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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을 여는 말씀] 교회, 희년을 살다(주간기독교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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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20-06-11 16:14 / 조회 1,3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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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희년을 살다
이헌주 /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희년’은 창조사건에서 시작하여 종말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주제다. 하나님나라의 시작과 완성, 그리고 영원에 이르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희년 정신’또는 ‘희년 가치’라는 말도 사회 윤리적인 담론으로 시작하여 구체적 실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구성으로 다루어야 한다.

레위기 25장에 나타난 키워드
희년 정신은 가난 때문에 빚을 지고 자신의 생산수단이 되는 땅을 상실하여 노예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죄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토지 문제, 주택 문제, 이자, 노예 해방과 땅의 안식으로 표현되는 생태신학적 주제에이르기까지 자기 존재와 일상을 상실한 자 또는 열매를 내기 위하여 수고한 땅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이야기다.
희년 정신을 생각하면서 나는 자유와 해방의 이야기 전에 ‘상실’이라는 키워드를 먼저 생각한다. 누군가의 상실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 레위기 25장은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형제를 속이지 말라’(14, 17절)라는 당부와 약속된 땅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을 약속하면서까지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강조(18절)한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누군가를 속여 자기의 이익을 취하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을 것을 내다 보고 계시다 할 것이다. 또한 약자의 소유가 탈취당하고, 생계가 위협받으며, 억압과 착취,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존엄을 상실하게 될 것도 아신다. 희년 정신은 이런 상실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창조물로서의 존엄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깃들어 있다.
희년에 대한 두 번째 키워드는 ‘자유’에 대한 것이다. 이 단어는 ‘채무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삶의 어려움으로 인해 땅을 상실한 사람이 다시 돌려받는 것이며, 가족과 이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통제와 억압으로부터 자유 하여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희년의 자유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에도 적용되어 자유의 기쁨을 모든 피조물이 함께 누리도록 하였다.
자유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고유한 ‘권리 회복’과 연결된다. 사람이라면 ‘인권’이라 할 것이고, 땅이라면 ‘창조물의 권리’라 할 것이다. 즉 자유란 각각이 가진 고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나와 너(I-Thou)의 관계나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서 ‘나’는 ‘너’와 ‘그것’이 가지는 고유 권리에 대하여 숙고해야 한다. 이런 성찰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보며 ‘참 좋았다’라고 했던 맥락을 이해 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교회는 이런 희년 정신이 가득해야 한다. 일상에서 자신을 상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존귀함을 받는 자신으로서 회복하고, 사회의 계층적 구조에서 비롯된 약자의 억압이 풀어져 자유롭게 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는 곳으로서 교회는 존재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된 나와 너 그리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존엄을 지키고 권리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해 볼 때 희년 정신을 잃어버린 듯한 교회의 오늘이 안타깝기만하다.

관계, 권리, 존중_희년 정신의 시작
희년 정신을 일상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나는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에게서 도움을 얻었다. 그는 “관계”(relation), “만남”(meeting), “대화”(dialogue), “사이”(between)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모든 존재를 ‘관계’로 인식했다. ‘관계’에 대한 이해는 희년 정신을 구현해 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되므로 우리가 모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부버는 관계가 생겨나는 일상의 영역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자연과 함께 관계를 맺는 일상이며, 다음은 사람과 더불어 관계는 맺는 일상, 마지막으로 정신적, 혹은 영적인 존재와 관계를 맺는 일상이다. 그는 이 세 가지 관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며 자연과 사람과 신과의 일상을 통해 관계의 완성을 이야기했다.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희년 정신은 바로 이 세 관계의 영역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나-너-그것에 대한 바른 관계설정을 통해 희년 정신이 무르익어갈 수 있다.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은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이웃들, 피조세계 그리고 영적 세계와 더불어 갖는 ‘살아 있는 관계’라고 말한다. 나는 그의 말에 깊은 공감을 가지며,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희년 정신을 기초한 일상의 요청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의 상실도 외면하지 않는 존중의 마음과 함께 나-너-그것이 가지는 고유한 권리를 회복하려는 마음을 토대로 관계가 맺어질 때 희년 정신이 발현 될 수 있으며, 이 진실한 관계를 기초할 때 하나님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여기에서 ‘존중’과 ‘고유한 권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된 모든 것이기에 그 어떤 누구도 너와 그것에 대하여 약탈과 점유가 불가하며 모든 존재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유한 권리’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창조된 모든 나-너-그것이 각각 고유한 창조의 원리를 가지며 상호 연결된 모든 것이 가지는 권리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희년 정신은 교회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의 관계망을 통해 전달, 확장하여 개혁에 이르게 될 것이다.

