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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 교회 내에서 여성의 리더십에 대하여 ② (뉴스앤조이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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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24-08-07 11:33 / 조회 2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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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설교를 하되,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라(고전 11:2-16)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의 원칙에 따라 여자들도 교회 예배 때 기도 인도도 하고 예언(설교)도 하게 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고 예언하다가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바울은 여자의 복장 문제를 교정하려 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유대 회당 예배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지금도 보수 정통 유대 회당은 남자가 모이는 공간과 여자가 모이는 공간이 엄격히 구분돼 있다. 여자들의 방은 장막 뒤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고, 따로 예배를 드린다. 초대교회는 회당의 특징을 많이 이어받았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 거의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따로 떼어 회당을 모델 삼아 교회당을 만들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남녀 구분 없이 함께 같은 방에서 예배하게 했다. 그것부터가 놀라운 일로, 갈 3:28의 원칙이 교회 예배 상황에 적용된 것을 보여 준다. 그뿐 아니라 공예배에서 여자들이 대표 기도를 하고 예언도 하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약 시대의 예언이란 주로 성령의 영감에 호소해 성경(당시 우리의 구약)을 해석하면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인데, 요즘 말로 하면 설교다. 

 

이 본문을 해석하려면 다음 세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바울이 지금 바로잡으려는 문제, 즉 공예배 때 여자들이 머리를 너울로 가리지 않고 설교하는 문제는, 원천적으로 바울이 교회의 공예배 때 여자들도 설교하도록 가르쳤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둘째, 바울은 이 문제를 시정함에 있어 여자들더러 교회에서 잠잠하라, 즉 설교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고, 설교는 계속하되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셋째, 본문의 요점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 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볼 때 남녀가 한방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여자들이 토라(율법)를 배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여자들이 하나님의 영의 영감에 호소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열렬한 유대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그가 세운 교회들에서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들과 한방에서 예배드리게 했을 뿐 아니라 공적으로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게 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뒤 얻게 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갈라디아서 3:28에 천명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새 창조의 질서에 대한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또 바울이 그리스도 복음의 사회적 함축 의미를 실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이었음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공예배에서 여자들의 복장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 같으면 "여자들에게 공예배에서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게 했더니 문제가 많구먼. 아무래도 여자들이 공예배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은 안 되겠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여자들은 교회의 공예배에서 기도하면 안 됨', '예언하면 안 됨', 즉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바울은 일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의 원칙이 처음 시행될 때 갑자기 자유를 얻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그 자유를 너무 절제 없이 써서 부작용이 생겼음에도, 그들의 자유를 억제하지 않았다. 신학적인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복음의 원칙에 투철한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남녀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투철한 것이다. 

 

바울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도할 때나 설교할 때 그들의 머리를 너울이나 수건으로 가리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16의 긴 본문이 말하는 요점은 사실 이것 하나다. 이 요구를 강조하기 위해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호소하여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도 하고, '천사들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도 하며(11:10), 머리를 짧게 기르는 남자에 반해 여자는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여기서 바울이 '머리'론을 펴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자들에게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기 위해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망각하고 일반화하여, 모든 영역에서 남자/남편이 여자/아내에 대해 '(우두)머리', 곧 지도자/권위자 노릇을 할 수 있으므로 여자/아내가 남자/남편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일반 성도들이나 목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신학자들이라는 사람들까지도 본문을 다루면서 '머리(kephale)'라는 말이 '원천'이라는 뜻과 함께 '권위'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는 데에 집중한다. 

 

바울이 8절에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음을 이유로 들고 있으니, '머리'는 기본적으로 '원천'이라는 뜻이고, 여기서 '권위'라는 뜻도 부차적으로 파생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논쟁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은 남자가 먼저 났고 여자가 남자의 몸에서 났으니까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논리를 길게 펼치다가, 남자도 여자(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그 논리를 중단한다(11:11-12). 그래서 "그러나 주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도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도 않다.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자신의 논증을 종결한다. 

 

이 말로 앞서 펼친 '머리'론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냥 머리를 짧게 기르는 남자에 반해 여자는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이 자연의 본성에 합당한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서 당대 독자들의 상식에 호소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종결한다(11:13-15).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자신의 '머리'론도 상식론과 마찬가지로 창조 기사와 자연현상에 호소하지만, 신학적인 원칙이라기보다는 복장을 단정하게 하라는 교훈을 강화하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논리(ad hoc argument)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의 뚜렷한 한 가지 의도(여자들이 공예배 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즉 복장을 단정히 하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게 하려는 것)만을 중시해야지, 그것을 위해 스스로 펼치다 만 '머리'론에 사로잡히면 본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자가 머리를 너울로 가려야 할 이유를 '천사들 때문'이라고 하는데(11:10),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다수가 동의하는 해석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가 명백한 본문에서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바울의 요구를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비추어 보면, 본문에서 명백히 밝히지는 않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남자들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것과 교회 밖에 악평이 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이나 지중해 여자들은 대개 수건을 쓰고 다녔다. 한번 생각해 보자.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는 문화권에서 여자들이 수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면서 남자들 앞에서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면 얼마나 큰 성적 자극이 되었을까?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퍼져 교회에 대한 오해를 더욱 강화할 위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누구에게나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고전 10:32, 고후 8:21, 살전 4:12).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해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흠 잡히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초대교회 바울의 선교 상황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모른다. 

