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무엇으로 정치발전에 기여할 것인가[뉴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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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04-11-15 16:27 / 조회 2,533 / 댓글 0본문
복음주의, 무엇으로 정치발전에 기여할 것인가 |
정치참여에 대한 복음주의 기독교…단선적 현실인식과 섣부른 당파성을 경계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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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 원칙의 폐기 기왕에 복음주의 기독교가 새 세기에 들어서자 금과옥조로 갖고 있던 정교분리의 원칙은 깨졌다. 물론 그 이전의 정교분리라는 것도 독재 세력에 대한 침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고, 그 침묵은 곧 불의에 대한 동조였다. 여기에 일부 교계 지도자들의 반민주적 행적을 들춰내면 허약한 논리조차 설 자리는 없다. 그런데도 대다수 일반 성도들에게 강단에서 선포되는 원칙은 '정교분리'였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교회의 정교분리는 '선언적 정교분리'라고 고쳐 써야 옳다. 1991년 창간된 <복음과상황>을 중심으로 '로잔언약'(1974)의 내용인 '복음주의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이 비로소 기독교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많은 공감을 얻었다. 기존의 로잔언약의 정신을 공감해 온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경실련을 필두로 하는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의 태동세력이 되어 간접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당과 의회정치 영역에 대한 도전은 2000년 이전까지 거의 전무한 걸로 기억한다. 한편 2000년 민주노동당 창립으로 노동계가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에 나섰고, 2002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환경운동이, 2004년에 기독교가 나섬으로써 노동, 시민운동, 종교 등 이전까지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던 부문들이 후보를 내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는 일면 참여주체들의 정치적 야심을 짐작케 하는 면이 없지 않으나, 정치참여가 사회운동의 한 방편으로 대두되는 변곡점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사회운동=의회 밖의 활동, 혹은 비당파적'이라는 등식은 깨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기존 정치권과는 차별적인 운동적 동력이나 실체가 사라진 것도 아니기에 시민사회운동은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논리적 패러다임을 생산해야 할 처지다. 2000년에 창립된 공의정치포럼(현 공의정치실천연대)은 스스로 정당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도 의회에 진출할 정치인을 양성하겠다는 사명을 천명하고 있다. 정당이 되지 않는다는 선언은 당연히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한 선거운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공정연대의 활동은 후보를 내거나 선거 때 지지하는 전형적인 정치활동으로 보기 어렵다. 공정연대는 기독교적 대안 세력이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권 전반에 널리 진출하여 성숙한 정치풍토를 만들고, 우리 정치를 성경적 가치 위에 세우고자 하는 정치개혁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최초의 가시적인 의회진출 시도는 지난 17대 총선의 '한국기독당'을 들 수 있다. 이전에 수차에 걸쳐 대선에 출마했던 김한식 목사와 그 기반세력인 한사랑선교회는 타 종교의 유사한 사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정치참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논외로 한다. 한국기독당의 출현과 소멸 한국기독당(ccp.or.kr, 현재 폐쇄상태)은 보수교단 연합체로 대표성을 자임하는 한기총의 핵심세력이 주동이었고, 기독교 정치를 전면에 내세웠으며, 조용기, 김준곤 목사 등 보수 교회와 선교단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표성을 갖고 전면에 나섰다는 면에서 최초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당의 주동 인물이 기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못했으며, 그 지도자들조차 과거 독재정권에 대해 침묵했거나 동조한 사실들이 족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기독당은 교계에서조차 전적인 환영을 받지 못했고, 그 정치역량의 유무에 대한 논의까지는 접근하지 못했다. 