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심사평[지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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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3-01-24 08:25 / 조회 5,074 / 댓글0본문
심사평
찬양대 지휘자이기 때문에 교회 내의 이런 저런 찬양대회의 심사를 맡게 된다. 언젠가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모 노회가 주최하는 어린이 찬양경연대회의 심사를 맡기도 했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관여했던 찬양 대회의 심사에 대한 기억은 그리 유쾌한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한 평가가 마지막 집계 단계에서 교회 지도층의 개입으로 뒤집어 지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우선 심사자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 “찬양대회가 아니라면 모를까 왜 한 사람이 멀리서 교회를 나온다는 사실이, 작년에도 상을 탔다는 사실이 결격 사유가 되거나 1등을 주어야 하는 이유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정작 안타까운 것은 심사의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성도들이라 해도 교회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어떤 팀이 잘 했고 못 했는지 정도는 안다. 청중의 반응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 그러한 상식이 뒤집어질 때 교회 지도층이 걱정해야 할 일은 1등 받을 팀이 2등으로 밀린다든지 상을 받을 수 있었던 팀이 상을 못 받게 됨으로 인해 생기는 당사자들의 섭섭한 마음이 아니다. 보다 큰 문제는 권위의 추락과 교회 지도층에 대한 신뢰의 상실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관여하는 심사에 가능한 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고 애를 쓴다. 우선 심사기준을 합리적으로 정하고 그 시행의 과정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심사평을 하러 나가면 나는 언제나 채점표의 공개를 약속한다. 물론 채점표가 공개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심사위원장의 발표는 분명 청중들의 눈을 반짝거리게 한다. 사실 그것은 청중들을 안심시키려는 것보다는 교회 지도층에게 가하는 무언의 압력이 된다. 섣불리 개입을 하여 판을 뒤집지 말라는.
그러나 오랜 심사의 경험은 이 정도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아직도 공정하지 못하게 뒤집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교회의 찬양대회도 음악적인 요소만으로 심사 기준이 정해지지 않는다. 준비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은혜스럽냐, 회원들이 얼마나 출석을 많이 했느냐가 음악적인 기준과 함께 심사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종종 음악 외적인 기준이 평가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 역시 청중을 배반한다. 분명 A팀이 화음도 좋고 노래도 잘 했는데 결과는 예상치 못한 C 팀에 대상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교회이기 때문에 준비성을 보고 얼마나 은혜스러운가를 보겠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 모른다. 문제는 상식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그것이 찬양대회인 이상 가장 중요한 심사의 기준은 음악인 것이어야 옳다. 물론 보다 근본적으로 찬양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를 따지거나 어떻게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에 음악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에 일리가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것이 옳다면 논의를 찬양대회를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미국의 배심원제를 본 뜬 심사단이다. 심사단은 즉석에서 구성된다. 물론 이 심사단은 대회가 선정한 심사위원과는 구별이 된다. 전문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는 심사단이지만 심사단이 청중을 배반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심사단이란 존재는 찬양 대회의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렇게 상식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될 때 청중들과 참가자들은 하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함께 즐거워하게 되고 그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수 있는 페어플레이의 정신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작년 12월 중순,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열리는 교구별 찬양대회가 있었다. 이번에도 심사위원장의 몫은 내게 돌아왔다. 심사기준을 마련하고, 심사평을 하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평소 지론인 심사단을 구성할 수 없었다). 채점지의 공개도 약속했고 예년과 다르게 비음악적 기준이 음악적 기준을 질식,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조처도 취했다. 심사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은 다 한 셈이다.
그러나 심사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 심사 기준을 정비하고 교회 지도층이 엉뚱하게 개입할 요소를 차단했다는 사실이 찬양의 본질적인 부분의 결점들을 채워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찬양과 음악 모두에 있었다. 거의 모든 출전팀은 유니즌으로 찬양을 했다. 만약 지금이 60년대나 70년대 초반의 상황이라면 용서받았을 그런 음악적 무책임을 내가 문제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지난 20-30년간의 우리 사회와 문화의 긍정적인 변화가 교회의 찬양대회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한 학교에 피아노를 칠 줄 아는 학생이 한 둘이 전부이던 때 하던 유니즌 찬양이 21세기에도 계속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회에서 음악적인 부분의 심사를 맡은 나로서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게 솔직한 나의 감정이었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찬양’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대다수 출연자들에게 있어서 가사와 자신의 삶은 겉돌고 있었다. 대단히 즐거운 찬양임에도 출연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회상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에 회상이 없었고, 감사를 내용으로 하는 가사에 감사가 뭍어나지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잘 아느냐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지 모르겠으나 출연자들 대다수에 익숙한 상황에서 그 정도도 모른데서야 어찌 심사위원장을 하겠나!
