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제대로 선발하자 [뉴조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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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6-03-07 16:36 / 조회 1,844 / 댓글 0본문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esuyoil.js></script> 목회자, 제대로 선발하자
장창수(rassvet)
바람직한 신학 교육
조국 교회의 어지러움과 혼란을 본다. 문제의 원인이 복합적이겠지만 목회자 후보생들의 선발과 교육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된다. 한국의 문화는 유교적인 면이 강해 정적이다. 또 합리성이 결여되어 자기를 따르거나 신앙이 좋다고 여겨지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목회 자원자들을 모두 신학원에 보낸다. 신학 교육의 내용은 또 어떤가. 지적이며 기능적인 면에 치우쳐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준 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제시하는 예수님의 본을 통해 한국교회는 혼란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 후보는 신중히 선택돼야
예수님의 12사도 선택에 대해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6:12~13)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 중 12 사도들을 택하여야 했다. 예수님은 아주 신중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낸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사도들을 선택하기 원했고 이를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먼저 아버지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향후 사도들은 예수님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목적과 뜻에 따라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역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목회자 후보생을 선출하기 위해 교회와 신학원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예수님은 본을 분명히 보이셨다. 담임 목회자는 신자들 중 누군가 목회자가 되겠다고 다 신학원에 보내선 안 된다. 목회자 후보생들이 신학원이나 교단과 교회가 아닌 하늘 아버지의 목적과 뜻에 합당할 수 있는가 또는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보아가며 선발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무엇보다 먼저 교회들이 기도하며 신중하게 목회자 후보생들을 선발하여 신학원으로 보내야 한다.
목회자 후보생들은 특정 목회자의 사람이어선 안 되며 나아가 교단을 위한 목회자여도 안 된다. 이들은 교회나 교단 그리고 민족주의를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일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교회의 확장을 위해 일해야 하며 그리고 이 우주적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다양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큰 포용력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이 지상에 성장시키고 확장시키기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이 때 기독교 교회들은 분열하는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 신학 교육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예수님이 12사도들을 선택하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마가복음도 이렇게 기록한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3~15)
예수님이 12사도를 선택한 목적은 둘이다. 첫째는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이들을 보내 전도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가지 목적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물론 첫째 것이다. 이를 분명히 하려고 예수님이 두 번째 목적보다 첫 번째 목적을 앞세워 말하셨다고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마가복음만이 기록한다.
첫째 목적을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항상 동행하며 그들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이들을 부르자마자 당장 사역에 임하도록 절대 재촉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역을 감당하기 전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살며 스승을 알고 배워야 했다.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분, who)이며 무엇(직분, what)을 하러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배웠다. 동시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예수님이 어떻게 메시아로서 자신의 삶을 살며 사명을 수행하는지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즉 어떻게(how) 예수님이 메시아(신분)로서 이웃을 사랑했는지(직분)를 배웠다.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앞으로 사도들이 어떻게(how) 사도들로서(신분) 예수님이 사도들을 택한 둘째 목적인 사명(사도 직분)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12사도들의 선택 목적은 사실상 둘째 것에 있었지만 이를 위해 먼저 사도들은 예수님을 배워야 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첫째 목적이 말하는 훈련을 받지 않고 둘째 목적의 사명을 수행하려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목적에 빗나간 사명이다. 즉 예수님이 구속주와 주님으로 보이신 본을 따라 둘째 목적이 지칭하는 사명을 사도들이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사명 수행은 비성경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자선 활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는 섬기는 자여야
그렇다면 오늘날 신학 교육의 문제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신학 교육은 예수님의 신분(who)과 사역(what)에 대한 구속사적인 즉 신학적인 가르침에 집중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어떻게(how) 사역을 수행했는가에 대한 가르침에선 아주 빈약하다. 이 때문에 신학 교육은 지극히 지적(知的)이다. 그 결과 신학 지식을 쌓을수록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자만하여 교만하기 쉽다. 지식은 교만케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세상의 인문사회 과학자들과 별 차이가 없다. 이들 과학자들은 높은 전문성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고 그리고 그에 맞는 합당한 명예와 지위 그리고 부귀를 요구한다.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가 이에서 예외인가? 그렇지만 않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예수님이 의인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어떻게(how) 이 땅의 삶을 사셨고, 어떻게(how) 처신하여 죄인 이웃들에게 관계했고 그리고 어떻게(how) 메시아 사명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깊은 묵상과 가르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됨이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예수님의 인간 됨됨이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항상 적다. 그 결과 예수님이 어떻게 인류 사랑을 실천했는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식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의 많고 적음은 교만케 하지만 ‘예수님을 안다’면 교만할 수 없고 겸손할 것이다. 예수님을 진정 안다면 신학자와 목회자는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 오셨고 그렇게 사셨음을 배울 것이며 자연스럽게 그를 아는 만큼 섬김의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안다는 참 증거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섬김의 삶을 살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신학 교육이 장래 목회자를 교만케 하는 지적 교육으로 치우친 증거이다.
