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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설교> 교회는 진실하고 깨끗해야(뉴스앤조이/박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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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3-05-09 18:36 / 조회 5,314 /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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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진실하고 깨끗해야
(고후 11장 1-4절) 복음의 순결성을 회복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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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김승범


최근 어떤 신문 칼럼에서 역설적인 삶의 진실을 매우 실감나게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비바람에 절은 굴비는 천천히 썩어도 방금 뜬 생선회는 금방 맛이 가듯이…'. 그렇습니다. 교회도 신선한 공동체이기에 자칫하면 상하기가 더 쉬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지속적인 개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에서 그러한 열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서의 진실함과 깨끗함을 잃지나 않을까 열심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모습을 살피면서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교회를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2)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열심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질투로 말미암아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즉 고린도교회가 행여 유일한 남편인 그리스도 외에 다른 존재에 마음을 줄까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열심을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강한 질투심을 느끼는 이유는 2절 후반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순결한 처녀인 여러분을 오직 한 남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그리스도와 정혼시켰습니다. 그러나 아직 결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장래에 있을 이 결혼은 요한계시록 19장 7절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정혼 당시 그리스도를 향해 지녔던 순결한 사랑을 잃지 않고 마침내 유일한 남편인 그리스도와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열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와 같은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몇 주전 소망교회 앞에서 변칙적 세습 철회 촉구 등을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할 때였습니다. 소망교회의 지긋이 나이 든 한 분이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목사가 살인을 해도 나는 추종할 뿐이야'.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를 통해 소망교회 교인들의 곽선희 목사에 대한 충성심은 정말 하늘을 찌를 정도임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보다도 담임목사에게 더 사랑과 충성을 바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중증입니다.

그 성도가 이어서 한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 심판해'. 여기서 목회자들이 어떻게 성도들을 실질적으로 자기에게 맹종하게 만들어 왔는지 그 방법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의 잘못은 사람이 건드려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에 곁들여 성도들이 목회자의 잘못에 대해 비판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벌받은 예화를 실감나게 들려주면 성도들은 꼼짝없이 담임목사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거짓 사도들이 흔히 사용하는 억압정치에 다름 아닙니다(20).

물론 억압정치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달콤하고 현란한 말솜씨와 강력한 카리스마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합니다. 그러한 능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로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로 은근 슬쩍 끌어당기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매료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목회자를 놓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목회자에 대해 일정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고 때론 감시와 건강한 비판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조차 못하게 됩니다. 오늘 한국사회의 최고 지성인들과 중·상층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대형교회들에서 담임목사직 세습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점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탕에서 교권주의는 난공불락의 성을 쌓아왔습니다. 제2의 김교신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이미 그리스도의 위치에 올라앉아 정결한 처녀의 모습을 상실한 교회를 보고 가슴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성서조선』지를 통해 조선에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경험한 영적 기독교, 산 기독교 즉 그리스도 자신을 전하고자 온 몸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김교신은 지금까지도 교권주의자들에게는 매우 껄끄럽고 불편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김교신 자신은 사실 무교회주의라는 정형화된 개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분류한다고 해도 그는 결코 반교회주의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에 대한 정결한 사랑을 상실한 당시의 교회에 대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교회를 다시 그리스도에게 돌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바울의 열심으로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에게 드리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진실한 목회자들을 귀하게 볼 줄 아는 눈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를 부패시키는 것들을 경계해야(3-4)
바울은 열심으로 자신을 불태우는 만큼 깊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이와가 뱀의 간교한 유혹에 넘어가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3). 사실 그런 징조가 고린도교회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역군으로 가장한 거짓 사도와 기만적인 일꾼들이 고린도교회에 접근하자(13-15) 그들의 가르침에 혹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거짓은 매우 교활했습니다. 그들은 엉뚱한 거짓말을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예수를 전했고 성령을 받게 했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바울이 전해주었던 것과는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4).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도 『할머니』라는 시에서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진실을 반쯤 섞은 거짓말이 가장 무서운 거짓말
온통 새빨간 거짓말은 즉각 대항하여 싸우기 쉬운 법
그러나 일부만 진실인 거짓말은 훨씬 싸우기 어렵지