 

이에 관한 결정적 증거는 1세기 말 플리니라는 로마의 지방관이 로마 황제에게 쓴 편지다. 편지 내용은 "제게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왔습니다. 그들이 새벽부터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자에게 찬송을 하고 자기들끼리 예배하고 종교의식을 하는데, 제게 잡혀 온 죄목은 이들이 남녀 혼음을 하고 아이들을 제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들을 문초해 보니까 고발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니 황제께서 제게 지침을 내려주십시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1세기 바울의 선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도 엄청난 음해를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도시나 직업의 수호신 숭배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 황제 숭배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으로부터, 지역사회로부터, 직업 동료들로부터 소외됐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무슨 새로운 종교 행위를 한답시고, 남녀가 함께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썩하게 철야 기도를 한다고 하니, 비그리스도인들이 금방 말을 지어냈다. 이들이 혼음하고 아이들을 제사한다는 극단적인 악선전까지 지어내 퍼뜨린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적대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와 악선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뭐든지 볼품 있게 하라, 질서 있게 하라고 강조한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누구에게든지 거침돌이 되지 말라. 외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줘라"(고전 10:32)라는 구절을 비롯해, 고전 14:32, 고후 8:21, 살전 4:12 등 곳곳에서 바울의 관심이 무엇이었나? 교회 밖의 외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줘라, 오해의 빌미를 제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너울을 벗어던지고 남자들과 함께 한방에 모여서 예배하며 기도나 설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외부 사람들에게 성적인 오해와 음해를 위한 빌미를 주기 딱 좋았을 것이다. 아마 이런 우려가 크게 작용하여 바울이 여자들더러 복장을 단정히 하고 예배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하지 않았나 짐작한다. 

 

하여간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고린도전서 11:2-16은 여자들의 설교권을 박탈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가 여자의 '머리'임을 내세워 남자의 가부장적 권위·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공예배 시 여자들이 복장을 단정히 하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라는 가르침만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초대교회 때부터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고 리더십을 행사했구나, 바울이 갈 3:28의 복음의 원칙을 그렇게 철저히 실천했구나' 하고 탄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 후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바른 신학을 보수한다는 한국의 일부 교회에는 여성이 교회의 공예배에서 가르치고 리더십을 행사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아니, 복음의 원칙과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죄를 진지하게 회개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여성 지도자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최초 선포자로 삼으셔서 제자들에게 보내셨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아주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인데, 톰 라이트(N. T. Wright)는 주께서 이들을 '사도'로 파송하셨다고까지 해석한다. 초대교회에 또 다른 여성 지도자들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루디아, 브리스길라, 다마리(사도행전 17:34), 빌립의 딸들(사도행전 21:9), 집사 또는 행정가 뵈뵈(로마서 16:1-2), 사도 유니아(로마서 16:7), 유오디아, 순두게 (빌립보서 4:2) 등이다. 

 

한국의 보수 교회들에서도 이제는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까지는 수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여전히 여자를 안수하여 목사로 세우는 것은 반대한다고 한다. 혹 그 이유가 목사직을 구약의 제사장직에 의거해 이해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앞서 고전 7:2-16을 강해하면서, 한국 교계에서 널리 인정되는, 남편/아버지가 가정의 제사장이라는 생각을 비판했다. 개신교, 적어도 장로교에서는 목사를 제사장(priest)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종(minister)로 이해한다. 그리고 안수는 주의종들을 세우는 의식이다. 그래서 목사뿐 아니라 장로도 안수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 교역자를 안수로 세우는 것이 왜 틀린 것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종(leitourgos)으로, 자신의 복음 선포 사역을 이방인들을 성령으로 성화되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제물(prospora)로 바치는 제사장적 직무(hierougein)를 감당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했다(롬 15:15-16). 여기서 제사장적 언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믿게 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백성이 되게 하는 그의 사역에 대한 메타포로 쓰인 것이다. 그의 사도직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므로, 은혜의 전달자 노릇을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의 사도적 사역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는 '제사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의 목사들은 물론 전도하고 이웃을 섬기는 평신도들도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개신교의 '만인사제론'의 뜻일 것이다. 교회의 여성 사역자가 이런 의미에서의 '제사장적' 직무를 감당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사람을 평신도들과는 달리 교회에서 전임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사역을 맡은 일꾼(minister)으로 세우기 위해 안수하는 것이 왜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고 반대해야 할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계속) 

 

김세윤 /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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