다(왕상 5장). 그렇게 엘리사는 성직자로서의 명예를 분명히 했다.
그 사건 전후에 선지자의 생도들은 돈 때문에 많은 곤란을 당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 어려운 형편에도 선지자는 받아서는 안 되는 물질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밥을 굶어도 성직을 수행한다는 자부심과 감격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고난을 당하고 굶어도 선지자는 선지자였고 사도는 사도였다. 그러나 엘리사와 그때의 생도들이 물질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교역자(당시는 선지자)는 돈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선언 정도로 이해할 수는 없다.
교역자의 삶과 사역이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여 돈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도 기뻐할 수 있고, 그런 삶을 가르치는 것이 교역자의 사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역자 역시 돈이 없으면 버스를 탈 수도 없고 책을 살 수도 없다. 돈을 가지지 않고는 사역에 필요한 거의 모든 활동이 불가능해진다. 돈이 목적이 아니란 사실을 수단으로서의 돈의 기능까지 부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돈과 무관해야 한다? 가난해야 훌륭한 성직자다?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온 교역자들은 대체로 가난했다. 70년대 이전의 한국 교역자들은 돈이 없어도 사역을 기뻐하며 살았다. 비록 자신의 교역자들이 엄청난 희생과 고난을 감당해야 했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옛날의 교역자들이 옛 선비들의 전통을 이어 받아 돈에 대하여 가급적 언급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교역자들의 생각과 가르침은 마침내 헌금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 성도들을 양산했다.
때문에 아직도 대다수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청빈한 목회자들을 추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시대는 모두가 가난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 현실은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야나 엘리사 시대 또한 매우 가난했던 시절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자비량으로 일했던 것 역시 일반화시킬 수 없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 즉 비상시대의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조차도 만약 바울이 결혼을 했었다면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례비'라는 용어?
그러면 이제 교역자의 생활비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정리되어야 할 것은 교역자의 생활비에 대한 올바른 개념정립이다. 사실 한국교회 교역자의 생활비와 관련하여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발표자의 생각이다. 그 잘못된 개념은 '교역자 생활비'를 '교역자 사례비'로 통용되는 현실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구약의 성직자들은 사례비를 받은 것이 아니고 생활을 보장받았다. 교회는 마땅히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한다. 이는 원칙의 문제이다. 사례란 주관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생활비란 객관적인 문제이다. 사례의 근거는 집단으로서의 교회이거나 어떤 개인일 수 있다. 그러나 생활비란 우리가 마음대로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원리이다. 때문에 목회자에게 지급되는 물질은 생활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고 강조되어야 옳다.
우리 사회도 늦었기는 하지만 '최저생활비'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법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성경의 법과 충돌되지 않는다면 이를 무시하지 않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최소한 교역자의 생계비는 '최저생활비' 이상인 것이 옳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교역자의 생활비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목회에 지장을 받지 않을 만큼의 정도는 되어야 옳다. 교역자가 가장 기초적인 생활과 사역을 위한 돈이 없어 쩔쩔매는 일들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서도 결코 득이 될 게 없다.
농어촌과 미자립 교회의 목회자의 생활비 보장
목회자의 받는 돈은 생활비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농어촌의 미자립 교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농어촌 교회에서는 생활비 보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와 비슷한 경우, 성경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미자립 교회의 목회자들은 여러 교회에 보조를 요청하고, 여유있는 교회의 개별적인 보조는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생활보장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를 지원하면서 마치 자기 교회가 그 많은 교회들의 생활비 문제를 책임지는 듯한 자랑을 일삼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받는 교회 가운데는 여러 교회로부터 풍족하게(?) 받아 생활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자기 옆 교회는 매우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는 데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인지 후원교회를 관리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현상들도 눈에 띈다. 이 모든 경우, 문제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교역자의 생활비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안되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 발표자는 몇 가지 사항을 구체적으로 제안하려고 한다.
먼저 개교회가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여력이 있는 의식 있는 개교회는 여러 교회를 조금씩 돕는 것보다 가능한 몇 교회라도 완전하게 생활을 보장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미 이것을 시행하는 교회가 있다. 마치 본교회의 목회자처럼 대접하고 그가 목회에 전념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 가지 문제를 낳을 개연성이 존재한다. 즉 도움을 받는 교회나 교역자가 종속되는 현상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노회나, 더 나아가 총회가 이 일을 정책적으로 주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총회는 교회의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자료를 중심으로 개교회의 지원을 총괄하여 제도적으로 분배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본 발제자는 이 일은 정말 총회가 정말 시급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인 교회 정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더 이상 목회자가 돈에 얽어 매이지 않도록 배려하는 일보다 개교회 목회를 지원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목회자라는 이유만으로 생활 보장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능과 역기능을 면밀히 계산하여 미자립 교회나 농어촌 교회의 지원 방법을 구체적으로 마련하면서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점 또한 해결해 가야 하리라고 믿는다.
이 일이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자립이 가능한 지역이나 교회로부터 시작되어야 옳다. 충분히 교회가 있고 교회가 꼭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자립이 불가능 지역에 대한 부분별한 지원이나 교회 개척은 고려되거나 배제되어야 옳다.
아울러 정말 필요한 농어촌 교회가 도시에 발붙일 능력(?)이 없어서 밀려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고 농어촌에 사명을 가진 준비된 교역자들이 가게 만드는 정책의 계발도 중요하다. 자질 있는 목회자가 배출되는 분위기나 여건의 성숙도 교단이 맡아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라 확신한다.
우리는 물론 지금도 생활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돈으로도 기쁘게 사역하는 분들이 많음을 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를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목회자는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
거칠게 요약하자면 교역자는 하나님은 물론 성도들이 그 권위와 봉사를 인정해 줄 때 행복을 느낀다. 그것이 삶과 사역의 보람이자 즐거움이다. 만약에 생활비는 부족함이 없지만 자신이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거나 권위에 손상을 입고 있다면 살맛도 일할 맛도 나지 않을 것이다. 교역자의 생활비에는 반드시 성도들의 존경과 인정(認定)이 담겨야 한다. 생활비를 받을 때 교역자는 나는 인정받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돈의 액수는 아닐 것이다.
성공한 목회자란 그가 받는 생활비의 많고 적음이나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의 대접이 좋고 나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와 목회자의 관계, 그래서 목회자가 보람과 기쁨을 누리고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에서 천국을 맛보는 그런 모습으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김관선 목사 / 산정현교회
김관선 (2003-01-16 오후 7:5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