어찌되었든 대회는 끝났고 매우 짧게 해야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심사평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여러분의 찬양에 총평을 하겠습니다. 지난해에 비해 참여하는 분들의 상을 받겠다는 의지가 높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무적인 일이지요. 또한 거의 모든 팀의 찬양에서 어떤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를 배출한 교회의 전통이 아직도 찬양 속에 살아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그러나 거의 여러분의 찬양 속에서 즐거움과 웃음과 감사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 만큼 지난 한 해의 여러분의 삶이 고단하고, 여러분의 가정생활과 교회 생활에 재미가 덜 했던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찬양에 있어서 즐거움과 감사와 재미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큼 우리 신앙의 살아있음과 활력과 확신을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찬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그 분이 주신 즐거움이다. 찬양 대회의 심사가 우울한 것은 찬양문화의 실망스런 수준 때문이 아니라 찬양대회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 신앙의 의기소침내지 죽어있음 때문이다.
찬양대회만큼 우리 신앙의 획일화와 재미없음을 드러내는 게 또 있을까. 그런 우울함을 가지고, 그러나 심사평을 재미있고 짧게 하기 위해 나는 파격적인 멘트로 심사평을 끝냈다.
“… 오늘 여러분의 찬양을 심사하기 위해 굳이 전문가의 견해가 필요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개별적인 팀에 대한 심사평은 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들에게서 웃음이 터져나왔고, 인사를 하고 심사위원장의 자리로 돌아오는 내게 한 여성 심사위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 마디를 건덴다.
“오늘 심사평은 한 마디로 엽기네요, 엽기!”
이 글은 <주간 기독교>에 제출한 원고입니다.
찬양대 지휘자이기 때문에 교회 내의 이런 저런 찬양대회의 심사를 맡게 된다. 언젠가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모 노회가 주최하는 어린이 찬양경연대회의 심사를 맡기도 했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관여했던 찬양 대회의 심사에 대한 기억은 그리 유쾌한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한 평가가 마지막 집계 단계에서 교회 지도층의 개입으로 뒤집어 지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우선 심사자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 “찬양대회가 아니라면 모를까 왜 한 사람이 멀리서 교회를 나온다는 사실이, 작년에도 상을 탔다는 사실이 결격 사유가 되거나 1등을 주어야 하는 이유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정작 안타까운 것은 심사의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성도들이라 해도 교회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어떤 팀이 잘 했고 못 했는지 정도는 안다. 청중의 반응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 그러한 상식이 뒤집어질 때 교회 지도층이 걱정해야 할 일은 1등 받을 팀이 2등으로 밀린다든지 상을 받을 수 있었던 팀이 상을 못 받게 됨으로 인해 생기는 당사자들의 섭섭한 마음이 아니다. 보다 큰 문제는 권위의 추락과 교회 지도층에 대한 신뢰의 상실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관여하는 심사에 가능한 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고 애를 쓴다. 우선 심사기준을 합리적으로 정하고 그 시행의 과정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심사평을 하러 나가면 나는 언제나 채점표의 공개를 약속한다. 물론 채점표가 공개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심사위원장의 발표는 분명 청중들의 눈을 반짝거리게 한다. 사실 그것은 청중들을 안심시키려는 것보다는 교회 지도층에게 가하는 무언의 압력이 된다. 섣불리 개입을 하여 판을 뒤집지 말라는.
