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화의 추구가 한국교회 위기의 주범" [뉴조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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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7-08-24 13:10 / 조회 2,480 / 댓글 3본문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esuyoil.js></script> "대형화의 추구가 한국교회 위기의 주범"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제언① 진리의 권위 지닌 교회 되어야
2007년 08월 20일 (월) 김경호
아프간 피랍사태를 계기로 기독교를 향한 비판적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향한 비난의 소리는 한편으로 교회의 개혁을 기대하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이에 <뉴스앤조이>는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여러분들의 제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필자가 들꽃향린교회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고 싣습니다. <편집자 주>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는 ‘넌(non) 크리스천’은 없다. 크리스천 아닌 사람은 전부 ‘안티(anti) 크리스천’에 가깝다”고 합니다.
세계 100대 교회 중 50개 이상이 한국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종교비리의 80%가 개신교 비리이고 그중 대형 교회, 기도원의 비리들이 80% 이상입니다. 목회자 세습제도는 누구의 선택입니까? 대부분 목회자 자신이 욕심스러워서 세습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대형화된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자기들끼리 공고한 먹이사슬이 형성된 얽히고설킨 구조를 가진 생존 구조물입니다. 물질적으로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그 안에 직원이든지 아니면 교회와 관련된 사업에 납품을 하는 서로 이익을 나누는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그것은 그야말로 가장 안정된 기득권을 형성합니다.
이 먹이 사슬이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지도력이 바뀌는 것입니다. 누가 오더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안전한 선택으로 아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교인의 반이 떨어지고 온갖 욕을 먹더라도 거기에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들의 밥통을 지키는 데는 그러한 비난쯤은 능히 감수하고 일찍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나갑니다.
한국교회 위기의 본질, 외형적 성장 추구에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역설적으로 교회 성장주의가 가져왔습니다. 교회가 물량적 팽창주의로 치달으며 외적으로 대형화되려는 유혹을 갖는 데에 위기의 본질이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과 질보다는 교인의 머리수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시점부터 교회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자기 성장을 위하여 오히려 불의한 권력과 내통하게 되었으며, 고난을 회피하는 신앙구조를 양산하였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물결이 그대로 교회에 들어온 것이 성장주의입니다. 교회가 마치 다단계 판매조직과 같이 되어 신앙도 사라지고, 십자가도 사라지고, 교인들을 상품처럼 관리해나가는 관리만 남았습니다. 진정한 설교는 없어지고 요란한 선전만이 남게 된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다단계판매 조직처럼 되어서, 중간관리자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이러한 대교회주의는 지금 한국만큼 성공한 나라가 없습니다. 유럽에도 이렇게 큰 교회가 없고, 미국보다도 훨씬 더 신자유주의적입니다. 그러나 백화점이 한 개 들어오면 구멍가게 오륙백 개가 문을 닫는 것과 같이 큰 교회 하나가 생기면 주변에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아야합니다.
대교회들은 교회의 모든 수입을 투입해 새신자를 재생산하는 체계를 운영합니다. 교구장·중간교역자·소구역을 책임지는 전도사 그야말로 교인 관리를 위해 모든 재원을 쏟아 붓고 더 편리한 시설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이를 부추기는 목회자와 이를 즐기는 교인들을 만들어가는 교회에는 십자가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대부분의 유급 관리자와 평신도 봉사자로 이루어져 확실하게 교인들을 관리하는 다단계 판매조직 같은 체계를 세워 서로 경쟁시키면 급격히 교인이 불어납니다. 교회는 중간 관리 인력을 확보하는 데 모든 여력을 투입해야 하고 주변 사회를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역량을 쓸 여력도 마음도 없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십만 명이 모이거나, 백 명이 모이거나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는 일은 똑같습니다. 모두 교회 자체를 위한 일뿐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성장하면 사회를 위해 일을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기에 계속해서 몸집을 불리기 위해 달려가는 것 외에는 그 길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대형화 반대해야 할 이유
1. 대형 교회는 자연히 태생적으로 보수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 서로 간의 인지도가 떨어지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장로나 교회의 대표들이 선출되기에 신앙적 양심, 인격에 관계없이 사회에서의 저명인사가 그대로 교회의 대표로 선출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사회의 헤게모니가 그대로 교회의 헤게모니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는 한국교회를 사회모순구조의 축소판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교회가 그래도 신앙적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될 때 사회가 크게 잘못 나갈 때는 굵게 한마디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는 것인데 사회에서 온갖 비리에 대상으로 지목 받는 인사들이 그대로 교회의 대표구조로 이양됩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범법 행위가 드러나고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라도 교회는 그들을 옹호하고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줍니다.