신학 교육은 십자가를 가르쳐야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사도들의 잘못 즉 오늘날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과 실수를 교정하시려 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 즉 얼마 지나면 곧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 때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먼저 사도들에게 물었다. 그 뒤 사도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예수님은 물었다. (마 16:13~15) 이렇게 베드로는 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신앙고백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이 때 비로소 처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곧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의 그리스도’임을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했다. (마 16:20)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이 경고는 간과되어선 안 되었었다. 즉 이 때부터 사도들은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보다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사53장)으로 알고 믿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이 ‘영광의 그리스도’로 남기를 원했다. 예수님 덕분에 이들은 앞으로 곧 임할 것으로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런 자리에 앉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인류를 섬기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할 십자가의 고난을 강력하게 예수님에게 말렸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혹독하게 책망했다. (마 16:21~23)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은 말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4~25)
예수님은 ‘영광의 그리스도’라는 신학 지식이 제자들에게 헛된 기대감을 주게 됨을 알았다. 이 대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고난의 종’으로 알고 배우기를 원하셨다. 즉 예수님은 ‘고난의 종’이라는 신앙고백이 주는 자기부정의 원리에 따라 앞으로 사도들이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할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따끔하게 충고했다. 이런 사명 수행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이 무엇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는 것이어야 함을 뜻했다. 스승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신자들이라면 자기부정과 자기비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오늘도 말한다.
이런 자기부정이 신학 지식의 습득과 아울러 신학원 연수 과정에서 훈련되지 않는다면 향후 한국 교회의 미래는 여전히 어두울 것이다. 신학 교육은 사랑을 겸한 지식 교육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각종 사회적인 비리(非理)에 연루됨을 보면서 어떻게 목회자 후보생들을 선발하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주여! 조국 교회에 자비와 긍휼을 베푸소서!
장창수 (러시아 선교사)
장창수(rassvet)
바람직한 신학 교육
조국 교회의 어지러움과 혼란을 본다. 문제의 원인이 복합적이겠지만 목회자 후보생들의 선발과 교육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된다. 한국의 문화는 유교적인 면이 강해 정적이다. 또 합리성이 결여되어 자기를 따르거나 신앙이 좋다고 여겨지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목회 자원자들을 모두 신학원에 보낸다. 신학 교육의 내용은 또 어떤가. 지적이며 기능적인 면에 치우쳐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준 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제시하는 예수님의 본을 통해 한국교회는 혼란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 후보는 신중히 선택돼야
예수님의 12사도 선택에 대해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6:12~13)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 중 12 사도들을 택하여야 했다. 예수님은 아주 신중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낸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사도들을 선택하기 원했고 이를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먼저 아버지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향후 사도들은 예수님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목적과 뜻에 따라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역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목회자 후보생을 선출하기 위해 교회와 신학원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예수님은 본을 분명히 보이셨다. 담임 목회자는 신자들 중 누군가 목회자가 되겠다고 다 신학원에 보내선 안 된다. 목회자 후보생들이 신학원이나 교단과 교회가 아닌 하늘 아버지의 목적과 뜻에 합당할 수 있는가 또는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보아가며 선발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무엇보다 먼저 교회들이 기도하며 신중하게 목회자 후보생들을 선발하여 신학원으로 보내야 한다.
목회자 후보생들은 특정 목회자의 사람이어선 안 되며 나아가 교단을 위한 목회자여도 안 된다. 이들은 교회나 교단 그리고 민족주의를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일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교회의 확장을 위해 일해야 하며 그리고 이 우주적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다양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큰 포용력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이 지상에 성장시키고 확장시키기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이 때 기독교 교회들은 분열하는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 신학 교육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예수님이 12사도들을 선택하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마가복음도 이렇게 기록한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3~15)
예수님이 12사도를 선택한 목적은 둘이다. 첫째는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이들을 보내 전도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가지 목적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물론 첫째 것이다. 이를 분명히 하려고 예수님이 두 번째 목적보다 첫 번째 목적을 앞세워 말하셨다고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마가복음만이 기록한다.