한국기독당이 상식적으로 총선출마에 상응하는 정치역량을 보여준 일이 전혀 없이 총선에 뛰어든 것(총선 2개월 전인 2004년 2월 14일 창준위 결성, 3월 22일 창당)이나, 지역구 후보(9명)보다 더 많은 비례대표(황산성 외 13명)를 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기독당은 지역구 당선 보다는 1인 2표제인 선거법의 변화를 기회삼아 전국에 산재한 갈 곳 없는 표, 혹은 기독교나 특정교회를 하나의 '연고'로 하는 표를 긁어모아 의석을 탄생시키는 연금술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지역구 전패는 물론이고 기독당이 전국에서 얻은 정당득표는 228,837표에 불과(1.1%)하여 정당등록이 자동 취소됐다. 이 득표내용은 이 당 성립에 깊이 관여하고 상당액의 비용까지 제공한 조용기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 숫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그 외 당직자들이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교회나 조직들의 유권자 수를 고려한다면 이상하리만치 낮은 수치다. 기독당에서는 총선 결과가 부진한 이유에 대해 '홍보 부족'이라고 진단했는데, 이렇다 할 정책이 없었던 상황에서 홍보라는 것은 이름 알리기 정도였을 것이고 이름으로 득표하겠다는 것은 '종교연고주의'에 기대보자는 심리 외에 다른 의도로 읽기 어렵다. 그렇다면 낮은 득표율은 기독교인들이 종교연고주의에 의한 투표는 하지 않는다는 청신호로 봐도 좋을 것이다 한국기독당은 정교분리를 정면으로 뒤집는 적극적이고도 전격적인 정치참여의 논거로 '로잔언약'을 들고 나와서 일찍이 로잔 정신의 실천을 고민해 왔던 운동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로잔언약의 내용과 정신이 발표되고 인구에 회자되던 70년대 중반(80년대에는 이에 대해 별 반응이 없거나 '정교분리'의 가면을 쓰고 외면하던 인사들이 '로잔언약'을 거론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이러한 복음주의의 역사적 흐름의 일부분만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차용하려 하는 얄팍한 속내가 더욱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기독교사회책임(가칭)' 요즘 <뉴스앤조이> 등을 통해 약간씩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기독교사회책임'(가칭)은 적어도 지난 7월 이전부터 움직임은 있었으나 아직 실제로 설립절차는 밟지 못하면서 폭넓은 인적구성을 위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본 운동체를 제안하고, 이론과 인맥을 제공하고 있는 서경석 목사(서울조선족교회)와 고직한 선교사(Young2080 대표), 박승룡 사무처장 내정자 등이 실무축을 이루고 있으며 "손봉호 총장(동덕여대)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 원로)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등을 고문으로, 김진홍 목사(두레교회) 서경석 목사(조선족교회)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등을 공동대표로, 권영종 목사(예샘교회) 박성민 목사(CCC) 전병욱 목사(삼일교회) 등을 지도위원으로 내정했다(뉴스앤조이 기사 참조)"고 한다. 이 운동체에 관해 수차례 논의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한 주요 동기는 현 시국을 '국가적 위기'로 규정하고, 이 일에 보수 기독교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는 위기의 실체는 '"극심한 좌우 이념대립'이며 그 원인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다(서경석)"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권퇴진 운동보다는 좌우대립을 해소하고 아우르는 차기정권 창출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가시적으로 말하자면 열린우리당 내 중도파와 한나라당의 중도개혁파를 결집하는 세력 정도로 지지망을 구성하고 이들의 목소리가 좌우대립에 묻히지 않고 현실적 권력으로 설 수 있도록 하며, 차기 대선에서도 이 세력에서 대통령이 나오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당을 창당하려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즉답이 없었으면서도, 새로운 정치세력의 기반이 되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뉴스앤조이>의 몇몇 기사에 의해서 이들의 시국관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수구세력의 그것과 일치하는 데 대해 우려와 논란이 있었으며, 내게도 열린 자세로 토론과 대화를 요청해 왔으므로 몇 차례 대화의 자리에 기꺼이 참여한 바 있다. 시국관과 관련하여 가장 크게 강조된 부분은 "현 정권은 주사파가 잡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과거운동권=주사파'라는 도식과 이들이 청와대와 국회 등 곳곳에 포진해 있으며, 이들이 결국은 북한정권의 현상유지를 도울 뿐 아니라 결국 나라를 붉게 물들리라는 위기의식이다. 그러나 이들이 공동대표로 추대하고 있는 김진홍 목사는 과거 운동권 출신들과의 친분을 거론하며, 그들에게 직접 "너희가 아직도 주체사상을 신봉하느냐?"