2. 대형화된 교회는 사회정의나 지역사회의 문제에 관여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어려움이 따르고 위험부담이 되는 일을 시행하려면 교인 전체의 합의가 필수적인데 대형화된 교회는 교인들의 합의를 끌어낼 수 없습니다. 새 일을 시도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변화에 눈감고 전통적으로 하던 일만 하게 되는 것이요, 새 시대에 발맞추기란 불가능해집니다. 또한 누구에게나 무난한 일만 하다 보니 결국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반면 쉽게 한자리에서 의사를 모을 수 있는 작은 교회들은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그들만의 장점이 있습니다. 작은 교회들이 큰 교회되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덩치만 크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구조를 가진 대형 교회들에 비해 하나님나라를 위해 최전선에 나가 기동성 있게 일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활용하여 지역사회 구석구석 깊숙이 파고 들어가 변화시켜내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큰 교회여야 한다’는 논리는 뒤집으면 큰 교회되기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이것은 스스로 족쇄를 씌우는 논리입니다.
3. 한 조사에 따르면, 대형 교회에 나가는 가장 큰 동기가 사회 저명인사와 같이 사귈 수 있고 신분적 지위가 상승된다는 것이 첫 번째 동기였습니다.
교인 가운데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이 그들에게 띠를 띠고 주차 서비스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가면 내가 높은 신분으로 대접받는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문제는 진정 ‘가난한 자들이 기쁜 소식’을 듣고, 우리 사회전체가 ‘더불어 함께하는 사회’가 되게 하는 것이 복음인데 진짜복음은 사라지고 얄팍한 눈가림용 복음만을 팔고 있습니다.
4. 대형 교회를 찾는 또 다른 이유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서처럼 자신을 노출하거나 드러나게 하지 않고 조용히 예배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 추세에 발맞춘 이러한 신앙형태가 과연 권장할 만한 것인가는 되물어보아야 합니다. 오랜 관습대로 신앙생활을 중단할 수는 없지만 다른 활동을 하기는 부담스럽고 가장 소극적인 신도생활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곳, 곧 ‘냉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선교가 과연 앞으로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앙을 만들어 갈 수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자칫하면 지극히 소극적인 신앙형태를 키워감으로 기독교의 신도훈련을 포기하고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한편 대형 교회는 ‘성장’이라는 이념을 전파하는 대형 성장 세미나를 주도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을 양적팽창주의 일색으로 변질케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세미나를 통해 수적 증가를 가져오는 각종 전략과 묘방을 전파합니다. 그래서 이를 따르는 중소 교회의 목회자들은 사실 대형 교회의 맛도 보지 못하면서 충실하게 그들의 논리를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형버스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교인들을 안방까지 가서 훑어오고 오호작통의 치밀한 조직망을 완성하여 물적 양적으로 대세를 쥐고 있는 그들이 자기를 모방한 아류의 작은 교회들을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작은 교회들이 그들을 흉내 내는 동안 이미 모든 것을 가진 기득권 교회는 경쟁자 없이 유유자적하게 그들을 따돌리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힘과 권위를 지닌 교회가 되어야
목회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대형화를 지향하는 추세이다 보니 눈치 빠른 교인들은 작은 교회에 참여하여 그것이 클 때까지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큰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훨씬 손쉽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제 꾀에 제가 속는 격입니다. 대형 교회의 성장 세미나는 시장의 논리로 볼 때 대형 교회가 교인들을 독점적이고 우월한 지위를 갖고자 하는 전략입니다.
한국교회를 구원할 힘은 대형 교회에서 나오질 않는다. 그들의 먹이사슬은 거대한 바벨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작은 것들을 들어서, 세상에 약한 것을 택해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김경호 목사.