첫째 목적을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항상 동행하며 그들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이들을 부르자마자 당장 사역에 임하도록 절대 재촉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역을 감당하기 전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살며 스승을 알고 배워야 했다.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분, who)이며 무엇(직분, what)을 하러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배웠다. 동시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예수님이 어떻게 메시아로서 자신의 삶을 살며 사명을 수행하는지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즉 어떻게(how) 예수님이 메시아(신분)로서 이웃을 사랑했는지(직분)를 배웠다.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앞으로 사도들이 어떻게(how) 사도들로서(신분) 예수님이 사도들을 택한 둘째 목적인 사명(사도 직분)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12사도들의 선택 목적은 사실상 둘째 것에 있었지만 이를 위해 먼저 사도들은 예수님을 배워야 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첫째 목적이 말하는 훈련을 받지 않고 둘째 목적의 사명을 수행하려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목적에 빗나간 사명이다. 즉 예수님이 구속주와 주님으로 보이신 본을 따라 둘째 목적이 지칭하는 사명을 사도들이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사명 수행은 비성경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자선 활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는 섬기는 자여야
그렇다면 오늘날 신학 교육의 문제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신학 교육은 예수님의 신분(who)과 사역(what)에 대한 구속사적인 즉 신학적인 가르침에 집중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어떻게(how) 사역을 수행했는가에 대한 가르침에선 아주 빈약하다. 이 때문에 신학 교육은 지극히 지적(知的)이다. 그 결과 신학 지식을 쌓을수록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자만하여 교만하기 쉽다. 지식은 교만케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세상의 인문사회 과학자들과 별 차이가 없다. 이들 과학자들은 높은 전문성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고 그리고 그에 맞는 합당한 명예와 지위 그리고 부귀를 요구한다.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가 이에서 예외인가? 그렇지만 않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예수님이 의인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어떻게(how) 이 땅의 삶을 사셨고, 어떻게(how) 처신하여 죄인 이웃들에게 관계했고 그리고 어떻게(how) 메시아 사명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깊은 묵상과 가르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됨이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예수님의 인간 됨됨이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항상 적다. 그 결과 예수님이 어떻게 인류 사랑을 실천했는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식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의 많고 적음은 교만케 하지만 ‘예수님을 안다’면 교만할 수 없고 겸손할 것이다. 예수님을 진정 안다면 신학자와 목회자는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 오셨고 그렇게 사셨음을 배울 것이며 자연스럽게 그를 아는 만큼 섬김의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안다는 참 증거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섬김의 삶을 살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신학 교육이 장래 목회자를 교만케 하는 지적 교육으로 치우친 증거이다.
신학 교육은 십자가를 가르쳐야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사도들의 잘못 즉 오늘날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과 실수를 교정하시려 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 즉 얼마 지나면 곧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 때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먼저 사도들에게 물었다. 그 뒤 사도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예수님은 물었다. (마 16:13~15) 이렇게 베드로는 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신앙고백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이 때 비로소 처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곧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의 그리스도’임을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했다. (마 16:20)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이 경고는 간과되어선 안 되었었다. 즉 이 때부터 사도들은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보다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사53장)으로 알고 믿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이 ‘영광의 그리스도’로 남기를 원했다. 예수님 덕분에 이들은 앞으로 곧 임할 것으로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런 자리에 앉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인류를 섬기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할 십자가의 고난을 강력하게 예수님에게 말렸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혹독하게 책망했다. (마 16:21~23)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은 말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4~25)
예수님은 ‘영광의 그리스도’라는 신학 지식이 제자들에게 헛된 기대감을 주게 됨을 알았다. 이 대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고난의 종’으로 알고 배우기를 원하셨다. 즉 예수님은 ‘고난의 종’이라는 신앙고백이 주는 자기부정의 원리에 따라 앞으로 사도들이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할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따끔하게 충고했다. 이런 사명 수행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이 무엇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는 것이어야 함을 뜻했다. 스승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신자들이라면 자기부정과 자기비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오늘도 말한다.
이런 자기부정이 신학 지식의 습득과 아울러 신학원 연수 과정에서 훈련되지 않는다면 향후 한국 교회의 미래는 여전히 어두울 것이다. 신학 교육은 사랑을 겸한 지식 교육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각종 사회적인 비리(非理)에 연루됨을 보면서 어떻게 목회자 후보생들을 선발하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주여! 조국 교회에 자비와 긍휼을 베푸소서!
장창수 (러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