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설교 / 교회개혁은 죽음을 요구한다[박득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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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3-01-28 19:37 / 조회 5,090 / 댓글0본문
설교 / 교회개혁은 죽음을 요구한다
교회개혁실천연대 주최 제1차 기도회, 요한복음 12:20-26
얼마 전 잘 아는 후배가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개혁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잠시 머뭇거리자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갔습니다. "몇 년 전에 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안 될 거라고 말씀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개혁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교회개혁운동을 하는 것과 안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개혁운동을 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머지 않아 개혁의 징조가 보일 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일하다가 아무 것도 안 보이면 어떻게 하나를 저 대신 우려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 고마운 후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언제쯤 한국교회 개혁이 이루어질지 예언해 주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개혁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비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밀알의 비유에 잘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이 교회개혁의 희망은 비로소 열리게 된다는 진리를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으면 합니다.
안 죽어도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의 밀알 비유의 진가를 알려면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아무도 안 죽어도 예수님께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을 것 같은 매우 긍정적 정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 살렸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깊은 감동에 젖을 수밖에 없었고 이 소식은 인터넷 통신망도 없었지만 순식간에 번져 갔습니다(요 11:1-45, 12:9-18).
예수님을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존재로 생각해왔던 종교지도자들은 대책회의를 열어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민족의 장래를 위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예수님을 죽일 전략을 짜기 시작했습니다(요 11:46-53).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닷새 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대대적인 환영을 했습니다. 이미 무덤에 묻힌 자를 살려낸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의 새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곧 천지가 개벽될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이를 바라 본 바리새인들은 낙심천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서로 걱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요 12:19).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접수하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이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또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 온 사람 중에 있었던 헬라인 몇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온 것입니다(요 12:21). 이를 보고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 12:12). 이쯤 되면 제자들은 멀게만 느껴졌던 승리가 이제 그들 앞으로 전진해오고 있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이렇게 무지개 꿈을 꿀만한 순간에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을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지금 상황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진정한 영광과 열매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야만 얻어질 수 있다는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꿈을 깨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경고 속에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이 아직은 참 영광과 열매가 아니라는 진단이 담겨져 있습니다.
많은 주의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도 영광에 이르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종종 빠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죽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곧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책망하듯이 말하였습니다(마 16:21-22). 이는 예수님을 나름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도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베드로로 하여금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고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위업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뜯어말리려고 하다가 그만 예수님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심한 꾸지람을 받았습니다(마 16:23). 예수님 자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역시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의 죽음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요 12:25-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는 헛된 꿈을 꾸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죽음 없이 성취된 것들은 겉으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진정한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보고 도취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된 열매에 속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교회는 겉으로는 매우 아름답고 거대해 보이지만 진정한 생명력을 상실하고 그 속은 많이 썩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선을 행하다 핍박을 받으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세상 뺨치는 세습과 재정비리가 일부 초대형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이루어지고 사회의 대형 비리사건 때마다 그 핵심에 어김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되어서 조롱을 받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초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이 한기총을 내세워 치른 시청 앞 기도회 역시 한국교회가 얼마나 부실하고 병든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시청 앞 기도회가 병든 열매인 이유는?
이번 시청 앞 기도회를 통해서 보수적인 교계지도자들과 한기총은 대미 관계와 대북 관계라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에 대해 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보수적 입장을 천명하고 그것이 마치 한국교계 전체의 주장인양 호도(糊塗)했습니다. 그들이 다수 국민의 정서에 걸맞는 구호들을 외쳤지만 이번 평화기도회가 왜 반역사적인 것이었는지를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시민들이 촛불시위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것은 한미의 평등한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소파를 개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군주둔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반미주의의 표현도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우방이 되는 길을 제시한 것뿐입니다. 촛불시위 참석자 중에 극히 일부가 반미주의적 발언과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촛불시위 자체 내에서 얼마든지 소화되고 자제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수 만 명의 성도들을 촛불시위의 현장인 시청 앞에 동원해 놓고 근거도 없는 전쟁 위기감을 부채질하며 한국사회에 반미감정과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만연해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열광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반대를 외치고 미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지지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 북한에게만 일방적으로 핵개발 포기와 NPT 탈퇴 철회를 요구했지 이와 관련된 미국의 책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구호들에 비하면 한미의 동등한 관계를 위한 소파 개정 요구는 2차 기도회에서 겨우 지나가듯이 언급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과거 소위 교계 지도자들의 정치적 행동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한국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이 독재정권에 짓밟혀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을 때,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인사들이 고문을 당하며 소리 없이 사라져 갈 때 소위 나라와 민족을 그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히 의지하는 교계 지도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독재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축복해주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런 잘못을 국민 앞에서 눈물을 뿌리며 사과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국민들이 겨우 스스로 일어나서 한국의 자주권을 회복하려고 하니 대대적으로 성도들을 동원해서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평화의 이름으로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그 흐름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계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진정으로 죽음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진실로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정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 온 자신의 기득권을 놓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북한정권을 두둔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이러한 적대감정과 두려움에서 먼저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죽음의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흔을 치료해 가면서 진정한 화해와 평화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자기를 포기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분노와 갈등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비극적 현실 앞에서 일단 외양이 크고 화려한 무엇인가를 성취하거나 정치적 능력이 있으면 무조건 교계 지도자로 높이 대접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이 막강한 자원을 바탕으로 해서 일구어낸 선한 사업들에 매료되어서 그들의 진상을 분별하지 못했던 무지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포기하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천대했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런 죄에 빠지는 것입니까? 사실은 저를 포함해서 우리 자신이 죽기를 두려워하고 원치 않을 뿐 아니라 죽지 않고도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을 항상 찾아 헤매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한 철저한 회개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교회개혁이 요구하는 죽음이란?