구세주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는 1975년 설립해서 1995년에 150명의 교인이었는데 6개 교회로 분가를 했습니다. 그중에 한 공동체인 ‘토기장이의 집’은 2006년 미국을 움직이는 10대 교회에 선출되었습니다. 불과 30~40 명 정도의 작은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인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도덕적 힘의 크기, 진리에서 오는 권위의 힘으로 미국의 10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짓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수치와 패배의 형틀입니다. 잘 되도 시원치 않은 판에 십자가를 지자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그들은 멸망할 자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매우 약하게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목사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제언① 진리의 권위 지닌 교회 되어야
2007년 08월 20일 (월) 김경호
아프간 피랍사태를 계기로 기독교를 향한 비판적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향한 비난의 소리는 한편으로 교회의 개혁을 기대하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이에 <뉴스앤조이>는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여러분들의 제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필자가 들꽃향린교회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고 싣습니다. <편집자 주>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는 ‘넌(non) 크리스천’은 없다. 크리스천 아닌 사람은 전부 ‘안티(anti) 크리스천’에 가깝다”고 합니다.
세계 100대 교회 중 50개 이상이 한국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종교비리의 80%가 개신교 비리이고 그중 대형 교회, 기도원의 비리들이 80% 이상입니다. 목회자 세습제도는 누구의 선택입니까? 대부분 목회자 자신이 욕심스러워서 세습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대형화된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자기들끼리 공고한 먹이사슬이 형성된 얽히고설킨 구조를 가진 생존 구조물입니다. 물질적으로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그 안에 직원이든지 아니면 교회와 관련된 사업에 납품을 하는 서로 이익을 나누는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그것은 그야말로 가장 안정된 기득권을 형성합니다.
이 먹이 사슬이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지도력이 바뀌는 것입니다. 누가 오더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안전한 선택으로 아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교인의 반이 떨어지고 온갖 욕을 먹더라도 거기에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들의 밥통을 지키는 데는 그러한 비난쯤은 능히 감수하고 일찍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나갑니다.
한국교회 위기의 본질, 외형적 성장 추구에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역설적으로 교회 성장주의가 가져왔습니다. 교회가 물량적 팽창주의로 치달으며 외적으로 대형화되려는 유혹을 갖는 데에 위기의 본질이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과 질보다는 교인의 머리수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시점부터 교회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자기 성장을 위하여 오히려 불의한 권력과 내통하게 되었으며, 고난을 회피하는 신앙구조를 양산하였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물결이 그대로 교회에 들어온 것이 성장주의입니다. 교회가 마치 다단계 판매조직과 같이 되어 신앙도 사라지고, 십자가도 사라지고, 교인들을 상품처럼 관리해나가는 관리만 남았습니다. 진정한 설교는 없어지고 요란한 선전만이 남게 된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다단계판매 조직처럼 되어서, 중간관리자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이러한 대교회주의는 지금 한국만큼 성공한 나라가 없습니다. 유럽에도 이렇게 큰 교회가 없고, 미국보다도 훨씬 더 신자유주의적입니다. 그러나 백화점이 한 개 들어오면 구멍가게 오륙백 개가 문을 닫는 것과 같이 큰 교회 하나가 생기면 주변에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아야합니다.
대교회들은 교회의 모든 수입을 투입해 새신자를 재생산하는 체계를 운영합니다. 교구장·중간교역자·소구역을 책임지는 전도사 그야말로 교인 관리를 위해 모든 재원을 쏟아 붓고 더 편리한 시설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이를 부추기는 목회자와 이를 즐기는 교인들을 만들어가는 교회에는 십자가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대부분의 유급 관리자와 평신도 봉사자로 이루어져 확실하게 교인들을 관리하는 다단계 판매조직 같은 체계를 세워 서로 경쟁시키면 급격히 교인이 불어납니다. 교회는 중간 관리 인력을 확보하는 데 모든 여력을 투입해야 하고 주변 사회를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역량을 쓸 여력도 마음도 없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십만 명이 모이거나, 백 명이 모이거나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는 일은 똑같습니다. 모두 교회 자체를 위한 일뿐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성장하면 사회를 위해 일을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기에 계속해서 몸집을 불리기 위해 달려가는 것 외에는 그 길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대형화 반대해야 할 이유
1. 대형 교회는 자연히 태생적으로 보수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 서로 간의 인지도가 떨어지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장로나 교회의 대표들이 선출되기에 신앙적 양심, 인격에 관계없이 사회에서의 저명인사가 그대로 교회의 대표로 선출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사회의 헤게모니가 그대로 교회의 헤게모니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는 한국교회를 사회모순구조의 축소판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교회가 그래도 신앙적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될 때 사회가 크게 잘못 나갈 때는 굵게 한마디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는 것인데 사회에서 온갖 비리에 대상으로 지목 받는 인사들이 그대로 교회의 대표구조로 이양됩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범법 행위가 드러나고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라도 교회는 그들을 옹호하고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줍니다.
