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고] 교회 내에서 여성의 리더십에 대하여 ③ (뉴스앤조이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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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24-08-22 10:04 / 조회 236 / 댓글 0본문
가정생활, 피차 복종해야 할 관계(엡 5:21-33)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의 원칙을 고전 7:2-16에서 결혼과 관계하여 적용했듯이, 이 에베소서 본문에서 소위 '가족 윤리 규정(Haustafel)', 또는 가족 간의 상호 의무 사항 조항을 가르치는데도 적용한다. 그런데 이 단락 문맥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부터 읽었고 그 구절만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21절, 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부터 읽는 것이다. 이것이 부부 관계에 대한 가르침 전체를 망라하는 주제 선언에 대한 큰 제목이다. 뒤이어 나오는 아내의 의무와 남편의 의무에 대한 규정은 그것의 해설 또는 부연 설명이다.
그러므로 21절의 서로 복종하라는 말은 부부 관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주권자적 뜻에 따라, 그리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의미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복종하라는 말이다. 그 원칙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22절에서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며,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댄다(23-24절). 또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면서, 이후 구절들(26-33절)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죽 대는데, 그러다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을 두 번 더 되풀이한다. 형식적으로만 봐도 누구에게 더 강한 부탁을 하고 있는가?
"아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에는 두 마디밖에 덧붙이지 않는다. 반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는 훨씬 긴 말을 덧붙임으로써, 강조가 바로 후자에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내용적으로도,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한 반면, 남편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심 같이 하라"고 했다. 어느 쪽에 더 큰 의무가 주어진 것인가? 남편에 대한 요구가 훨씬 크다.
왜 그럴까? 당시 남편 우위의 고대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였기에 두어 마디 덧붙이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도록 하는 데는 특별한 설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본문의 진정한 기독교적 특성은 바로 이것이다. 약자인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전통적인 요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인 남편에게 아내를 자아 희생의 정신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었듯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일반 세상 윤리와 다른 기독교 윤리의 특성이 여기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 바울이 '약한 자들'보다는 '강한 자들'에게 자기 권리 희생을 더 크게 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남존여비 사상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남편 위주의 문화가 여전히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에베소서 본문은 교회가 무엇을 강조해야 할 것인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의 의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위해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23절 말씀을 대단히 중시한다. '머리'라는 말이 권위의 의미를 더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 사실이다. 또 많은 사람이 분명히 남편이 위고 아내가 그 아래인 위계질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본문은 갈라디아서 3:28의 말씀과 근본적으로 모순을 일으키는 셈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뚜렷이 표현한 갈라디아서 3:28을 무시하고, 이 세상의 전통적인 윤리와 다를 바 없이 남존여비 사상을 가르치는 듯한 에베소서 5:22-25을 골라잡는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갈라디아서 3:28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는 본질적으로, 구원론적으로는 동등하나 기능적으로 또는 역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말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스꽝스러운 현상은 그런 역할 차이론으로 말미암아 불이익을 당하는 여자들은 그게 남녀동등의 신약성경 기본 가르침을 헛되게 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남자들은 그것이 남녀동등의 원칙에 합치하며 성경적이라고 우겨 댄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또 삼위일체적 신론에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적으로 동등하면서도 위계질서가 있고 기능이 다름(또는 성자의 성부에 대한 복종)을 유비(analogy)로 들면서 남편과 아내의 상하 위계질서와 아내의 복종 기능 개념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적 신론의 기본 의미는, 초월하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 방법을 설명하려는 것으로서, 초월하시는 성부가 성자를 이 세상으로 '보내심(sending, commissioning)'으로 성자가 성부를 이 세상에 계시하시고 성부의 구원을 이루셨으며, 성부가 성자를 통하여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령이 성자 안에 이루어진 성부의 계시와 구원을 실재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 관계는 '보내심'으로 규정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보내심' 받은 성자는 '보내신' 성부를 순종하여 성부를 계시하고 구원을 이루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 구조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초월자의 내재의 존재 방식이 아닌, 남편은 '보내고' 아내는 '보냄 받는' 구조도 갖추고 있지 않은 부부 관계에 삼위일체론적 관계를 유비로 적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바울이 남편에게 요구하는 '사랑'이란 말보다 더 포괄적으로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내어 주심"이라고 정의한다[비교: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백성 간의 리더십에 대한 정의(막 10:35-45)]. 자기를 내어 줌(self-giving)이다. 이것은 자기주장(self-assertion)의 반대말이다. 자기희생으로서의 '사랑'은 '복종'의 다소 제한된 개념을 내포할 뿐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자아 전체의 희생을 뜻한다. '복종'도 일종의 자기희생이지만, 사랑은 '복종'을 포함하는 더 총체적 자기희생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복종'하는 기능, 남편은 '사랑'하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다거나,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 주면 되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도 고린도전서 7장에서와 같이 바울이 부부 관계를 철저히 동등성과 상호주의의 원칙하에 다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이 이런데도,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않고 남편더러 하게 함은 '순종'이지만, 남편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않고 아내더러 하게 함은 '순종'이 아니라 그냥 '사랑'이라고 우겨 댈 것인가?
