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연재] 하나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 한국 개신교 (뉴스앤조이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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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25-08-27 12:18 / 조회 1,066 / 댓글 0본문
2025년 현재, 청년 의제는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과거에 강조되던 '자립'과 '독립'이라는 가치는 빛을 잃었고, 이제는 그저 청년 지도력을 어디서든 찾기에 급급한 상황입니다. 이는 단지 교회의 문제라기보다, 한국 사회 전반의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명확한 사실은, 한국교회가 지금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 매우 현실적인 위기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청년 이슈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공을 들여야 할 과제입니다.
핵개인 시대
송길영은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 팬데믹 이후 등장한 새로운 개인상을 '핵개인'이라 명명하고, 이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핵개인의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이 핵개인들은 K-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멀티 유니버스적 세계관에 익숙하며, 다양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대입니다. 핵개인은 기존의 연역적 사고가 아닌, 귀납적 사고로 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하려 합니다. 문제 해결 방식에서도 이전 세대와는 명백한 차이를 보입니다. 핵개인의 사고 체계는 기존의 문법과 다르며, 그 차이는 사고방식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형성·갈등 해결·정체성 형성 전반에 폭넓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보면, 교회는 핵개인에게 '단일화된 사회'로 비칩니다. 선택지도, 다양성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는 정체돼 있고, 새로운 대상을 타자화하거나 두려워하며, 낯선 것을 경계하거나 심지어 죄악시하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핵개인이 바라볼 때는, 교회 공동체는 '사유하지 않는 집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구조 속에서, 스스로 성찰하거나 질문하기보다는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교회 생활은 사람을 직접 만나고 접촉하며,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면대면으로 대화를 나누고, 전화하며,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는 세대 간 소통에도 적지 않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며, 때로는 '보여 주기 위한' 사회적 가면을 쓰는 일까지 감내해야 합니다. 기묘한 공간입니다. 위계적이고 수직적이지만 소통을 강조하는 곳입니다. 이 안에서 과연 충분한 소통이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한국교회
오늘날 한국교회는 심각한 자기애, 곧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사고방식, 다시 말해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보편성을 가진다고 믿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나르시시즘의 가장 큰 특징은 타자를 대상화하거나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세상을 품기보다 세상과 단절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정죄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이제 세상 속에서 신뢰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고립된 집단, 혹은 자기 특권을 방어하려는 조직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본래 공공성과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교회가, 자기방어와 폐쇄성으로 현실에서 위치를 잃고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나,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건물, 규모, 조직, 전통, 스타일 등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절대화하면서, 본질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 안에서는 청년, 이방인, 낯선 사람,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머물 자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다시 물어야 할 질문
오늘날 교회에서 기독 청년은 존재하더라도 주체로 설 수 없는 구조 속에 갇혀 있습니다. 신앙의 형식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청년이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프로그램과 행사들이 매주 반복되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에 관한 질문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지금, 교회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일부 교회는 여전히 제정일치적 구조, 즉 정치와 종교가 결합한 공동체를 이상적인 모델로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개인의 주체성이 존중되고, 스스로 삶을 능동적으로 형성해 가는 시대입니다. 신앙 역시 이 시대성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시대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현실과의 간극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 간극을 인정하는 순간, 교회는 변화의 가능성 앞에 서게 됩니다. 자기 이해, 자기 성찰, 그리고 갱신의 여정을 걸을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교회는 다시 '살아 있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을 회피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미래를 말할 자격조차 잃게 될 것입니다. 변화의 출발점은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입니다. 그 용기를 낼 수 있을 때, 교회는 다시 하나님의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그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걸음을 방해하는 장벽이 아니라, 함께 걸어 주는 동행자, 지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청년의 새로운 시도와 질문이 환영받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질문하며 버틸 수 있는 용기
영화 '벌새'(2019)에서 한문 선생님 영지가 은희에게 묻습니다. 영지는 청소년기 은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습니다.
영지: 은희가 아는 사람이 몇 명이에요?
은희: 네? 어… 아는 사람이요?
영지: 네, 얼굴을 아는 사람들 말이에요.
은희: 어… 한 50명?
(중략)
영지: 그럼, 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은희: 네?
이 물음은 곧,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공허합니다. 넓은 부지와 웅장한 건물이 세워져 있지만, 정작 마음은 허전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기독 청년의 마음을 진심으로 알아주고 품어 주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청년은 더 이상 청소년이 아닙니다. 단순한 양육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을 실천할 수 있는 충분한 주체입니다. 주체성의 기본은 자율성입니다. 자율성이 보장될 때, 비로소 반성적 기제가 작동하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려는 고군분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체성은 단순히 기존 질서를 부정하거나 거부한다고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없다면, 주체적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는 '서로'를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질문은 용기이며, 주제 파악입니다. 그것은 현실에 맞서 벽을 깨부수는 과감한 실천도 아니고, 시지프스처럼 돌이 다시 굴러 내려갈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밀어 올리는 집요한 치열함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실천만큼이나 질문입니다. 질문은 주체성의 시작입니다. 물론, 질문의 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떠나서는 안 됩니다. 버티는 용기 또한 중요합니다. 질문하며 버틸 수 있는 믿음, 그것이 주체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니 우리, 버팁시다. 그리고 질문합시다.
남기평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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