교회사를 돌아보면 교회들이 시대마다 그럴듯한 형태의 다양한 반쪽 진리에 넘어가 부패한 적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반쪽 진리인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이 횡행하고 있어서 한국교회를 부패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다른 예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아마 가장 인기 있는 예수는 은혜만 주고 십자가는 요구하지 않는 예수일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분임에 틀림없습니다(요 1:16). 그러므로 은혜가 메말라 팍팍한 율법주의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망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은혜를 주심과 함께 십자가를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물량적 성장주의가 주는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채 좁은 길의 인도자 예수를 포기한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은혜를 헐값에 덤핑하면서 교회를 넓은 길로 선도하는 편안한 예수를 열심히 좇고 있습니다. 양념 치듯 고난을 살짝 지나가듯이 언급하거나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예외사항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쪽 진리의 대표적 예입니다.

또한 한국교회를 감동시키는 예수는 더 이상 가난한 예수가 아니라 소위 금관의 예수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PDF판을 보면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가난과 성도의 부요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 부요함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사신 것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 부요를 누리며 살아야 하며, 받은 바 축복을 나누어주며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이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길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누는 삶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지만 이를 위해서 우선 부자가 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진리를 비틀고 있는 것이죠. 이런 분위기에서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는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물질의 부요를 숭상하는 우리 시대에 잘 맞아떨어지는 예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8장 9절의 맥락은 정 반대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독려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해진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은혜에 동참하자는 뜻으로 말씀한 것이죠(고후 8:1-9).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동을 받고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구제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우선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어야한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마게도냐 성도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둘째, 다른 성령을 경계해야 합니다. 방언과 예언 그리고 신유를 가능케 하는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러한 성령의 은사를 얼마든지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그러한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한 성령의 역사는 바로 사랑의 삶이라는 점을 바울은 분명히 하였습니다(고전 12:31-13:13).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대신하는 보혜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요 14: 16-17, 26; 15:26, 27; 16:7-15).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며 죄와 의(義) 그리고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는 역할을 하십니다. 즉 교회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진리 곧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에서 확연하게 증명되었습니다. 불과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도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자 이를 진실로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 가운데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애지중지했던 재물을 누구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공동체적 삶을 살았습니다(행 2:37-47; 4:31-36). 이런 삶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한국교회는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셋째, 다른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복음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바울은 사명을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행 20:24). 그런 바울이 얼마나 예수님 자신을 사랑했는지 이 땅에서 살아남아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지금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빌 1:21-23). 아! 정말 본받고 싶은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너무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이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력한 다른 복음은 앞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예수를 빙자한 맘몬의 복음입니다. 예수를 반듯하게 믿고 살면 꼭 부자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 줍니다.

물론 이 세상의 가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나가기 위하여 부(富)를 창조하고 공의롭게 분배하는 문화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다른 복음이 슬며시 들어올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과 도덕성 그리고 부를 창조했다는 승리감에 빠져 너무 쉽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부의 창조를 가능케 한 사회제도 자체가 얼마나 부패하고 불의한지를 예리하게 간파하지 못하고 실질적으로 절대화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불의한 제도에 대해 강력히 도전하여 변혁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이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하나님보다 부의 창출을 더 경배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넷째,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한다는 미명하에 자기 자신도 부의 즐거움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를 허락하셨다고 해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단순한 삶으로 자족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마 6:11; 25-34). 이는 부(富) 자체를 죄악시하는 금욕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은사 받은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이웃의 가난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신 15:1-11).

한국교회는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으로 지속적인 공략을 받아 부패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순결한 그의 신부로서의 진실함과 깨끗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섬길 일꾼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 앞에 우리 모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지 않으시렵니까?
박득훈 (2003-05-07 오후 12: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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