그러므로 에베소서 5:21-33의 맥락과 그곳에서의 한 중심 단어인 "사랑"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바울의 남녀 관계에 대한 전체적 기본 가르침(갈 3:28), 특히 고린도전서 7:3-16에서의 부부 관계에 대한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에베소서 5:21-22, 25절에 나오는 권면의 진정한 뜻은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종하라"이다.
그런데 왜 바울은 아내의 '복종', 남편의 '사랑'이라고 구태여 단어를 바꾸어 사용했을까? 그것은 바울이 남자에게 '복종'을 포함한, 훨씬 더 많은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에, 비교할 수 없이 길고 절대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음에 잘 드러나 있다.
여자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늘 하던 관행이므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가르침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 여기서 진짜 새로운 (곧 기독교적인) 것은 남편들이 아내에게 자기 몸을 내어 주는, 자아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요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어느 남편이 이 본문에 쓰인 '머리'라는 개념과 '복종'이라는 표현을 붙들고 자기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한다면, 그는 그 행위로 자기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21-31의 말씀을 더 이상 가부장적 부부 관계를 지탱하기 위해 써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의 가르침에 따라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강조하면서도, 그래도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므로 남편의 가정에서 '대표권'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어떤 경우 또는 어떤 문제들에 있어서는 남편보다 아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지혜를 받았을 수도 있는데, 그런 때도 남편이 결정하고 아내는 그냥 은혜스럽게 순종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현명한 일인가? 그렇게까지 율법주의적으로 남편의 '머리 됨' 또는 '대표권'을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예수와 사도 바울의 정신에 합당한 것이며 가정에 유익한 것인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26-40)
바울은 철저히 모든 삶의 영역들에서 남녀 관계를 갈라디아서 3:28의 원칙에 따라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34-35(한글개역성경)은 이것과 정반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구절이 우리 교회들에서 여성의 설교나 리더십 행사를 부인하는 성경적 근거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 어떤 사본들에는 이 절들이 40절 이후에 놓여 있다. 또 이 절들은 문맥을 끊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예언하고 방언하는 것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 중이다. 즉 당시 고린도교회의 예배 도중 중구난방으로 방언하고 예언하여 무질서한 상황이 빚어진 것을 바로잡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공예배에서 방언보다는 예언하는 것이 더 낫고, 방언과 예언은 두세 사람만 할 것이며, 방언은 통역이 있어야 하고, 예언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하지 말고 한 사람씩 차례대로 하라고 권한다.
이어서 바울은 '성령의 주권자적인 영감으로 방언이 터지고 예언이 터지는데 어떻게 하나?'라는 반문을 의식하고,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 의해 제재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인다(고전 14:32-33).
그러고 나서 갑자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가 나오고, 36-38절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했느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영을 받은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로 이어진다. 끝으로 바울은 38-39절에서 지금까지의 권면 전체를 요약하여, 예언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방언도 허락하되, 모든 것을 질서 정연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문맥을 보면, 분명히 34-35절이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데 대해 바울이 타이르는 문맥을 끊고 삽입된 것임이 드러난다. 34-35절을 제쳐 놓고 32-33절에서 36-40절로 건너뛰어 읽어 보라.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영감하므로, 자신들은 예배 질서에 아랑곳없이 계속 예언해야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타이르는 내용으로 일관되지 않은가?
그래서 많은 주석가는 사본학적인 불안정성과 문맥상의 문제점을 감안하여 34-35절을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본다. 필자의 스승이셨던 F. F. Bruce 교수도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형제교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은 바울이 쓰지 않고 후기에 삽입된 것으로 보았다.