교회_희년 정신을 요청받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자신을 억압받는 자의 해방자로, 가난한 자의 변호자로 계시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이웃에 대하여 정의롭게 행동하도록 요청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이란 정의가 전제되어야 하고, 정의는 관계 속에서 존중과 권리의 보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언제나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교회는 선택해야 한다. 이런 선택과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교회는 포괄적 해방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며, 포괄적 해방이란 보다 우애적이고, 정의로운 상황으로 현재 상황을 변화 시켜 나가는 것이다.
희년 정신을 기초하여 나-너-그것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모든 것에 대한 존중과 창조물의 권리를 인정하여 인간의 탐욕을 거슬러 상실된 모든 존재에 대한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고, 구현해 가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요청 받았다.

잃어버림_교회가 잃어버린 희년
하지만, 오늘의 교회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성경으로부터 요청 받은 소명을 이루기 보다는 더 깊은 신음이 가득하다.
교회는 그 어떤 공동체보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함에도 근래 이야기되고 있는 A교회를 볼 때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인분 먹는 모습을 촬영하여 리더에게 보내고, 공동묘지 가운데 있는 나무에 묶여 허리띠로 매 맞는 일, 잠을 재우지 않거나, 참여자의 일상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는 등 반인권적인 행태가 신앙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멘붕팀’이라는 별칭을 붙여 핀잔과 모욕을 일삼는 일이 다반사였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은 왜 한국교회 모두의 몫이 되었는가? 타인에 대한 존중과 권리를 지키는 일은 교회에서 선포와 담론을 넘어서서 실천으로 드러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라는 비판을 시민사회로부터 듣고 있다.
또한 준비할 겨를도 없이 해고된 부목사의 슬픈 이야기도 있다. 담임목사와 당회에 절대 충성하지 않으면, 애매한 꼬투리로 한순간에 해고하는 일이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소명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위력을 가진 누군가에 밉보이면 ‘괘씸죄’로 인해 끝이다. ‘근로자’로서의 권리도 부여 받지 못하면서도 현실은 그보다 못한 처지다. 이런 황망함에 깨어진 가정과 상처 난 가슴을 부여잡은 이들의 통곡이 들리는데도 교회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현실이 이러하니 부목사들은 공평과 정의에 대한 노력보다는 누군가에게 아첨하기 위한 기회를 찾는 일에 혈안이다. 함께 교회에 대한 꿈을 가져보자는 담임목사의 약속은 공허할 뿐이고, 숨만 쉬고 사는 이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득하다.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목사, 성도를 그루밍하여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학대를 가하는 목사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다. 그뿐 아니라 청빙한 목사의 생계를 붙들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고 압력을 행사하는 장로와 성도의 이야기도 있다. 오죽했으면 ‘가나안 목사’, ‘가나안 전도사’라고 자신을 규정하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먼 곳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못된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교회의 이야기다.
힘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여 타인의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하는 일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가 차별과 폭언, 폭력으로 짓밟히는 일들이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너의 관계에서조차도 존중과 권리의 보호가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서 나-그것의 관계를 논하는 것조차 숨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서 희년 정신은 흐릿해지고 있으며, 희년 정신으로 말미암는 우애와 보호, 자유와 기쁨은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상실된 자들이 교회를 찾으나 더 큰 상실을 경험하고, 떠나고 싶으나 더 큰 상실이 있을까 불안하여 떠나지도 못한 가운데 조직에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비참하다.
권력이 없는 공동체(하나님의 백성)가 권력을 가진 공동체(계급적 구조)로 바뀌어 상실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연약한 자들에 대한 존중과 권리의 보호가 아닌 차별과 혐오의 선 긋기를 하는 곳.
그곳은 피상적 관계 조차도 없는 깨어진 관계로 오해와 험담이 있는 곳이며, 누군가가 나를 음해하지 않을까 하여 불안한 곳이다. 나-너-그곳을 지배하기 위한 경쟁과 다툼이 있는 곳이며, 생명력 넘치는 관계의 깊음 보다는 우울한 만남만이 있는 곳이다. 따뜻한 대화는 격론으로 변질되고, 격론은 너-그곳을 비하하는 욕설로 끝을 맺는 곳. 이곳에서 약자는 더 약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된다. 잃어버린 자는 그 나머지도 빼앗기고, 힘이 없으면 발가벗겨져 내동댕이쳐지는 곳. 바로 희년 정신이 없는 교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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