는 질문을 한 결과 "선배님, 우리가 바본 줄 아십니까"라는 대답을 들었다며, 과거 사회변혁의 한 방편으로 주체사상을 기웃거렸다 하더라도 냉전이 종식된 이 시점까지 그걸 붙잡고 있다는 생각은 비상식적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아직까지는 참여인사들의 현실인식이 중요한 부분에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구주류 세력이 최초의 정권교체와 두 번째 대선패배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수준은 디지털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세계는 그 이전부터 ‘냉전’이라는 큰 갈등이 사라지면서 '종교', '종족','테러' 등 새로운 갈등기제들이 부상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논의주체를 바라보는 시각도 '좌우'라는 선분상의 위치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으며 이미 동서남북의 면을 넘어 3차원적 입체분석이 필요한 실정이다. 이는 과거로부터 늘 좌파냐 우파냐 하는 2차원적 해석과 처방만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꽤 부담스런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우리 사회가 냉전적 이데올로기 대결을 넘어서는 과정으로서는 다행스럽고 지극히 바람직하다. 따라서 나는 어떠한 사회운동체도 이러한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더욱 다양성의 실체를 인정하고 키워나가는 방향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수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너는 좌파냐 우파냐, 그걸 먼저 말하라'는 식의 싸움에 묻혀 그 논의기회조차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사회책임(가칭)을 추진하는 핵심인사들이 입말로든 글로든 "현 정권은 주사파가 잡았다"라는 거두절미식 언사를 창립 동기에 해당하는 위기적 시국관의 근거로 잡는 것은 스스로 부추긴 이데올로기 대립을 위기의 근거라고 말하는 극우단체와의 차별성을 모호하게 한다. 이 외에도 나는 이들이 제시하는 현 정국의 좌우대립 중재자 역할을 위한 중도론에 대해서도 그 유효성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 중도론은 현 정국을 좌우의 수직선으로 보고, 그 산술적 중간영역에 해당하는 현실정치세력(한나라당의 박세일, 김문수 의원에서 열린우리당의 온건노선까지를 거론)을 모으고 힘을 실어주자는 내용인데, 이러한 2차원적인 현실인식의 틀은 현실을 쉽게 전달할 수는 있을지라도 어떤 조직적 행동을 디자인할 만큼 정확히 인식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 따라서 그 중간영역을 잡는데도 무리가 있다. 또 한국의 현역 정치인의 상당수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어떤 위치를 사수하기보다는, 표심이 모이는 곳을 따라 소신을 변경하는 방식으로 정치생명을 유지해 왔다는 측면에서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중도' 라고 부르는 식으로 좌표설정을 하는 것은 이후 운동의 방향을 잃거나 이들에게 교회가 이용만 당할 위험성이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는 무엇으로 정치발전에 기여할 것인가> 정교분리론은 다분히 기회주의적으로 활용되다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래서 대중들이 알 듯 모를 듯한 상황에서 폐기되고 있다. 기독당은 스스로 정치적 자산도 없이, 오히려 청산하지 못한 묵은 정치적 과오만을 안고 불로소득을 노렸다가 패퇴했다. 사실상 보수 기독교가 그간 꼭 필요한 정치적 목소리를 용기 있게 내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등 제몫을 해 왔다면 어떤 종류의 정치세력화든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정작 역할이 필요할 때는 방기하거나 역기능을 하고서도 과거행적에 대한 회개와 일정 기간의 속죄적 기여 등 납득할 만한 과정이 없이 별안간 정치의 중심에 서겠다는 발상은 기독교적인 태도라고 볼 수 없다. 국가든 민족이든 우리가 섬기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가 진정 로잔언약의 정신을 뒤늦게나마 존중하고 이에 책임 있는 실천을 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작금의 정치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그간 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일들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피고 반성하는 것이다. 특히 이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좌파를 포함한 진보세력들이 해 온 노력에 대해서 그 희생과 공과를 살피고 그 희생을 뒤늦게나마 아파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정직함이 요구된다. 