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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세훈] 김영봉 교수의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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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3-04-02 18:23 / 조회 5,945 /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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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교수의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읽고
고세훈, 고려대 행정학과
“나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교회에서 허드렛일을 할 때 머리가 숙여집니다.” 얼마전 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주일설교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만일 변변한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이 회중 가운데 있었다면? “나야 사회적 지위가 낮으니까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라고 체념했거나 “교회에서도 역시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대접을 받는 구나”하고 자조했을까. 혹은 허드렛일을 기꺼이 했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이 설교를 들었다면? 자신의 행위가 인정받은 데 대해 은근히 안도했을까. 그 목사는 물론 겸손이라는 덕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말을 했을 터였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허드렛일을 하면, 겸손한 것이고, 겸손한 일을 한 사람에게 머리가 숙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처럼 외견상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말들에 담긴 실체적 위험성이다.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허드렛일이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의 허드렛일이란 일의 기능적 분류에는 관계될지언정 일의 귀천(貴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상투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직업에의 귀천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는 ‘허드렛일=천한 일’의 등식을 암암리에 가정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 설교의 맥락이라면, 교회의 일에 허드렛일은 없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필요에 따라, 분업에 따라, 은사에 따라 누구나 무슨 일이든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교제를 위하여, 예수를 위하여 행해지기 때문이다. 교회의 식당과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은 허드렛일이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성가대에 서는 일은 허드렛일이 아닌가?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가르치고, 음악적 재질이 있는 사람이 성가대에 서는 것은 그런 일들이 허드렛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교회의 설교에서 허드렛일이 사회적 지위와 ‘연관돼서’ 거론된다면, 그것은 특정의 일(직종)이 지닌 가치의 높고 낮음, 많고 적음, 혹은 귀천을 암암리에 가정했기 때문이다. 위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세속사회의 관점이 얼마나 은밀하게 침투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런 ‘위험한 그럴듯한 말들’을 '반쪽 진리'(half-truth)라고 부른다. 그리고 반쪽 진리는 완전한 거짓(whole lie) 보다 더 위험하다. 원래부터 ‘반쪽짜리’ 진리란 그 자체가 모순인 바, 그것은 진리를 호도하고 거짓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반쪽 진리들로 충만해 있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호도하고 무엇을 은폐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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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교수의 ꡔ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ꡕ는 소위 ‘기독교 청부론’ 담론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통해 한국교회에 만연된 가장 심각한 반쪽 진리를 폭로한다. 김교수는 청부론이 왜 위험하고, 가난이든 부든 돈의 문제가 왜 영적 문제이며, 진정한 축복,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지를 성경과 복음의 맥락에서 그리고 수많은 문헌들을 동원해서 체계적으로 검토한다. 김교수에 따르면, 청부론이란 깨끗하고 떳떳한 내 몫의 부가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돈을 버는 과정이 정당하고, 수입의 일정부분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된다면 나머지 내 몫의 부는 내가 누릴 수 있으니, 크리스천들은 부자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천도 떳떳한 부를 즐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p. 14) 예컨대 성실히 일해서 사기나 부패에 법적으로 연루되지 않고, 수입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교회에 내고, 때와 절기에 따라 이웃돕기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청부’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소득의 취득과정도 온당하고 적정한 나눔 또한 실천했으니 남는 나의 몫을 누린다는 것, 이 얼마나 “균형잡힌” 시각인가!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돈의 영적 성격, 돈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성경에 따르면, 재물은 결코 중립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성과 끊임없이 교호(交互)하며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여 과잉되게 만든다. 부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노예로 변해있기 쉽다. (pp. 83-5) 충성의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욕망으로 전이(轉移)되는 것이다. 부자에게 좁은 길로 들어서는 일이 어리석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욕망’과 ‘필요’를 혼돈하거나 분별하기 귀찮아 할 즈음, 가난은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고,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남의 얘기가 돼있기 십상이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자를 경멸하기 전에 먼저 가난을 경멸한다. 또한 인간의 정신은 이미 부자가 된 만큼, 혹은 물질이 가져다 준 안락만큼, 동일한 만족을 얻는데 드는 비용의 엄청난 차이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세속적으로도 부자의 삶은 가난한 자의 삶에 비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부의 추구가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허무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부는 우리의 영적 눈을 멀게 하며, 부자는 스스로 가난을 택한 사람이 누리는 영적 풍요를 경험하기 어렵다. (pp. 40-5, 56-8) 재물과 하나님 나라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는 예수님의 단호함은 바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쳤던 그 단호함이다. 그것은 인간 배후에서 인간을 한없는 비탄의 나락으로 침몰시키는 죄에 대한 단호함이며 죄에 무력하게 휘둘리는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배어있는 단호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부는 위험하고 청부란 애초에 없으며,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에 한해서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누리는 부는 하나님이 주실 상을 가로챌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가 겸손해질(낮아지고 비워질) 소지를 앗아가리라는 점을 수차례 경고한다. 요컨대 부란 동적(動的) 개념이다. 그리고 청부론은 이를 간과한다.