사실 예수님의 죽음과 제자들의 죽음을 각오한 순종으로 시작된 것은 유대교의 개혁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열매도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맺어질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후배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갔으면 합니다. 한국교회가 개혁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약간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난 16대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 교회개혁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후배는 "정치 영역에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많은 희생과 아픔이 쌓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그런 것이 쌓이지 않았다고 봅니다"고 응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콱 찔렸습니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개혁의 길을 가다가 어떤 손해가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비껴 가지 않고 돌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개혁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은 뱀 같은 지혜를 길러야 합니다. 쓸데없는 만용이나 오기를 부리거나 감정을 폭발시켜 불필요한 화를 자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만큼 온유하고 지혜로운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도 결국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정말 힘겨운 씨름을 해야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위하여! 오늘 한국교회는 이렇게 자기를 철저히 포기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기꺼이 따라 나설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요즘 '상록수'라는 노래가 저의 마음을 절절히 파고듭니다. '저 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 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의 솔잎 되리라/ 우리는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이 노래를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늘어갈 때 한국교회 희망의 여명은 밝아올 것입니다.
둘째,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개혁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 의(義)가 부서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도 역시 자기를 의지하는 교만을 꺾어버리는 작업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눈물의 기도로 개혁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최근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이라는 영화를 가족들과 함께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 중에 저에게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해리 포터가 거대한 독사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불사조가 날아와 그 물린 곳에 눈물을 흘려서 낫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중병을 낫게 할 수 있는 길은 하염없는 기도의 눈물로 독을 씻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개혁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할 일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참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대열에 기꺼이 함께 하지 않으시렵니까?
박득훈 (2003-01-27 오후 1:49:00)
조회수 : 778회
교회개혁실천연대 주최 제1차 기도회, 요한복음 12:20-26
얼마 전 잘 아는 후배가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개혁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잠시 머뭇거리자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갔습니다. "몇 년 전에 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안 될 거라고 말씀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개혁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교회개혁운동을 하는 것과 안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개혁운동을 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머지 않아 개혁의 징조가 보일 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일하다가 아무 것도 안 보이면 어떻게 하나를 저 대신 우려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 고마운 후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언제쯤 한국교회 개혁이 이루어질지 예언해 주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개혁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비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밀알의 비유에 잘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이 교회개혁의 희망은 비로소 열리게 된다는 진리를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으면 합니다.
안 죽어도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의 밀알 비유의 진가를 알려면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아무도 안 죽어도 예수님께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을 것 같은 매우 긍정적 정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 살렸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깊은 감동에 젖을 수밖에 없었고 이 소식은 인터넷 통신망도 없었지만 순식간에 번져 갔습니다(요 11:1-45, 12:9-18).
예수님을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존재로 생각해왔던 종교지도자들은 대책회의를 열어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민족의 장래를 위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예수님을 죽일 전략을 짜기 시작했습니다(요 11:46-53).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닷새 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대대적인 환영을 했습니다. 이미 무덤에 묻힌 자를 살려낸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의 새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곧 천지가 개벽될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이를 바라 본 바리새인들은 낙심천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서로 걱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요 12:19).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접수하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이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또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 온 사람 중에 있었던 헬라인 몇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온 것입니다(요 12:21). 이를 보고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 12:12). 이쯤 되면 제자들은 멀게만 느껴졌던 승리가 이제 그들 앞으로 전진해오고 있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이렇게 무지개 꿈을 꿀만한 순간에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을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지금 상황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진정한 영광과 열매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야만 얻어질 수 있다는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꿈을 깨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경고 속에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이 아직은 참 영광과 열매가 아니라는 진단이 담겨져 있습니다.
