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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상상과 실천이 없는 교회에는 대안도 없다 (평화나무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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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25-05-13 11:30 / 조회 59 /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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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교회가 잘 변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회가 사회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어떻게 하면 될까?” 

 

아무리 질문을 반복하고, 여러 서적이나 세미나에 참석해도, 딱히 이것이 우리 교회에 맞는지 잘 모르겠고, 아는 듯하나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할 때가 많다. 교회 변화의 ‘적합성’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다. 

 

“이것이 좋다는 거예요? 저것이 좋다는 거예요?” 

 

교회 컨설팅이나 목회자 청빙, 정관 수정을 위한 워크숍이나 강의에 가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다. 나는 강조한다. 

 

“교회개혁과 변화의 정답은 없어요.” 

 

앉아 듣는 분들은 당황하고, 얼굴빛은 좋지 못하다. 똥 밟고 미끄러진 듯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답도 없이 감히, 이곳에서 강의하다니’ 

 

사례를 말해주고, 통계를 말해주는 것은 ‘오류를 줄이려는 것’이지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 이 말을 이해한 듯이 끄덕이다가 결정적일 때는 또 묻는다. 그러니까 ‘답’이 뭐냐고 말이다. 

 

이렇게 보면 나는 교회개혁과 변화에 대한 훌륭한 강사나 글쟁이는 아니다. 

 

답을 찾겠다고 오는 회중이나, 교회 변화와 개혁에 대한 명료한 답을 찾아 웹서핑하는 분에게 도리어 숙제를 내주고 고민하게 하니 실망과 재미없음에 다시 찾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변화하고 성장합니다.”

“목사? 성도들이 마음만 합하면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혁하면 교회가 좋아집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관심도 높아지고, 클릭 수도 많아질 것이나 이런 이야기는 거짓에 가깝다. 그렇게만 하면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말이 옳다면 교회는 왜 성장이 둔화하였을까? 이렇게 개혁하면 교회가 좋아진다는데 그렇게 개혁된 교회의 지금은 얼마나 영향력을 보이고 있는가? 

 

성도들이 마음만 합하면 뭐든지 한다고 하는데 마음을 합한 것이 진심으로 교회와 공동체를 생각한 결정인지는 누가 판단해 주나? 

 

섣부르게 교회 변화와 개혁의 ‘만병통치약’이라 말하는 허세를 그쳐야 한다. 

 

결론에 다다랐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해온 신앙생활과 교회 변화를 청산하고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가려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 묻는 분들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드린다. 

 

첫째, 무엇이든 시작도 하기 전에 해도 안 된다고 말하지 말아라. 

 

교회 변화, 개혁을 이야기하다 보면 금방 절망감과 무기력에 빠진다. ‘변해야 한다’는 마음은 굴뚝인데, 나 혼자 또는 몇몇 사람이 변화와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의심은 커지고, 해도 안될 것이니 시도조차 포기하려 한다. 

 

하느냐 마느냐, 되느냐 안 되느냐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다. 교회의 변화는 공동체 전체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변화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교회 변화와 개혁의 모든 짐을 지고 결과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의 모든 갈등을 마무리하고, 정의로운 전환을 일으키며,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시작하면 함께 실천하는 이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남겨 놓은 칠천 명의 용사가 있다. 

 

둘째, 교회가 할 일이 너무 많아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시작도 못하는 것은 교회를 몰라서 그렇다. 

 

스티븐 코비는 사람은 관심의 영역(Circle of Concern)과 영향력의 영역(Circle of Influence)이 다르다고 말했다. 한 개인도 관심의 영역이야 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영향력을 미치는 영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노동, 빈곤, 선교, 기후, 환경, 정의, 정치, 사회, 차별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이런 문제에 직접 ‘참여하고 연대’할 수 있는 영역은 다를 것이다. 중요한 관심사이지만 실천할 수 있는 영역과 부득이 관심의 영역으로 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 

 

교회 내부적으로도 그렇다. 예배, 기도, 찬양, 소그룹, 성경 공부 등에서도 관심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은 다르다. 성경 공부도, 개론 공부, 장절 공부, 교리적 공부 등등 그 안에서도 세부적인 영역이 다시 복잡하다. 한 교회나, 한 리더가 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른다는 표현이 맞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을 구분하여 교회 공동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과 지금 시급히 해야 할 것 그리고 시간을 두고 장기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들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불가능은 불가능으로 두자’ 그러나 교회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영역에서부터 행동을 시작하자. 

 

시작도 못 하는 것은 우리 교회가 어느 영역에 더 관심이 있고, 영향력을 미치며 실천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 영역은 목사와 몇몇 리더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생각과 참여로 만들어지는 영역이다. 

 

셋째, 교회 변화와 개혁에 대안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라.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 없는 것이다. 

 

어느 교회나 어떤 리더든 그 나름의 편견, 경험, 지식, 전문성 등에 있어서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에 제한이 있다. 우리의 문제는 변화와 개혁을 지금까지 해온 관성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것에 있다. 

 

새로움은 새로움이다. 기존의 프로세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베껴내는 것이 새로움은 아니다. 우리에겐 기존에 쓰던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을 생각하지 못하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한 상상이 필요하다. 변화와 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새로운 관점과 낯선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굳어진 생각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청년과 젊은 세대의 발칙한 상상이 필요하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시도가 많아져야 한다.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테두리 안을 의미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자유로운 상상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교회의 전통과 확립된 정관과 규범을 넘어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특별히 과거 학문적, 실천적 성취를 경험한 교회일수록 새로워지는 일은 더 어렵다. 과거의 성취는 오늘과 내일도 유효하다는 편견으로 고착하기에 십상이다. 이로 따라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대안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상상을 실천할 모험을 떠날 용기가 없었다. 하나님은 바람을 일으키셨으나 돛을 올려 바람을 타고 파도를 넘는 상상과 용기가 없다. 

 

넷째, 교회는 희망이 없고, 모두 망할 것이라 단정하지 말라. 교회 변화와 개혁의 뒷덜미를 붙들고 있는 것이 바로 ‘패배주의’다. 

 

10연패 하는 팀의 선수가 오늘 경기도 패배해 11연패가 될 것으로 생각하면 희망이 없다. 과거 어떤 선수는 연패를 끊기 위해서 머리를 짧게 하기도 하고, 루틴을 바꾸며, 다양한 시도를 한다. 이대로 시즌을 끝낼 수 없는 절박함에 어제를 바꾸고 새롭게 한다. 

 

교회가 위기이고,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원인을 찾고, 변수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세상이 곧 끝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 아니다. 교회에 더는 희망이 없는데 ‘뭘 더할 것이 있는가?’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교회가 망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의 교회는 어떠해야 할지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붕괴의 가능성으로 포기할 것이 아니다. 확률적 계산이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교회의 선택과 실천 그리고 적극적 행동이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결과는 확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탐색하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 얻어질 것이다. 

 

교회 변화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 

 

정답이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변명하고 싶고, 어차피 해도 안되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행동하기 이전에 행동에 대한 결과를 생각하면서 소극적일 수 있고, 행동하기 위하여 드는 품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실천이 소진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도 이해한다. 

 

그렇다고 아무런 실천과 행동이 없는 것도 변화와 개혁의 대안은 아니다. 용기를 가지고 상상을 실천하는 교회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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