무엇보다 청부론은 부의 성취방식의 깨끗함을 들어 부를 택하는 것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율법주의자가 아니라면, 인간의 삶의 양태에서 깨끗함을 감히 주장할 자 누구인가. 예수는 율법의 내용을 재해석하고 율법의 정신을 회복함으로써 우리의 위선을 질책했다. 예수는 십일조를 제대로 지키는 것의 불가능함을 얘기했고,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가 살인과 간음도 일상적으로 범할 수 밖에 없는 부정(不淨)한 존재임을 환기시켰다. 인간의 성정 자체가 부패해 있으며,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는, 대학이든 기업이든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크고 작게, 보이게 보이지 않게 악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나의 성취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나의 안팎에 편만해 있는 죄의 구조에 의존해 있다. 청부란 그 초입에서부터 불가능한 개념인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자유’경쟁의 뒤안길에는 빈곤과 불평등이 일상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자본주의의 오만은 더욱 깊어지고, 그럴수록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 이른바 시장실패는 더욱 심화될 것이 뻔하다. 오늘날의 세계화는 노동은 묶되, 자본은 풀자는, 즉 자본의 세계화이며 그것이 지금대로 방치된다면, 멀지 않아 세계는 20대 80의 불평등한 사회로 수렴할 것이라는 진단이 무성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이 때에 내가 20진영에 속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나 청부론은 이 뻔한 사실들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가릴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주어진 현실로서 정당화한다. (pp. 206-7) 청부론은 오만할 뿐 아니라 무지하고 복음을 왜곡한다.
사실 김교수의 시선은 청빈(淸貧)을 보는 데에서 더욱 빛난다. 우리는 나태, 방탕 등 개인적 성향 때문에 혹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구조가 정의롭지 못해서 가난할 수 있다. 김교수가 탁빈(濁貧)이라 부르는 가난이다. 그러한 가난은 동정과 교정의 대상일지언정 칭송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칭송하는 가난이 있다. 청빈이 그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청빈조차도 성경적 정신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pp. 51-6) 청빈정신은 의롭지 못한 부를 누리기 보다는 가난을 택한다는 기개(氣槪)이다. 김교수에 따르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청빈이 아니라 ‘영성적 가난’이다. 그것은 부정한 부를 거부할 뿐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소망해야 하는 자발적 가난이다. 그것은 자신은 끝없이 검소하고 절제하되, 적극적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함으로 세상의 가난을 치유하는 가난이다. 영성적 가난은 윤리적 의무감이나 정의감에서 기인한 가난과도 다르다. 그것은 내 소유로 부를 수 있는 정당한 몫이란 본래 없다는 것, 따라서 나눔이란 엄밀히 말하면 주인에게 빚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영적 깨달음의 결과이다. (pp. 135-6) 실제로 ‘소유하다’란 의미의 영어단어인 own은 ‘의무나 부채를 진다’라는 뜻의 owe와 같은 어원을 지닌다. 하나님의 은혜가 철회될 때, 인간의 모든 수고, 성취, 소유는 허사로 돌아가거니와, 하나님만이 증가시키시는 분이다. (전3:22; 5:18). 우리가 복음의 정신에 눈뜰수록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청빈론과 청부론은 모두 오만과 무지에 터를 잡고 있다. 그 둘은 모두 깨끗함을 자랑한다는 점에서 오만하며, 또 성경적 정신을 위배한다는 점에서 무지의 소산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성경은 무지와 오만이 둘 다 죄악이라고 가르친다.
죄는 도착적이고, 교활하며, 기만적이다. 죄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대상을 흐리는 것이다. 우리는 적이 분명치 않은 시대를 살고 있거니와, 오늘날 죄는 물질과 자본주의를 통해 우리의 심령과 교회를 교란한다. 우리가 물질이 기만적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새삼스럽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13:22) 특히 청부론은 물질과 신앙적 축복을 동일시 함으로써 크리스천의 판단기준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돈이 말하는”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면죄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중세의 부자들이 면죄부를 통해 안위를 얻었던 것처럼 청부론은 오늘의 부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가로막는 거짓된 위로이며 따라서 기만적이다.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 모두에 인용한 목사는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우니 사회적 지위가 높을 때 더욱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즉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당연한 일조차 하지 않고도 태연하거나, 당연한 일을 하고도 자만에 빠지기가 훨씬 쉬우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오히려 권고했어야 했다. 복음은 먼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불편해지지 않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열 도리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ꡔ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ꡕ는 시대와 자신을 복음에 비춰 정직하게 대면하려는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아픔의 책’이다. (尾)
이 글은 기독교사상 2003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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