많은 주의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도 영광에 이르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종종 빠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죽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곧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책망하듯이 말하였습니다(마 16:21-22). 이는 예수님을 나름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도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베드로로 하여금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고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위업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뜯어말리려고 하다가 그만 예수님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심한 꾸지람을 받았습니다(마 16:23). 예수님 자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역시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의 죽음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요 12:25-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는 헛된 꿈을 꾸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죽음 없이 성취된 것들은 겉으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진정한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보고 도취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된 열매에 속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교회는 겉으로는 매우 아름답고 거대해 보이지만 진정한 생명력을 상실하고 그 속은 많이 썩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선을 행하다 핍박을 받으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세상 뺨치는 세습과 재정비리가 일부 초대형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이루어지고 사회의 대형 비리사건 때마다 그 핵심에 어김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되어서 조롱을 받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초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이 한기총을 내세워 치른 시청 앞 기도회 역시 한국교회가 얼마나 부실하고 병든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시청 앞 기도회가 병든 열매인 이유는?
이번 시청 앞 기도회를 통해서 보수적인 교계지도자들과 한기총은 대미 관계와 대북 관계라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에 대해 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보수적 입장을 천명하고 그것이 마치 한국교계 전체의 주장인양 호도(糊塗)했습니다. 그들이 다수 국민의 정서에 걸맞는 구호들을 외쳤지만 이번 평화기도회가 왜 반역사적인 것이었는지를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시민들이 촛불시위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것은 한미의 평등한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소파를 개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군주둔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반미주의의 표현도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우방이 되는 길을 제시한 것뿐입니다. 촛불시위 참석자 중에 극히 일부가 반미주의적 발언과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촛불시위 자체 내에서 얼마든지 소화되고 자제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수 만 명의 성도들을 촛불시위의 현장인 시청 앞에 동원해 놓고 근거도 없는 전쟁 위기감을 부채질하며 한국사회에 반미감정과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만연해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열광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반대를 외치고 미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지지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 북한에게만 일방적으로 핵개발 포기와 NPT 탈퇴 철회를 요구했지 이와 관련된 미국의 책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구호들에 비하면 한미의 동등한 관계를 위한 소파 개정 요구는 2차 기도회에서 겨우 지나가듯이 언급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과거 소위 교계 지도자들의 정치적 행동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한국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이 독재정권에 짓밟혀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을 때,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인사들이 고문을 당하며 소리 없이 사라져 갈 때 소위 나라와 민족을 그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히 의지하는 교계 지도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독재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축복해주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런 잘못을 국민 앞에서 눈물을 뿌리며 사과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국민들이 겨우 스스로 일어나서 한국의 자주권을 회복하려고 하니 대대적으로 성도들을 동원해서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평화의 이름으로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그 흐름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계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진정으로 죽음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진실로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정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 온 자신의 기득권을 놓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북한정권을 두둔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이러한 적대감정과 두려움에서 먼저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죽음의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흔을 치료해 가면서 진정한 화해와 평화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자기를 포기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분노와 갈등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비극적 현실 앞에서 일단 외양이 크고 화려한 무엇인가를 성취하거나 정치적 능력이 있으면 무조건 교계 지도자로 높이 대접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이 막강한 자원을 바탕으로 해서 일구어낸 선한 사업들에 매료되어서 그들의 진상을 분별하지 못했던 무지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포기하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천대했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런 죄에 빠지는 것입니까? 사실은 저를 포함해서 우리 자신이 죽기를 두려워하고 원치 않을 뿐 아니라 죽지 않고도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을 항상 찾아 헤매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한 철저한 회개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교회개혁이 요구하는 죽음이란?
사실 예수님의 죽음과 제자들의 죽음을 각오한 순종으로 시작된 것은 유대교의 개혁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열매도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맺어질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후배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갔으면 합니다. 한국교회가 개혁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약간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난 16대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 교회개혁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후배는 "정치 영역에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많은 희생과 아픔이 쌓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그런 것이 쌓이지 않았다고 봅니다"고 응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콱 찔렸습니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개혁의 길을 가다가 어떤 손해가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비껴 가지 않고 돌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개혁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은 뱀 같은 지혜를 길러야 합니다. 쓸데없는 만용이나 오기를 부리거나 감정을 폭발시켜 불필요한 화를 자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만큼 온유하고 지혜로운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도 결국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정말 힘겨운 씨름을 해야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위하여! 오늘 한국교회는 이렇게 자기를 철저히 포기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기꺼이 따라 나설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요즘 '상록수'라는 노래가 저의 마음을 절절히 파고듭니다. '저 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 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의 솔잎 되리라/ 우리는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이 노래를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늘어갈 때 한국교회 희망의 여명은 밝아올 것입니다.
둘째,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개혁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 의(義)가 부서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도 역시 자기를 의지하는 교만을 꺾어버리는 작업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눈물의 기도로 개혁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최근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이라는 영화를 가족들과 함께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 중에 저에게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해리 포터가 거대한 독사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불사조가 날아와 그 물린 곳에 눈물을 흘려서 낫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중병을 낫게 할 수 있는 길은 하염없는 기도의 눈물로 독을 씻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개혁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할 일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참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대열에 기꺼이 함께 하지 않으시렵니까?
박득훈 (2003-01-27 오후 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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