그러나 오랜 심사의 경험은 이 정도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아직도 공정하지 못하게 뒤집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교회의 찬양대회도 음악적인 요소만으로 심사 기준이 정해지지 않는다. 준비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은혜스럽냐, 회원들이 얼마나 출석을 많이 했느냐가 음악적인 기준과 함께 심사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종종 음악 외적인 기준이 평가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 역시 청중을 배반한다. 분명 A팀이 화음도 좋고 노래도 잘 했는데 결과는 예상치 못한 C 팀에 대상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교회이기 때문에 준비성을 보고 얼마나 은혜스러운가를 보겠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 모른다. 문제는 상식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그것이 찬양대회인 이상 가장 중요한 심사의 기준은 음악인 것이어야 옳다. 물론 보다 근본적으로 찬양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를 따지거나 어떻게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에 음악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에 일리가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것이 옳다면 논의를 찬양대회를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미국의 배심원제를 본 뜬 심사단이다. 심사단은 즉석에서 구성된다. 물론 이 심사단은 대회가 선정한 심사위원과는 구별이 된다. 전문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는 심사단이지만 심사단이 청중을 배반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심사단이란 존재는 찬양 대회의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렇게 상식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될 때 청중들과 참가자들은 하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함께 즐거워하게 되고 그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수 있는 페어플레이의 정신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작년 12월 중순,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열리는 교구별 찬양대회가 있었다. 이번에도 심사위원장의 몫은 내게 돌아왔다. 심사기준을 마련하고, 심사평을 하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평소 지론인 심사단을 구성할 수 없었다). 채점지의 공개도 약속했고 예년과 다르게 비음악적 기준이 음악적 기준을 질식,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조처도 취했다. 심사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은 다 한 셈이다.
그러나 심사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 심사 기준을 정비하고 교회 지도층이 엉뚱하게 개입할 요소를 차단했다는 사실이 찬양의 본질적인 부분의 결점들을 채워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찬양과 음악 모두에 있었다. 거의 모든 출전팀은 유니즌으로 찬양을 했다. 만약 지금이 60년대나 70년대 초반의 상황이라면 용서받았을 그런 음악적 무책임을 내가 문제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지난 20-30년간의 우리 사회와 문화의 긍정적인 변화가 교회의 찬양대회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한 학교에 피아노를 칠 줄 아는 학생이 한 둘이 전부이던 때 하던 유니즌 찬양이 21세기에도 계속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회에서 음악적인 부분의 심사를 맡은 나로서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게 솔직한 나의 감정이었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찬양’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대다수 출연자들에게 있어서 가사와 자신의 삶은 겉돌고 있었다. 대단히 즐거운 찬양임에도 출연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회상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에 회상이 없었고, 감사를 내용으로 하는 가사에 감사가 뭍어나지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잘 아느냐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지 모르겠으나 출연자들 대다수에 익숙한 상황에서 그 정도도 모른데서야 어찌 심사위원장을 하겠나!
어찌되었든 대회는 끝났고 매우 짧게 해야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심사평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여러분의 찬양에 총평을 하겠습니다. 지난해에 비해 참여하는 분들의 상을 받겠다는 의지가 높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무적인 일이지요. 또한 거의 모든 팀의 찬양에서 어떤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를 배출한 교회의 전통이 아직도 찬양 속에 살아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그러나 거의 여러분의 찬양 속에서 즐거움과 웃음과 감사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 만큼 지난 한 해의 여러분의 삶이 고단하고, 여러분의 가정생활과 교회 생활에 재미가 덜 했던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찬양에 있어서 즐거움과 감사와 재미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큼 우리 신앙의 살아있음과 활력과 확신을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찬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그 분이 주신 즐거움이다. 찬양 대회의 심사가 우울한 것은 찬양문화의 실망스런 수준 때문이 아니라 찬양대회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 신앙의 의기소침내지 죽어있음 때문이다.
찬양대회만큼 우리 신앙의 획일화와 재미없음을 드러내는 게 또 있을까. 그런 우울함을 가지고, 그러나 심사평을 재미있고 짧게 하기 위해 나는 파격적인 멘트로 심사평을 끝냈다.
“… 오늘 여러분의 찬양을 심사하기 위해 굳이 전문가의 견해가 필요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개별적인 팀에 대한 심사평은 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들에게서 웃음이 터져나왔고, 인사를 하고 심사위원장의 자리로 돌아오는 내게 한 여성 심사위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 마디를 건덴다.
“오늘 심사평은 한 마디로 엽기네요, 엽기!”
이 글은 <주간 기독교>에 제출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