34-35절과 어휘나 사상이 같은 본문은 디모데전서 2:11-15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본문들은 디모데전서가 쓰인 1세기 말 무렵의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 쓰였다고 본다. 디모데전서 2:11-15과의 유사성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전서 14:34-35도 아마 그 무렵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의 공예배 시 성경 해석이나 교리에 대해 질문해 대고 논쟁을 벌이는 시끄러운 상황(35절을 유의할 것 - 여자들이 설교하는 상황이 아니고 질문해 대는 상황임)을 바로잡기 위해서 쓰인 후, 고린도전서 14장에 삽입되지 않았나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구절들이 고린도전서 14장의 맥락에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남녀 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고린도전서 11:2-16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모순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남녀 관계에 있어 일관되게 갈라디아서 3:28의 동등성의 원칙에 따라 가르쳤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4장보다 조금 앞에 있는 11장에서 공예배 시 여자들도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하되, 다만 머리에 수건만 쓰고 하라고 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전서 14:34-35을 썼다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자신이 쓴 말을 잠깐 만에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자기모순을 범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럴듯한 일인가? 그렇다면 바울은 한 편지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을 주는 종잡을 수 없는, 신뢰할 수 없는 사도인 셈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신학적인 문제를 안겨 주는 일이다.
바울이 여자들더러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치고 싶었다면, 여자들이 질문해 대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설교하는 문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11:2-16에서 그렇게 가르쳤어야지, 왜 거기서는 설교하도록 내버려 두고, 이제와서 여자들이 질문해 대어 좀 시끄러워진 것을 가지고 그렇게 엄중한 명령을 한단 말인가?
바울이 원래 여자들은 교회에서 설교하면 안 되고 그저 잠자코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고린도전서 11:2-16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해 버리지, '머리론, 천사론, 자연론' 등 여러 논리를 복잡하게 펼친 후에 겨우 여자들더러 머리에 수건을 쓰고 설교하라고 했겠는가?
(고린도전서 34-35절의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말을 들이대며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막는 근본주의자들은 말끝마다 성경을 들먹이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제대로 보지 않아, 그 말이 후대에 삽입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의 설교/가르침을 막는 것이 아니라 질문해 대며 소란 피우는 것을 막는 것임도 깨닫지 못한다. 또 정작 여자들의 설교 문제는 바울이 앞서 고린도전서 11:2-16에서 다루면서 전혀 막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34절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여자들의 교회 내에서의 설교/가르침을 막기 위해 인용되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하고, 그 목적을 위해 계속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여성에 대한 가르침들은 상호 모순되는가?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 14:34-35을 사본학적으로, 그것이 속한 맥락에서, 또 바울의 남녀 관계에 대한 가르침의 전체 맥락에서 살펴보았을 때, 그것은 바울이 쓴 말이 아니고 후대에 쓰여 현재의 맥락에 불안하게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교회 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34-35을 디모데전서 2:11-15과 함께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보고 금과옥조로 삼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그들은 바울을 한 편지에서도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을 주는 사도로 만들고, 성경을 한 책 안에서도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의 권위를 심히 훼손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성경을 훼손하고 마는 셈이다.
그런데 그들로 인해 또 하나의 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그들은 남녀 동등성과 상호주의의 원칙을 천명하는 바울의 말씀들(갈라디아서 3:28, 고린도전서 7:2-16, 11:2-11, 에베소서 5:21-31 등)과, 그것들과 정반대되는 말씀(고린도전서 14:34-35) 중 후자를 골라잡고 전자를 배격하는 결정을 한다. 수량적으로도 전자가 월등히 우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보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잘 표현하는 반면에 후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배치되어 겨우 구약의 율법에 호소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심각한 해석학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의 율법주의적 경향은 이렇게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로마서 10:4)의 복음을 저버리고, 무엇이나 율법적인 것을 선호하게 하여 심히 불확실한 고린도전서 14:34-35과 같은 율법주의적 언명을 가장 중요한 금과옥조로 삼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율법의 핵심으로 가르친 사랑의 이중 계명(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과 전혀 무관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등의 말을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그토록 정죄한 율법주의적 태도로 고수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결국 복음의 첫 설교자들이었던 막달라마리아 등 여자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그들이 설교한 복음을 무효화하며, 심지어 그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로 내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 자신들의 귀중한 법("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을 어기도록 교사한 분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맺는 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 특히 바울은 그들의 하나님나라와 칭의의 복음으로 인류 역사상 노예와 여성을 해방하고 인종차별을 타파하시었다. 그래서 그 하나님나라/칭의의 복음이 형성한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죄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 사회 신분적 차별, 남녀 차별이 많이 해소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를 오늘날 여성을 굴종시키는 이슬람 세계와 자국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억의 인간들을 노예화하는 힌두교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비교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자연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과연 진리이고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귀히 여긴다는 한국의 보수 교회들이여, 더 이상 복음을 거슬러 여성을 굴종시키지 마라!
[*이 강의안은 필자의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두란노)에서의 설명을 많이 재사용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면, 그 책을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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