2. 대형화된 교회는 사회정의나 지역사회의 문제에 관여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어려움이 따르고 위험부담이 되는 일을 시행하려면 교인 전체의 합의가 필수적인데 대형화된 교회는 교인들의 합의를 끌어낼 수 없습니다. 새 일을 시도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변화에 눈감고 전통적으로 하던 일만 하게 되는 것이요, 새 시대에 발맞추기란 불가능해집니다. 또한 누구에게나 무난한 일만 하다 보니 결국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반면 쉽게 한자리에서 의사를 모을 수 있는 작은 교회들은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그들만의 장점이 있습니다. 작은 교회들이 큰 교회되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덩치만 크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구조를 가진 대형 교회들에 비해 하나님나라를 위해 최전선에 나가 기동성 있게 일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활용하여 지역사회 구석구석 깊숙이 파고 들어가 변화시켜내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큰 교회여야 한다’는 논리는 뒤집으면 큰 교회되기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이것은 스스로 족쇄를 씌우는 논리입니다.
3. 한 조사에 따르면, 대형 교회에 나가는 가장 큰 동기가 사회 저명인사와 같이 사귈 수 있고 신분적 지위가 상승된다는 것이 첫 번째 동기였습니다.
교인 가운데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이 그들에게 띠를 띠고 주차 서비스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가면 내가 높은 신분으로 대접받는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문제는 진정 ‘가난한 자들이 기쁜 소식’을 듣고, 우리 사회전체가 ‘더불어 함께하는 사회’가 되게 하는 것이 복음인데 진짜복음은 사라지고 얄팍한 눈가림용 복음만을 팔고 있습니다.
4. 대형 교회를 찾는 또 다른 이유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서처럼 자신을 노출하거나 드러나게 하지 않고 조용히 예배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 추세에 발맞춘 이러한 신앙형태가 과연 권장할 만한 것인가는 되물어보아야 합니다. 오랜 관습대로 신앙생활을 중단할 수는 없지만 다른 활동을 하기는 부담스럽고 가장 소극적인 신도생활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곳, 곧 ‘냉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선교가 과연 앞으로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앙을 만들어 갈 수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자칫하면 지극히 소극적인 신앙형태를 키워감으로 기독교의 신도훈련을 포기하고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한편 대형 교회는 ‘성장’이라는 이념을 전파하는 대형 성장 세미나를 주도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을 양적팽창주의 일색으로 변질케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세미나를 통해 수적 증가를 가져오는 각종 전략과 묘방을 전파합니다. 그래서 이를 따르는 중소 교회의 목회자들은 사실 대형 교회의 맛도 보지 못하면서 충실하게 그들의 논리를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형버스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교인들을 안방까지 가서 훑어오고 오호작통의 치밀한 조직망을 완성하여 물적 양적으로 대세를 쥐고 있는 그들이 자기를 모방한 아류의 작은 교회들을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작은 교회들이 그들을 흉내 내는 동안 이미 모든 것을 가진 기득권 교회는 경쟁자 없이 유유자적하게 그들을 따돌리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힘과 권위를 지닌 교회가 되어야
목회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대형화를 지향하는 추세이다 보니 눈치 빠른 교인들은 작은 교회에 참여하여 그것이 클 때까지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큰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훨씬 손쉽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제 꾀에 제가 속는 격입니다. 대형 교회의 성장 세미나는 시장의 논리로 볼 때 대형 교회가 교인들을 독점적이고 우월한 지위를 갖고자 하는 전략입니다.
한국교회를 구원할 힘은 대형 교회에서 나오질 않는다. 그들의 먹이사슬은 거대한 바벨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작은 것들을 들어서, 세상에 약한 것을 택해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김경호 목사.
구세주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는 1975년 설립해서 1995년에 150명의 교인이었는데 6개 교회로 분가를 했습니다. 그중에 한 공동체인 ‘토기장이의 집’은 2006년 미국을 움직이는 10대 교회에 선출되었습니다. 불과 30~40 명 정도의 작은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인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도덕적 힘의 크기, 진리에서 오는 권위의 힘으로 미국의 10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짓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수치와 패배의 형틀입니다. 잘 되도 시원치 않은 판에 십자가를 지자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그들은 멸망할 자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매우 약하게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