그 이후에야 좌파와 진보세력의 과를 지적하는 일도 진지함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한국교회의 정치체제가 과연 민주적인지, 민주주의 정치지도자를 자연스럽게 길러낼 수 있는 체질과 역량잉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수많은 교회의 교권주의 지도자들이 교회라는 공회의 의사결정과 자신의 탐욕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교회개혁실천연대를 통해 전해오는 '영적 난민'들의 애끊는 구조신호로 감지되고 있으며, 교단 차원에서도 가장 큰 보수교단인 예장합동측의 총회가 난데없이 사찰과 관련된 납골당 논쟁과 얼토당토않은 단독성경번역 문제로 얼룩졌다. 다행스럽게도 이 문제를 옥한흠 목사 등 그간 교권과 거리가 있던 목회자들이 적극 나서서 결정적 파행은 막고 있지만 앞으로도 유사한 사태에 대한 우려를 안 해도 될 개혁은 아직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금의 이러한 교회 현실을 볼 때 양심적인 교계지도자들이 나라의 정치문제에 관여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 동력원인 한국교회의 비상식적 정치구조를 먼저 손댈 일이다. 상식이 서고 나서야 '민주적' 혹은 '성경적' 교회정치를 고민하는 제2장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단게로 권할 만한 일은 한국정치에 기여하기 위한 시민운동 실천이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손가락에 꼽을 만한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명선거운동'이라는 지극히 초보적이고, 비당파적인 실천에도 소극적이거나 아예 안중에 없었다. 지역의 목회자들 중에서도 자기 교회의 집사나 장로가 출마하면 공개적으로 지지하여 '교회연'을 또 하나의 연고주의에 편입시켰으며, 대선 때도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자고 하는 몰상식한 수준을 부끄럽럼 없이 드러냈다. 교회당을 특정후보의 연설회장으로는 빌려주면서 공명선거를 위한 토론장으로는 내놓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공명선거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역교회만큼 이 운동을 펼치기에 좋은 조직이 없으나 교회들의 참여는 존경할만하 극소수에 머물고, 선거 때마다 늘 고생하고 발로 뛰는 것은 청년학생 조직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시민사회에서 교회들의 체면을 유지하곤 했다. 이러한 교회에서 좋은 정치인이 길러질 리 없다. 혹여 배출된 정치인이 있다면 그의 역량이 공명선거조차 외면하는 교회의 자양분을 받은 것으로 볼 여지는 더더욱 없다. 공명선거운동 이외에도 한국정치에 기여하기 위한 시민운동 실천은 얼마든지 있다. 예컨데 장애인 고용 등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입법강화 활동이라든지, 지역구의 정치인들을 공신력 있는 기준으로 평가하고 감시한다든지, 대안적 제도를 연구하고 제안하는 일, 지역 간 갈등해소를 위해 화해와 중재에 나서는 일 등이다. 이러한 비판과 대안제시, 좀더 나은 제도의 창조, 정치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등의 활동은 복음주의 기독교의 정치적 역량을 한층 강화할 뿐 아니라 이 일을 통해 길러진 인력들이 현실정치에 진출하여 '기독교적 정치역량의 발현'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은화 열 므나의 비유> 정치에 나서려는 교회와 목회자들은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의 비유를 다시 들어야 한다. 비유에서는 '왕'의 통치자 되심을 내심 원치 않고 방해공작을 하는 백성과(14절) '악한 종'이 등장한다. 악한 종은 주인이 맡긴 은화 안 므나 라는 자산을 활용도 아니하고 남에게 맡기지도 아니했다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무서운 이"에게 이를 강변하고 그 있는 것 마저 다시 빼앗긴다. 한국교회가 '복음'이라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초월하는 엄청난 정치적 자산을 받아서 다섯 므나, 혹은 열 므나를 남겨서 그에 상응하는 '고을(cities, 17;19절)을 맡을 정치적 역량을 축적하고 있는가. 아니면 겉으로 주인을 섬기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그의 통치를 방해하고 복음에 내재된 정치적 역량을 활용하지도, 누군가에게 전하지도 않다가 그 있는 것 마저 빼앗길 상황인가를 먼저 묵상해야 할 것이다. 막연히 우리 교회의 쓸 만한 청년 정도가 아니라 복음의 정신에 입각해서 정치적 수련을 쌓은 확실한 인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매일 쏟아지는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서 제시할 기독교적 대안이 없다면,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후자에 속한다는 정직한 고백을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그 이후에야 앞서 길게 언급한 실천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윤환철 / 공정연대 실행위원, 2002공선협 사무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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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1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